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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華嚴)의 진리 천성문화(千聖文化)로 빛나다.

양산문화원 향토사연구소 김 성 곤
화엄경은 비로자나불의 세계로 전개되는 우주의 경전
적멸굴은 원효와 그 일행(일천 수행자)들이 수행 정진한 자연동굴
천성문화는 화엄으로 불국토를 만들었고 화엄의 불국토는 우주와 하나 되는 광명으로 화엄벌에서 천성이라고 하는 화엄의 빛이 되이

웅상뉴스 기자 / jun28258@gmail.com입력 : 2022년 11월 28일
↑↑ 양산문화원 향토사연구소 김 성 곤

양산 시민은 지역문화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문화를 삶의 한 축으로 생각하고 각 지역마다 그 지역의 문화에 대한 특색과 자부심을 가지고 문화를 양상하고 생활 속으로 끌어 들이고 있다.
<양산>하면 생각나는 것이 있다면 <통도사>이다. 통도사는 불교문화로 지역적이기보다 우리나라 불교의 전체적인 느낌이 온다. 삼보 중 불보종찰로 또는 국지대찰로 잘 알려진 사찰이다. 통도사는 지역문화의 보편적 문화로서 가치보다는 한국 불교문화의 중심에 통도사가 있는 것이다.
양산의 뿌리문화 기원은 신라 삽량주 시대로 본다. 먼저 삽량주 시대의 인물을 더듬어 보면 만고충신 박제상이다. 양산의 삼조의열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박제상은 울산의 인물로 부각되어 있고 양산에서는 점차 잊혀져 가고 있다.
그리고 문무왕 때에서 신문왕 때에 삽량주 도독을 역임한 김서현 도독이 있다. 신문왕 때에 삽량성을 쌓았고 그것이 지금의 신기산성과 북부산성이다. 그러나 김서현 도독에 대하여 입증할만한 자료가 없다는 것이다. 특히 부부총이 그렇다.
역사에서 민족 최고의 고승으로 원효성사가 있다. 원효를 신라 삽량주 인물로 부각하면 낯설다 하겠지만 천성산의 의미는 보편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고 하겠다
필자는 천성산이 보듬은 천성문화가 신라 삽량주 시대에 원효에 의해 화엄벌을 중심으로 싹이 텄다고 전제하고 일천 수행자의 성불(득도) 가치를 화엄벌에서 회향함으로써 원적산이 천성산으로 변천한 것으로 천성문화가 화엄사상으로 삽량주 시대의 지역문화로 안착 되었음을 주장한다.

양산의 자연환경은 태백산맥의 여맥이 남쪽으로 뻗어내리면서 시의 북쪽은 밀양시와 울산 울주와 접하고 남쪽으로는 부산의 금정산과 접하여 있다.
북서부 남쪽으로는 낙동강이 흐르고 양산천지구에서 북동쪽으로 경주 모화지구간에는 양산단층선이 통과하고 있어 지형상 특이지구를 형성하고 있다.
주요 산으로는 영축산(1059m), 정족산(700m), 대운산(742m), 천태산(631m), 오봉산(450m), 금정산(801m)이 양산을 에워 싸고 있다.

양산은 신석기 시대부터 터전을 잡았을 것이다 라고 추정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신라세력의 중심지 경주와 금관가야의 중심지 김해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낙동강 하구 물금에서 언양에 이르는 긴 골짜기는 낙동강과 경주를 연결하는 긴 통로로 왜의 침입이 빈번했던 곳이다.
646년(선덕왕 15)자장율사가 통도사를 창건하였고 문무왕(665년)이 상주와 하주를 분할해 삽량주를 설치 총관으로 김서현 장군을 임명하였다. 그후 신문왕 은 김서현 장군을 도독으로 임명하였다. 757년(경덕왕 16)에 양주(良州 )로 개칭했다.
고려때는 1018년(현종9년)에 방어사를 두고 김원현 장군을 양주방어사로 임명했다. 원 지배 하에서는 몽고의 간섭으로 양주를 밀성군에 병합시켰다가 충렬왕때 복귀되었다.
1413년 조선 태종 때 양산군으로 개칭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세종 때 양산군 호구수는 425호 인구는 937명이었다.
1970년도에 군의 중앙 남북으로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고 1973년 동래군을 흡수했고 1986년 11. 1. 동부출장소를 두고 기장, 장안, 일광, 정관, 철마를 행정관할 구역으로 하였고 1996년 3월1일 양산시로 승격되면서 흡수된 동래지역은 기장군에 편입되었다.
현재의 양산은 양산시로 승격되면서 양산읍이 4개동으로 분동되고 물금면이 물금읍으로 2007년에 웅상읍이 4개의 분동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양산은 불교문화재로 통도사 안양암 북극전(1985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을 비롯하여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으며 통도사 국장생석표(보물, 1963), 미타암 석조아미타여래좌상(보물, 1989. 삼국유사 포천산 석굴비정)용화사 석조여래좌상(보물 1968)등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양산은 신라 삽량주 시대를 그 뿌리로 하여 발전하여 왔다. 삽량(歃良)이란 이곳에 살았던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잦은 왜침으로 지처 있었다.
그러다가 왜침의 격랑을 맞아 최후의 결전을 다짐하고 서로의 피를 내어 입에 머금어 삼키며 결사항전을 각오로 싸웠던 것이 삽량이란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

1) 신라 눌지왕의 두 아우가 고구려와 왜에 볼모로 가 있었다. 왕은 박제상에게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는 아우 복호를 구해 줄것을 부탁하였다.
박제상은 왕명을 받들어 고구려에 잠입 복호를 구해 내었다. 다시 왕은 박제상에게 왜에 볼모로 가 있는 아우 미사흔을 부탁하자 바로 왜국으로 잠입 미사흔을 구해 귀국시키고 박제상은 왜국에서 화형 당하여 순국하였다.
이렇게 하여 효충마을에서 태어났다는 박제상은 만고충신의 이름으로 삼조의열의 반열에 올라 삽량주 시대의 인물로 모시게 되었다.
박제상의 부인은 치술령의 신화를 만들었고 그 딸은 미사흔과 혼인하였다. 박제상은 그 가족의 영향력으로 울산의 인물로 부각되면서 양산의 인물에서 점차 잊혀져 가고 있다.

2) 가야(가락국)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양왕)은 백성을 생각하는 애민정신으로 532년에 신라 법흥왕에게 나라를 양여하고 무력 형제를 신라 진골로 귀화시켰다.
무력은 신라와 백제의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을 사로잡는 전공을 세워 신라요직에 올랐다. 그러나 대야성 전장에서 전사하여 시신을 찾지 못하고 취서산 자락에 유택을 마련하였다.
그 아들 김서현은 골품을 뛰어넘는 사랑으로 성골 출신의 만명을 데리고 당시 만노군(현재 진천군) 태수로 부임하여 그곳에서 김유신을 낳았다.
통일신라가 되어 문무왕 때 김서현은 삽량주 총관으로 부임하였고 훗날 도독이 되었다.
삽량주는 통일신라 9주 중 하나로 경북 상주에서 창녕 일부를 아우러는 영역을 분할하여 그 중심지역이 삽량(오늘의 양산)이었다.
북정 고분군의 부부총이 郡誌나 市誌의 기록에는 가야계 신라인 무장의 무덤일것으로 추정하고 있어 그 진위가 밝혀지지 않고 있다.
3)신라 선덕여왕 때 원효는 15세에 출가하여 30대에 분황사에서 자장율사에 이어 주지를 역임했다.
나이 40세에 요석공주와 인연으로 환속하면서 소성거사라 하여 원적산에 입산하였다. 의상이 찾아와 함께 두 번째 당나라 구법여행을 떠났다.
서해 해변(지금의 평택 수도사로 추정)에서 당나라로 가려고 배를 기다리던 중 심한 비바람을 피해 토굴에 들었다가 밤중에 목이 말라 해골에 들어 있는 물을 마시고 잠들었다. 날이 밝아 마셨던 해골의 물을 생각하니 구토가 났다.

悟道頌

心生則種種法生 마음이 나면 모든 법이 일어나고
心滅則種種滅生 마음이 멸하면 모든 법이 없어진다.
心滅則髑髏不二 마음이 멸하면 해골과 몸이 둘이 아니며
三界唯心萬法唯識 삼계가 마음이고 만법이 유식이라
心外無法互用別求 마음 밖에 법이 없으니 어찌 따로 구할 것이 있으랴
我不入唐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네

이렇게 하여 <일체유심조>의 깨달음의 경지를 얻은 원효는 당나라 구법여행을 포기하고 돌아오게 된다.

원효의 발걸음은 척반대로 향했다. 이때의 나이 45세이다. 입정삼매에 들어 있던 어느 날 원효는 깔고 앉아 있던 판자에 <海東元曉求衆>이라 써서 당나라 법운산을 향해 던졌다.
법운산이 긴 장마로 산 사태가 나려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법운산 아래 태화사라는 사찰이 있었는데 이곳에 일천여 명의 수행자들이 수행정진 중이었다.
사찰 앞 공중에서 빛을 발하며 돌고 있는 물체를 보고 하나 둘씩 마당으로 모두 나왔을 즈음에 물체가 마당에 떨어져 이를 확인해보니 <해동원효구중>이라 적혀 있었다. 이때 사찰 뒷산이 무너지면서 사찰은 매몰되었다. 대중은 해동원효구중이라 쓴 판자가 대중의 생명을 구하였다고 해서 원효를 찾아오게 되었던 것이 <求衆擲板>의 이적 사건이다.(송고승전 기록)

필자는 천성문화가 삽량주 시대의 중심문화가 되어야 하는 당위성과 천성문화의 핵심인 화엄경과 천성산의 유래에 대해 연구하고자 한다. 민족문화의 새벽을 열었던 천성문화를 삽량주 시대의 정신문화의 발상과 화엄문화가 지역사회에 끼친 영향을 들여다보고 천성문화를 삽량주 시대의 핵심 문화로 하여금 그 시대의 뿌리 문화로 한다는 목적으로 연구하고자 한다. 

천성문화의 발상

-원효 일천 수행자와 만나다.
당나라 법운산 태화사 일천 수행자들이 원효의 구중척판 이적으로 목숨을 건져 원효를 찾아 한반도 해동으로 수행의 길을 나서기로 하였다. 때를 같이 하여 원효는 불광산, 대운산, 시명산 계곡(시명골)을 따라 동래로 향했다. 지금의 금정산 범어사 원효암이 있는 곳인데 당시는 범어사가 창건되기 이전이었다. (범어사 원효암에는 원효석대가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
-한듬계곡에서 산신령으로부터 길 안내를 받다.
원효가 일천 수행자들을 데리고 한듬계곡을 따라 길을 가든 중 지금의 산령각 앞에서 산신령의 영접을 받는다. 여기서 길 안내를 받고 지금의 내원사 터애서 여장을 풀었다. (원적산 한듬계곡은 원효가 대둔사를 창건한 이후에 붙혀진 계곡명이다.)산신령을 만나 길 안내를 받은 곳에 지금의 산령각이 건립되었고 뜻있는 기업체에서 해마다 제사를 올리고 있다. 한듬계곡은 원효가 대둔사를 창건한 이후 대둔사 옆 계곡이 대둔의 순 우리말로 한듬으로 유래되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대둔사지와 89암자
대둔사지로 추정되는 곳에 다랭이 논이 조성되어 한듬마을 주민들의 생계유지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대둔사지 좌.우측으로 폭우에 계곡이 넓혀지면서 대둔사지에 있던 유물들이 많이 유실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를테면 현 노전암 대웅전 좌측에 부도탑이 있는데 <선화당 비구니 대종사>의 것으로 조선 숙종 이후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사찰이 있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노전암 능인 주지스님(84세)에 의하면 대둔사 불화가 노전암 법당에 걸려 있었는데 대웅전 화재로 그때 소실되었다고 말해 주었다.
이를 증명하는 데는 양산시립박물관 신용철 관장이 <대둔사>가 불화에 새겨져 있는 것을 보았고, 대성암 원진 주지스님도 <대둔사> 글귀를 보았다고 한다.
대둔사를 중심으로 원적산에는 일천 수행자들이 89 암자를 창건했다.

현재 굴법당에 석조아미타입상여래가 있는 미타암, 원효와 의상의 존영이 있는 원효암, 폭포 절벽에 낭견관세음보살을 볼수 있는 홍룡사(당시 낙수암),
원효가 요석공주와 3일간의 뜨거운 인연을 떠나 스스로 소성거사라 칭하고 입산했던 마애불 석굴암(당시 반고굴),
원효와 일천 대중이 원적산 화엄벌을 오르기전에 머물렀던 내원사(당시 내원암),
원효대가 있는 금강암(당시 불일암),
산령각 보존 사찰 익성암,
솥발산의 금봉암, 대웅전에 온돌 불을 짚혔던 사찰 안적암,
수백 년 된 은행나무가 있는 조계암, 원통전이 있는 대성암,
대둔사의 노전이었던 노전암(당시 관음암),
석가모니불을 모신 성불암, 길 없는 길을 따라 천성산 깊은 계곡 속의 비로굴(14개 암자)이 존재하고 있고,
원효가 20여년간 머물렀던 대둔사지를 비롯하여 한지를 만들었던 운흥사지, 원효와 수운이 기도했던 적멸굴, 금빛물의 금수굴, 일천 수행자들이 공동식사를 맡았던 죽림사지(5개 암자)가 있다.

그 외 다수의 사찰 터가 발견되고 있어 조사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89 암자의 일천 수행자들은 시간을 정하여 대둔사에 거처하는 원효를 모시고 집북재에서 만나 화엄벌에 올랐다.

화엄경은 우주의 경전이다.

화엄경은 비로자나불의 세계로 전개되는 우주의 경전이라 할 수 있다. 태백산 부석사 일주문의 현판에 <해동 화엄종찰>이라 쓰여 있어 한국 화엄의 근본 도량으로 원효나 의상에 의해 신라불교의 중심이 된 곳이다.

불국사, 해인사 같은 한국의 큰 사찰 가운데는 화엄경의 교주인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모시는 화엄 사찰이 많이 있다.
명산 각처의 비로봉은 화엄경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상징하고 있다. 천성산의 비로봉과 비로굴, 영축산 옥련암의 본존불인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영축산 비로암이 그 예이다.
화엄경은 석가모니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성도 한 후 그 자리에서 해인삼매에 들어 문수보살, 보현보살과 같은 상근기 보살들에게 스스로 깨달은 내용을 설한 것이라고 하는데 보살들이 삼매에 들어 부처님이 깨달은 내용을 감득한 후 부처님의 가피력을 받아 설하는 내용이다.
화엄경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성불한지 2주째 되는 날 해인삼매에 들어 지상에서 천상, 다시 지상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범우주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삼매란 불교의 수행 속에서 반드시 성취하여야 할 중요한 성과에 속하며 해탈과 성불로 가기 위한 중요한 이정표이다.

화엄경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한 최초의 법문 거룩한 네 가지 진리
<사성제품.四聖諦品>
고성제.苦聖諦 괴로움의 진리
집성제.集聖諦 집착의 진리
멸성제. 滅聖諦 번뇌를 멸하고 고를 멸한 해탈의 경지
도성제. 道聖諦 깨달음에 이르는 진리

화엄경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화엄경은 3막 9장 39품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3막이란 지상, 천상, 다시 지상으로 이어지는 범우주적 공간의 무대이다.
9장이란 법회의 횟수를 말한다.
제1회 법회에서는 보현보살이 부처님의 세계를 설하고
제2회 법회에서는 문수보살이 믿음에 대해 설하고
제3회 법회에서는 법혜보살이 십주 법문을 설하고
제4회 법회에서는 공덕림보살이 십행 법문을 설하고
제5회 법회에서는 금강당보살이 십회향법문을 설하고
제6회 법회에서는 금강장보살이 십지법문을 설하고
제7회 법회에서는 등각과 묘각에 해당하는 정각의 세계를 설하고
제8회 법회에서는 보살도를 총괄하고
제9회 법회에서는 선재동자가 지금까지 설했던 부처님의 세계와 보살도를 재현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화엄경이 최초로 전래된 것은 문수신앙과 관련하여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화엄만개(노래로 된 화엄경)를 가져왔다고 전한다.
화엄경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하고 다양하지만 다투지 않는 세계 다르지만 하나가 될 수 있는 세계를 보여 준다.

- 법계란

화엄교학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법계란 진리의 본성 내지는 진리의 영역을 의미한다.
화엄교학의 사법계(四法界)
.사법계 (事法界)현실의 세계, 현상의 세계를 말한다.
.이법계 (理法界) 진리의 세계, 공의 세계, 본체의 세계를 말하는데 반야심경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다.
.이사무애법계 (理事無碍法界)
현상세계와 진리세계가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원융무애하여 현상세계가 진리세계이고 진리세계가 곧 현상세계이다.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
본체(理)와 현상(事)이 걸림없이 현상계의 걸림없는 이치가 사사무애법계이다.

정토사상과 화엄사상이 천성문화에 끼친 영향
-정토사상
불교는 수행의 종교이다. 수행하여 깨달음을 이룸으로써 해탈을 성취하려는 자력구원의 종교이다. 그러나불교가 대중종교로 발전하면서 부처와 보살의 본 원력에 의지해 중생 구제의 목적으로 타력신앙으로 전환이 되었다. 그것이 정토신앙이다. 정토란 청정한 불국토를 말하는데 정토사상은 인도에서 대승불교의 발생과 함께 나타났다. 정토사상 계열의 대표적인 것은 아마타경(1권), 무량수경(2권), 관무량수경(1권)을 정토삼부경이라 한다. 정토사상은 타력신앙으로 발전했다. 타력신앙이란 自利가 곧 利他라는 사상적 토대위에 발전하게 되는데 정토삼부경에는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의지하여 극락정토에 왕생함으로써 불퇴전의 경지를 이루고 구경(究竟)에 가서는 무상의 보리와 열반을 증득한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신라시대의 정토사상

신라시대의 정토사상은 한국 정토신앙의 전성기였다. 우리나라의 정토사상은 무량수경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신라의 정토사상은 두 계통이 있었다.
하나는 수나라 정영사 혜원 계통인 지론계와 또 하나는 당나라 현장등의 유식계로 분류하는데 신라 정토사상은 원광에 의해 도입된 것으로 보고 있다. 원효는 염불을 통한 정토신앙으로 관불(觀佛)과 칭염(稱念)을 두루 갖춘 칭관(稱觀)염불을 가르쳤다. 이러한 칭관염불은 골품 사회인 신라 사회의 일반 민중에게는 정신적 양식이 되었다. 신라는 삼국통일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전란과 사회적 불안에서 미타 정토신앙은 약제가 되었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정토신앙

광덕과 엄장의 서왕에서 광덕은 밤마다 아미타불을 염하고 관행을 닦아 정토에 왕생하였고 엄장은 원효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 관법을 닦아 정토에 왕생하였다.
.사찰(미타도량)에서 사자(死者)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신앙형태로 발전
.백월산의 아미타 현신 성불은 서방정토 왕생이 아닌 신라 국토에서 아미타 불로 현신 성불한 것이다.
.포천산 오비구의 서왕에서는 다섯 비구가 10년 동안 수도 정진하여 함께 왕생하는데 연화대에 앉아 통도사 공중에서 설법하고 노래하며 서방정토로 떠난 설화가 있다.
.염불하던 한 비녀에 대한 왕생으로 사문의 왕생이 아닌 천한 종의 왕생이 라는 점에서 정토신앙이 대중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기록을 볼 때 신라 사회는 정토신앙이 민중 속에 깊이 스며들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설화들이 주는 의미에 통하여 신라의 정토신앙은 사원이나 승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대중 신앙으로 일반화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원효는 포천산(지금의 천성산) 미타굴에서 아미타불 입상을 모시고 정토신앙을 염원하였고 국가나 민중사회가 고통을 함께 극복해 나가야 할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신라 사회의 불안한 민중들에게 정신적 위안을 줄수 있는 정토신앙<나무아미타불>으로 부처님의 명호를 염송하게 하였다.

-한국의 정토사상

불교가 부처님 열반 후 약 500년이 지나 인도의 서북부에서 아미타 신앙과 극락정토 사상의 기원이 시작되었다.
당시의 대표적인 인물이 인도의 용수보살이다. 용수보살은 대승불교의 대성자로 정토사상에 관계되는 십주비파사론(十住毘婆사론)이다.
화엄경의 십지품에서 아미타불에 관하여 언급한 것으로 보살이 수행에서 도달한 계단에서 물러나지 않는 불퇴전위(不退轉位)에 이르는 방법에서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기를 권한 것이다.

한국의 정토사상은 황룡사를 중심으로 한 중국 혜원의 정토사상과 현장의 유식계 정토사상으로 나눈다. 앞서 설시한 신라 정토사상에서 무량수경, 아미타경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는데 원광이 중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황룡사에서 자장에게 전하였고 다시 원효와 의상에게 전해진 것으로 보고 있다.
학자들의 보편적인 견해는
인도는 서론적 불교, 중국은 각론적 불교, 한국은 결론적 불교로서 통불교라고 말하고 있다.
원효는 불교가 신라에 정착하고 생명력 있는 종교로 벌전하기 위해서는 왕실과 귀족의 울타리를 벗으나 대중적 불교로서의 시대적 과제를 안고 있었다.

천성산과 화엄사상

화엄경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신라 자장율사에 의해 <화엄만개>가 들어왔고 원효. 의상과 같은 고승들에 의해 해동화엄으로 신라불교의 중심이 되었다.
화엄사상은 우리나라 문화 발전에도 크게 영향을 끼쳤다. 우리나라 큰 사찰 가운데는 화엄경의 교주인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모시고 있는 곳이 많이 있다. 또한 한국의 명산 각처에는 비로봉이 있고 총림 대찰에도 비로암이나 비로굴이 있는 곳이 많이 있다. 역시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상징한 이름이다. 양산지역에도 천성산의 비로봉, 비로굴, 적멸굴이 있고 통도사 옥련암의 청정법신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모시고 있으며 영축산 비로암이 있다.

천성산 화엄벌은 화엄사상의 보고(寶庫)이다. 일천명의 수행자들과 함께 화엄 강론으로 천성산으로 산명이 변천되는 민족 문화의 새벽을 열었던 곳이다.
적멸굴은 원효와 그 일행(일천 수행자)들이 수행 정진한 자연동굴로서 적멸(寂滅)이라는 단어 속에는 열반의 경지인 무여열반(죽음의 경지)와 유여열반(깨달음의 경지)가 있어 천성산 적멸굴의 의미는 심오하다 할 것이다.

-적멸굴과 수운
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재우 대신사는 천성산 내원암과 적멸굴에서 49일간의 기도를 통해 무극대도를 깨닫는 과정의 장소로 알려져 있다.
20대에 조선 천하를 유람하며 세상의 곳곳을 살펴보고 돌아 온 수운은 1855년 3월 울산의 여시바윗골에서 이인으로부터 天書를 받게 되는데 이 천서를 통해 수행방법을 바꾸게 된다. 이것을 천도교백년사는 을묘천서라고 기록하고 있다.
1856년 봄 수운의 나이 33세에 천성산 내원암에서 49일간 기도를 시작했다. 47일 되던 날 80세에 이른 숙부가 별세했다는 환원 소식을 알게 되어 기도를 중단했다는 기록이 있다.
1857년 7월 천성산 자연동굴인 적멸굴에서 49일간의 기도를 했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수운은 종교적인 체험을 깨닫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생활고에 직면한 수운은 언양 중리에서 철점 사업을 벌인다. 2년간의 사업은 실패로 치닫고 정신적으로나 육신적으로 만신창이가 된 수운은 사업을 정리하고 고향인 경주 용담으로 돌아온다.
용담에서 수운은 용맹정진하여 1860년 봄 한울님으로부터 무극대도를 깨닫게 된다. 이후 포덕의 기운이 세상에 비치자 혹세무민의 사슬이 수운의 발목을 붙잡아 1864년 대구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적멸굴이 있는 천성산은 한반도 내륙 육지에서 해돋이를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곳이다. 태고로부터 지금까지 보존되어 왔던 화엄 늪지대에 도룡용 등 생명체가 살고 있다.
우주의 축소된 산 경전 화엄벌은 철쭉과 억새가 장관을 이루고 있는 아름다운 명산(名山)이며 민족문화의 산실 양산의 뿌리 삽량주의 정신문화가 꽃핀 원효성사의 거룩한 화엄성지로 가꾸어 가야 할 영산(靈山)이다.

맺는 글

박제상은 울산 울주의 중심문화에 이미 자리 잡았다. 김서현은 아직도 부부총에서 잠들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가야계 신라인 무장의 무덤일 것이라는 추정으로 확실한 인물의 고증이 되고 있지 않다.
천성문화는 화엄으로 불국토를 만들었고 화엄의 불국토는 우주와 하나 되는 광명으로 화엄벌에서 천성이라고 하는 화엄의 빛이 되었다.

필자는 3년간 양산문화원 향토사연구소 사업으로 답사하고 조사 연구한 성과를 토대로 천성문화를 양산의 중심문화로 하고 삽량축전과 회야축전은 지역 축전으로 하는 것에 의미를 두고 천성문화에 대해 원고를 작성했다.

원효는 나이 40세 이후 원적산에 입산하여 45세에 의상과 함께 당나라 구법여행길에 서해안 해변에서 (지금의 평택 수도사) 해골의 물을 마시고 일체유심조의 깨달음을 얻었다. 당으로 구법 여행을 포기하고 발길을 돌려 기장 척반대 (지금의 불광산)로 가서 수행 정진하였다.

<해동원효척판구중>의 이적 사건으로 당나라에서 해동 원효를 찾아 온 일천 수행자들을 금정산 동래(지금의 범어사 원효암)에서 맞이하고 이들과 함께 원적산에 올라 수행공동체가 되어 원적산 화엄벌에서 화엄의 빛으로 그들의 지혜를 밝혀주니 천성이라는 거룩한 부처님의 가피를 입게 하였다.
20여 년의 세월을 대둔사에 거처하며 89암자의 수행자들과 원적산 화엄벌에서 화엄경 강론을 하고 전국을 여행하며 사찰을 건립하였다.
원효의 나이 65세에 하산하여 경주 고선사로 떠나 고선사에서 집필과 강론을 하며 여생을 보내다가 혈사로 가서 70세 되던 3월 30일(음) 입적하였다.
이렇게 하여 삽량주 원적산에서 20여 년간 대둔사에서 일천 대중의 화엄성불을 위해 헌신적인 노고를 아끼지 않았던 화엄 광명의 비로자나부처님이 천성의 문화로 거듭나 천성산으로 변천하였다고 필자는 기록해 둔다..
웅상뉴스 기자 / jun28258@gmail.com입력 : 2022년 11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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