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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땔감의 변천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8년 04월 11일



인간이 다른 동물과는 크게 다른 존재로 세상에 군림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불의 발견과 이를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불은 어둠을 밝혀 주는 수단으로 중요했으며 추위로부터 보호해주고 음식물을 조리하고 흙을 빚어 굽고 쇠붙이를 녹여 가공하는데 이용되었다.

널리 문명의 불씨를 피었던 불은 또한 인간에게 상상력의 대상으로 이어져 역사를 살 찌워 왔다. 불이 가지고 있는 무서운 파괴력의 연상을 종교의 대상으로 취급하기도 했다. 불의 발견은 자연 발생으로 일어나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벼락으로 일어나는 불과 땅에서 솟아나는 지진 화산 등의 지각 활동으로 일어나는 불도 있다.

산에서 나무가 마찰하여 저절로 불을 일으키는 일도 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자연적인 불에 대한 기록은 적지 않게 남아 있다. 역사상 가장 처음으로 기록된 화재는 신라 지마왕 21년(132) 궁궐의 남문에 불이 났다는 경우이고

이후에도 삼국시대와 고려, 조선 시대를 통하여 많은 화재의 기록이 남아있다. 이들 화재의 대부분은 그 원인이 설명되어 있지 않고 또 당시로서는 가장 대형 건축물이 있던 궁궐들이 피해를 입은 수가 많다. 이는 당시 사람들은 이런 불이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난 불이라 믿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백제 비류왕 30년(333) 5월에는 별똥이 떨어져 왕궁에 일어난 불이 번져 민가까지 태웠다는(삼국사기) 기록도 있다.

이런 불은 천화라고 기록되기도 하였다.
한국사에 단 한번 분명한 화산의 불이 기록되어 남아 있다. 고려 목종5년(1002년) 6월 탐라산(한라산)의 네 곳으로부터 붉은 용암이 솟아나와 닷새 만에 그쳤다는 기록이다.

당시의 화산 폭발은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이 땅에서 있었던 화산 활동의 기록이다. 인공의 불은 역사시대에 들어와 이전부터 우리나라에서는 다른 지역과 비슷하게 충격법이나 마찰법에 의하여 불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다. 충격법에 의한 불 만들기는 부싯돌을 황철광으로 세게 쳐서 불꽃을 만들면 거기에 마른 쑥 같은 인화하기 쉬운 것을 달아 불이 붙게 만든 것이며 마찰법이란 나무판을 고정 시키고 그것에 직각으로 나무 막대를 구멍 속에 넣어 세게 마찰하여 나무막대에 불을 붙이는 방식이나 이런 원시시대이래의 방법 외에도 오목거울이나 볼록렌즈를 써서 햇빛을 모아 불을 일으키는 방식도 일찍부터 알려져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오목거울이 만들어 졌다는 사실은 2세기부터의 일로 알려져 있고 화경으로서의 오목거울은 양무열은 금수라 알려졌다. 오목 거울은 고려 때에는 많이 만들어졌고 17세기 초에 간행된 허준의 동의보감)에는 오목 거울로 햇빛을 모으고 거기에 마른 쑥을 대놓으면 불을 붙일 수 있다는 것이 적혀 있고 의료법으로 사용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햇빛을 모아 같은 원리로 불을 만들 수 있는 볼록렌즈는 이미 통일 이전의 신라 때부터 혹은 그전부터 화주라는 이름으로 사용되었음이 확실하다. 그러나 실제로 일반.서민들에게는 불을 필요에 따라 새로 만든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대게 가정에서는 불씨를 지켜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화로에 보관한 불씨를 죽이지 않고 지키는 것이야말로 그 집안 며느리 또는 주부의 가장 중요한 의무였다. 민담에 남아 있는 불씨는 지키기 위하여 온갖 고초를 겪어야 하는 어느 며느리의 이야기가 그런 사정을 잘 보여준다.
일반 가정에서는 불씨를 대대로 지켜가는 것이 사실이나 조선시대 병조에는 해마다 다섯 차례 불을 다시 만들었던 기록도 있다. 이 5회의 개화는 입춘 입하 토왕절 입추 입동에 행하여 그때마다 바닥으로 쓰는 널판지 나무나 그 구멍에 넣고 마찰하는 막대가 각기 다른 종류를 쓰게 정해져 있다.

(만기요란군정편2)더욱 중요한 불을 새로 만드는 의식으로 청명 때에 내병조에서 실시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동국세시기)

청명때 정부에서는 느릅나무와 버드나무로 불을 일으켜 각 관청에 나누어 준다고 적혀 있고
(열양세시기)같은 일이 한식에 있었던 것으로 적혀 있다.

청명은 24절기의 하나로 동지의 순간에서 104일 4시간 10분 정도 뒤가 되게 마련인데 한식은 동지 뒤 105일 때의 날을 지정한 갑절이다. 불을 만드는 근대적 방법은 1880년대 이후이나 한성주보에 보도된 바에 의하면 처음으로 성냥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영국인에 의해서 1885년 8월 서울의 양화도에 성냥공장이 세워지면서부터였다. 때를 같이하여 석탄과 석유가 연료로 한국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석탄에 대한 아주 초보적인 것은 조선 초에 알고 있었음이 밝혀져 있지만 그것을 제대로 알기 시작한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 석유 또한 개화기에 들어와 외국으로부터 석유가 수입되어 시중에서 판매되기 시작하면서 특히 등유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연료가 알려지기 시작한 개화기는 또한 불에 대한 전혀 새로운 세계가 열린 그런 시기였다. 처음으로 전기에 대한 근대적 지식이 퍼지면서 제2의 불로서 알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천둥번개는 일찍부터 알려져 있었고 비단옷을 문지르며 탁탁하는 소리를 낸다는 것쯤은 이익의 (성호사설)에서도 기록되어 있다. 이것으로 이미 18세기 또는 그 이전에 정전기 현상에 대한 관찰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 수 있다.

근대적인 정전기 현상에 대한 기록은 19세기 초 이규경이 남긴(오주연문 상전산고) 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당시 서울에는 뇌법기를 가진 사람이 있었는데 이것을 돌리면 번쩍번쩍 하면서 불을 내며 여러 사람이 서로 손을 잡고 둘러서면 자극을 주기도 한다는 기록을 남겨 그것이 정전기 발생발지였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전등이 켜지기 시작한 것은 미국의 에디슨 전기회사에서 수입한 전기시설이 궁전 안에 설치되어 전등불을 환히 밝힌 때인 1884년 이후의 일이었다. 1898년 4월 조선 황실과 미국인들의 협력으로 설립한 한성전기회사가 처음으로 동대문 발전소에서 120kw 발전기를 설치하여 서울 진고개 일대에 전등을 달아 불을 켠 것이 우리나라에 제2의 불이 켜진 시초였던 셈이다.

전기는 전신과 전차등에도 이용되면서 자리 잡기 시작했지만 한국전쟁이 끝난 1950년대 후반까지 전기사정은 어려운 형편이었다. 경제발전과 함께 한국의 불은 곧 제3의 불이라는 원자력 발전을 포한하기 시작했고 1980년대에는 전력이 남아도는 속에서 원자력 발전에 대한 비판적 정서가 민주회의 목소리와 더불어 높아졌다. 한국에 처음 원자력 발전이 시작된 것은 1987년 4월 29일 고리 원자력 제1호기가 발전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은 1960년대부터 연구용 원자로의 도입으로 시작되었으나 그것이 본격적인 불로 이용되기 시작한 것은 1978년의 일이었다. 이어 원자력 발전은 고리에 4기 월성에 1기 영광에 2기 그리고 울진에 1기가 건설되어 국내 전력수요를 감당하게 되었다.

그 이후에도 원자력 발전기를 증설해왔다. 나무를 때 밥을 짓고 방을 따뜻하게 해오던 방법을 석탄의 사용으로 대체되었다. 석탄사용은 1960년대 이루 가속화되어 다섯 가지의 연탄이 규격화 되어 난방용의 대종을 이루다시피 되었다.

정부의 산림녹화 정책에 의하여 산림이 울창하게 된 것이 아니라 땔감의 변천에 의하여 산림이 울창해졌다. 각종 가스는 한국에 새로운 형태의 불로 점점 중요성을 더해가고 있다 1930년대에 이미 도시가스가 일부 사용되기 시작한 일은 있었지만

가스가 제대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초 일본에서 가스가 수입된 뒤의 일이나 1964년 대한 석유공사가 울산정유공장에서 프로판 가스가 생산되기 시작하면서 그 사용은 확대되기 시작하였고 도시가스는 1970년대 초 공장이 보급되기에 이르렀고

이와 함께 석유 역시 중요한 연료로 사용되기 이르렀다. 또 태양열주택 등이 건설되어 태양을 직접 불로 이용하게 되었고 태양발전, 조력발전 소수력발전 등이 다양한 에너지원의 개발이 계속되고 있다. (다음호에 계속)
↑↑ 박극수 웅상발전협의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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