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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상사람들의 삶을 말하다(42)-상

웅상에서 가장 근면성실하고 검소한 소정부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8년 01월 11일
ⓒ 웅상뉴스(웅상신문)
정부는 웅촌면 와지마을에서 1941년 출생하여 해방되던 1945년, 다섯 살 때 일본에 계시던 큰아버지댁이 고향으로 돌아오시게 되어 큰댁 농지 6,000여평을 소작하던 아버지 소개동(蘇价東)은 큰댁 농지를 돌려주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고 먹고 살길이 막막하여 어머니와 가족들을 데리고 부산 영선동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아버지는 국제시장에서 철물가게를 운영하다 영선고개에서 쌀장수를 하였다. 쌀은 고향마을 와지에서 주로 구입해 부산까지 운반해다 팔았다. 당시 쌀 가격은 생산지와 소비지 가격 차이가 많아 먹고사는 일에는 지장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가난한 봉급자나 피난민들에게 쌀을 공급해 주었는데 주로 외상 쌀을 사먹고 봉급날이 되면 외상값을 갚는 사람들이 많아 쌀값을 주지 않고 다른 곳으로 이사해 버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벌이를 해도 떼이는 돈이 많아 여간 어려운 장사가 아니었다.

큰 식당을 경영하는 분에게 외상을 공급하였는데 반년 가량은 철저하게 한달에 한번씩 정리를 잘 해주다 반년이 지난후에는 일부 정리하고 일부 남겨두는 거래를 하다 2년 거래를 하고 나니 쌀을 외상으로 공급한 양이 80kg들이 백여 가마가 되었다. 점포에는 손님도 많고 큰점포라 그 쌀값만 받으면 집도 구입하고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설레임으로 의심 없이 빚까지 내어 열심히 쌀을 식당에 공급하였는데 식당주인은 어느 날 야간도주를 해버려 가정사정은 설상가상의 형국이 되었다.

당시 농촌 최고 머슴의 일년 새경은 80kg 들이 쌀 다섯가마니를 받던 세월에 20년 머슴살이를 해야 받을 수 있는 양의 쌀값을 떼인 것이다. 쌀 다섯가마니는 당시 웅촌과 웅상 논 한마지기(200평)을 구입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이 일로 인하여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홧병까지 얻어 살아갈 길이 없어 고향 와지로 다시 돌아왔다. 와지에는 논이 1,000평 정도 있었는데 이를 경작하며 연명하기 위함이었다.

정부는 동광초등학교 입학하는 날까지 글자 한자 써보지 못하고 입학했다. 그 당시에는 입학하는 아동들 대다수가 다 그랬다. 정부에게는 글을 가르쳐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는 간신히 당신 이름 자는 쓸수 있는 정도의 학력 실력이었지만 장사일로 바빠 새벽에 나가 밤중에 들어오니 자녀들 글자 가르칠 시간이 없었고 엄마는 까막눈이었다. 입학하는 첫날 숙제가 한글로 자기 이름 써 오라는 숙지였다. 소정부는 글자가 어떤 모양인지 알지 못했고 이를 물어 볼 곳이 없어 입학하는 학생들의 저고리 가슴에 달아주는 손수건 위에 한문으로 붙혀주는 이름표를 그대로 옮겨 간 것이다. 글자도 그림도 아닌 글을 그려간 것인데 선생님은 외 이런 글을 써 왔느냐 야단을 치지 않고 고생했다며 칭찬을 했다. 1학년때 담임선생님은 3학년 때까지 담임선생님을 맡으셨다.

선생님은 정부의 가정사정을 알았는지 월사금 면제 혜택도 주고 미잉여농산물 강냉이 가루죽을 타먹을 수 있는(무상급식) 배려를 해 주셨다. 당시 동광초등학교는 부산에서 최고 명문학교였다. 6.25동란으로 중앙청이 부산으로 피난을 올때 고관대작들의 자녀와 부유한 피난민들의 자녀들이 동광초등학교로 전학을 오게 되어 문교부지정 연구 학교가 되어 국가재정이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다른 학교에 비해 국가재정지원을 더 받았던 것 같고 헌옷, 학용품 등 원조물자도 더 지원된 것 같았다. 피난민들로 인해 학교 아동수는 배로 늘어났다. 한 학년에 4~5반 정도이던 학교가 10반 정도 되었다. 학교는 유엔군사령부가 되고 학교 수업은 용두산 공원에서 군용천막을 친 교실에서 공부를 했다.

기거할 곳이 없는 피난민들은 천막교실을 걷어가는 일이 빈번 해 밤에 천막교실마다 분단별로 천막을 지켰다. 천막은 바람이 불면 날아가고 추울 때는 너무 춥고 더울 때는 너무 덥고 비가 오는 날은 비가 스며들어 판자 가교사를 지어 지붕은 루삥으로 덮은 교실에서 공부를 했다. 젊은 청춘 남녀들이 연애할 장소가 마땅한 곳이 없었는지 공원 곳곳에서 연애하는 모습도 자주 보았다.

정부는 초등학교 입학 이후로 부모님으로부터 단돈 1원도 타 간 적이 없다. 반친구들의 숙제 그림그리기 습자쓰기만들기(공작) 글자쓰기 학습문제풀기 등 온갖 숙제를 날마다 2~3명씩 해주고 대가로 돈을 받았다. 부유한 자녀들이라 그런지 정부의 판단으로는 놀라운 금액을 주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딱지놀이, 구슬치기, 연필굴리기를 해 딴 딱지 구슬 연필을 팔기도 하고 동전치기를 해 번 돈으로 학교 납부금도 납부하고 학용품도 사고 용돈으로 사용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부모님이 주신 돈이나 유산은 아무것도 없고 몸둥이 뿐이다. 공부는 줄곧 시험만 치면 일등을 했지만 급장을 한 번도 하지 못했다.

급장으로 지명을 받아도 말더듬이라 할 수 없다고 사양을 했다. 말더듬으로 인해 발표할 용기가 나지 않아 손을 들어본 일이 없다. 말더듬은 군에 가서도 같은 부대원들이 곤욕을 당했다. 번호구령을 명령받으면 정부 차례가 되면 긴장이 되어 말더듬 현상은 훨신더해 번호 다시 명령을 계속 받아야 하고 부대원 전체가 기합도 많이 받았다. 그런데 웅변이나 노래를 하면 말더듬 현상 없이 잘 되었다. 동광초등학교 재학 시 전교 어린이 중 독립선업문을 다 외우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는데 그중에서도 정부가 가장 잘 외운다며 3.1절 기념행사시 독립선언문 낭독을 원고없이 해도 말 더듬현상은 없었다. 웅변선수로 출전하여 수상한 적도 있다. 휴전이 되고 가족들이 와지로 돌아와 정부도 동광초등학교 5학년 1학기때 웅촌면 검단초등학교 전학을 했다. 중앙청과 피난민들이 돌아가게 되자 학생이 없어 얼마 있다 동광초등학교는 폐교가 되었다.

부산에서 공부를 하다 농촌에서 공부를 하게되니 도시보다 친구들의 학력수준이 낮아 공부하기 훨신 수월했다. 학교를 오가는 논길 산길에서 체험한 갖가지 추억거리가 많고 한 학년에 한반뿐인 학교라 친구들간에도 친숙하게 지낼 수가 있어 좋았다. 검단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가고 싶었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학교를 가고 싶지만 말한마디 하지 못하고 졸업식을 마친 다음날 부산 동래 양계장에 취직하여 근무하게 되었다. 2년간은 밥만 얻어 먹고 2년이 지난 후에는 월급 2,000원을 받았다. 양계장 주인댁에서 숙식을 제공받고 양계장의 일은 새벽부터 오전까지는 눈코뜰 사이 없이 바쁘지만 오후시간에는 한가한 시간이 있을 때마다 초등학교 다니는 주인 댁의 자녀들 가정교사 노릇을 했다. 일은 고되었지만 주인댁에서는 가족처럼 대해주고 자녀들도 형 오빠하고 불러주면 잘 따랐다. 지금도 그분들과 연락을 주고 받으며 왕래를 하고 있다. 큰아들 진하는 대학교수를 하고 있고 둘째아들 진홍이는 기업체 임원이고 셋째아들 진철과 딸은 교편 생활을 하고 있다.

양계장에 처음 취직이 되어 일을 시작할 때는 나도 돈을 벌어 양계장을 경영해야지 하는 생각도 했지만 양계장 시설을 갖추기 위한 밑천도 엄청 들어가야 하고, 지금은 닭 전염병 AI가 극성을 부리지만 당시는 뉴케슬이라는 전염병이 와서 닭이 전멸하는 모습을 몇 차례 보고는 양계장을 하겠다는 꿈은 잠깐으로 끝났다. 양계장에 근무하며 받은 월급 전액을 한 푼도 사용하지 않고 전액 저축을 했다. 돈을 사용할 시간도 없고 사용할 일도 없었다. 밥 먹여주고 잠재워주고 철철이 옷도 사주었다.

고향에 가고 싶어도 시간도 어렵고 차비가 아까워 가지 않았다. 양계장에 7년을 근무하고 장사를 해볼까 궁리하고 있는 터에 아버지한테서 연락이 왔다. 농사 지어서는 가족들 식량도 간신히 되고 옷가지 한가지 신발도 사 신을 형편이 못된다고 하며 장사를 해야겠는데 밑천이 없다고 했다. 무슨 장사를 하시려고 하느냐 문의하니 5일시장마다 다니며 농기구(삽,괭이,호미,낫 등)와 철물점을 할 것이라 하시기에 첫 마디에 그간 저축해둔 10만원으로 장사 준비를 하시라고 하며 아버지께 드리고 양계장을 그만두고 아버지와 같이 5일장 장사꾼으로 나섰다. 이때 정부의 나이가 20세였다. 5일장은 웅촌장, 서창장, 남창장, 목도장, 언양장, 송정리장, 울산장 등 번갈아 가며 하루도 쉬지 않고 장사를 했다. 장짐은 장짐을 운반하는 트럭이 있었는데 장마다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에 짐을 챙겨두면 열쇠를 트럭기사가 열고 정확하게 운반해 주었다. 장사는 봉급자와 비교될 수 없는 정도의 재미가 있었다. 소매도 열심히 하고 서창에서 대장간을 하는 민영철에게 농기구제작을 의뢰하여 싼 가격으로 대량구입하여 울산장과 언양장에서 소매업자들에게 넘겨주는 중간 도매업도 했다. 그때 가장 많이 팔린 농기구는 홋쿠라는 거름 뜨는 농기구가 가장 많이 팔렸다.

22세 되던 해 북부마을 장춘웅 방앗간 앞 지금은 모텔이 있는 자리 당시는 초가집을 15,000원에 구입하여 장사 물건 집하장으로 사용했다. 24세에 군입대를 했다. 하던 장사를 아버지와 남동생과 여동생에게 맡겼다. 정부가 군생활 하던 중 1964년 형님이 돌아가시고 아버지도 형님이 돌아가신 지 1년 후 돌아가셨다. 형님은 기구 한 운명을 타고 나신 분이다. 결혼을 두 번이나 하고 오래 사시지도 못했다. 형님의 2번 결혼 비용도 정부가 부담하고 남동생 두 사람 여동생 결혼 비용도 정부가 감당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 이후에도 정부는 군에 있는 몸이라 5일장 장사는 남동생과 여동생이 맡아 했다.

동생들이 열심히 장사를 한다고 했지만 군에서 휴가 올 때마다 장에 같이 가 장사를 하니 물건 양도 엄청 줄었고 고정 손님도 많이 줄었다. 31개월간의 군생활을 하고 제대 명을 받은 지 1개월 앞에 휴가를 받아 장사 준비를 시작했다. 같은 마을에 사는 웅촌 전 면장 노진일의 아버님에게 돈 2만원을 빌려 국제시장 근처 자갈치시장에서 리어커를 5천원에 구입하고 리어커 나무상자 제작비로 천원을 주고 남은 돈으로 팔 물건을 구입하니 얼마되지 않아 군에 가기전에 거래하던 국제시장 도매상 몇곳을 찾아가 군제대 예정일이 1966년 10월 15일임을 알리고 장사 밑천이 모자라 외상물건을 달라고 하니 그간 신용때문인지 다들 그렇게 하라고 하며, 물건을 외상으로 주기에 리어커에 실을 수 있는 양만큼 싣고 그 이외 물량은 천일정기화물에 붙였다.

리어커에 짐을 가득 싣고 국제시장에서 서창까지 끌고 왔다. 길도 멀지만 팔송에서 서창까지 당시 비포장 도로 상태라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국제시장에서 오후 1시경 출발하여 다음날 새벽3시에 서창에 도착했다. 배도 고프고 땀도 나고 했지만 밥값도 아깝기도 하고 밥먹는 시간이 더 아까워 팔송에 와 막걸리 한잔을 선 채로 사먹고 영천에 와 한 잔을 더 사먹고 한순간도 쉬지 않고 정관면과 웅상면의 경계지점인 지경고개에 와 이제 웅상땅에 도달했다는 안도감에 휴식을 취하며 휘영청 밝은 달을 쳐다보니 그때 쳐다 본 달만큼 밝은달은 일생동안 없었다. 밝은 달이 정부에게 전하는 말이 정부야 열심히 살아라. 너의 앞날도 비취는 달빛처럼 밝은 날이 올 것이다 라는 벅찬 희망을 주는 빛과 말을 전달 받았다.그 순간을 간간히 생각하며 기운을 차려 지금껏 살아왔다.

박극수
시인
(현)양산문화원 이사
양산시 향토문화연구회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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