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삶의 있어서 죽음이란?
강명구 양산시농수산물유통센터 양산시 협력관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9년 1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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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웅상뉴스(웅상신문) | 하루를 시작하면서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요즘 문득 한해가 다 되어가니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말이 자주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아침에 일어나서 샤워를 하면서 “나는 이미 죽었고 내가 속한 사회도 이미 죽었다”고 중얼거리는 거다. 나는 이렇게 멀쩡히 살아서 이렇게 샤워를 하고, 정부는 단 1분도 어김없이 자기역할에 충실하고, 정치권은 늘 변함없이 그다지 질도 높지 않은 쇼를 매일 공연하고 있는데? 죽음?
내가 오늘 죽음을 얘기하는 것은 그래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죽음을 한번쯤 생각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어서 이다. 일단 실제로 자신과 자신이 속한 사회가 이미 죽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삶의 있어서 우리가 받는 부고는 늘 죽음보다 늦게 온다. 밤하늘의 별이 반짝여도, 그 별은 이미 약 200년 전에 사라진 별의 빛이다. 즉 별은 폭발하기 전에 발산한 빛이 지구까지 도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천문학자들은 한 200년이고 우리는 그 사라진 별을 지금 보고 있다고 한다. 나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이미 죽었는데 현재 부고가 도달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일 뿐이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이 죽고 있다. 2019년만 해도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중 최근 몇 년간 압도적으로 계속 1위를 하고 있고(2018년 2위), 통계상 하루평균 37.5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중에는 투신을 했다가 채 목숨이 끊어지지 않아 부서진 몸을 끌고 옥상으로 올라가 몸을 다시 던진 사례도 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옥상으로 올라가던 그 사람이 그토록 살고 싶지 않았던 그 하루를 사는 것이다.
그리고 2019년 9월 현재 우리나라의 출생아 수는 46개월째 감소세를 지속하고 있다. 또 낙태가 금지된 상태에서도 우리나라의 낙태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 1위이고 출생률은 전 세계적으로 따라 올 수 없는 최하위권이다, 이와 같은 인구 감소로 인해 우리나라는 2018년 국회 입법조사처 분석결과 출산율이 1.19명 선으로 지속된다면 2750년에 한국인은 멸종한다는 보고도 있다(2018년말현재 대한민국 출산율 0.98명인데 한국인의 멸종시기는 점점 당겨지고 있다). 이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누군가 그토록 태어나고 싶지 않았던 그 하루를 사는 것이다. 이미 태어나서 사는 우리들도 어떻게 보면 우리 사회의 소멸에 공헌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일정 규모의 경제를 유지하는 국가들 가운데 해외 이민을 떠난 뒤 모국의 국적을 포기하는 비율은 몇 년 동안 한국인이 압도적으로 높다.
그리고 사람은 두 번씩 죽는다. 자신의 인생을 정의하던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어 삶의 의미가 사라졌을 때 사회적 죽음이 온다. 그리고 자신의 장기가 더 이상 삶에 협조하기를 거부할 때 육체적 죽음이 온다.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일자리는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수명은 전례 없이 연장되고 있다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사회적 죽음과 육체적 죽음 사이의 길고 긴 연옥 상태다. 고도성장을 통한 중산층의 증가와 민주화 운동을 통하여 민주주의 실현이라는 과거 수십 년간 우리 사회에 에너지를 공급했던 두 약속에 대해 우리들은 이제 낯설어진다. 민주화와 경제발전을 우리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갈망하고 열망했는가. 이제 이렇게 우리 주위에서 낯설게 느껴지는 구호인데... 이는 조직에서 승진은 하였으나 진정한 업무를 하지 못하고 소외되고 초라한 승진자의 모습을 바라보는 기분이다.
그러면 한해를 마무리하는 12월 우리사회의 현상을 죽음에 비유하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하면 좋지 않을까 한다. 첫째, 우리가 죽어 있다면 제때 문상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말 간단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쉽게 안정적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둘째, 우리사회에 죽음이 오는 중이라면, 우리는 죽음에 대면하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있다. 죽음을 맞이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우리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셋째, 우리사회에 죽음이 아직 오지 않았다면, 남은 우리의 생애를 어떻게 살면 좋을지를 곰곰이 차분히 성심성의껏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정치인들이 유권자를 농락하는 것을 막아 우리가 책임 있는 정치 주체로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고, 죽음을 맞이하는 침착성 때문에 우리는 미래를 희망적이고 건설적으로 만들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9년 1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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