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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상사람들의 삶을 말하다(50)-하

정신대 적령기에 처했던 어느 엄마의 생활모습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8년 11월 12일
<지난호에 이어>
세월이 지나면 일이 줄어들것이라는 기대를 했는데 시집온 지가 6년 세월이 지나도 해야 할 일은 더 밀려오기만 했다. 농사일을 마치고 저녁을 지어 가족들에게 올리고 설거지를 하고 나면 저녁에 해야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빨래도 해야하고 빨래 다듬질도 해야하고 겨울솜옷은 빨래할 때마다 새로 바느질을 해야하고 헤어진 양말과 옷가지들을 기워야 하고 길쌈은 시집온 후로 한해도 빠지는 일 없이 해야했다.
가족들이 입고 덮는 삼베와 모시는 직접 길쌈을 했고 해마다 몇 필식은 시장에 내다 팔았으니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이런 가운데 3년 터울로 임신을 했다. 임신을 하고 애기를 낳기 1시간 전 산통이 올때까지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심한 노동을 하다 혼자 방에 들어가 애기를 낳았다. 애기를 낳고 5일 정도 지나고 건강한 사람들과 같이 일상일을 그대로 했다.
농사일 품앗이를 할 때면 젖먹이 어린 동생을 업고 누나들이 품앗이 하는 일터에 젖 먹이러 왔다. 일에 지쳐 애기를 잘 돌볼 겨를이 없어 태어난지 열 달 정도 되어 이 애기마저 하늘나라로 보내고 말았다. 아무리 어린 것을 보내었지만 25세 이전 엄마가 자식을 둘이나 잃어버리고 산다는 것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아무리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도 상상이 사실의 근처에도 미칠 수 없는 일이다. 힘도 당차고 일도 잘하던 남편이 40중반을 넘어서고는 조금만 심하게 일을 해도 피곤해 하고 심하게 기침을 자주했다. 석천에 있을 때는 웅촌에서는 일을 최고로 잘한다는 소문이 났고, 웅촌면민 체육대회를 하면 무거운 짐지고 오래가기에 항시 일등을 했고 시동생은 씨름대회 일등을 했고, 종질 조카는 모래가마니 오래 들고 있기에 일등을 했다.
남편 제종방 중에는 지역에서 장사로 통하는 분이 몇 분 있을 정도의 가문이었으니 선천적으로 체질이 강건하였음에도 몸을 아끼지 않고 밤낮으로 머슴 두세 사람이 감당할 일을 혼자서 감당했으니 골병이 들어 천식기침을 많이 하고 일은 많이 밀리고 몸은 예전처럼 말을 듣지 않아서 그런지 화를 잘 내고 고함도 크게 자주 지르고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는 화가 나면 밥상도 자주 엎어버리고 손에 잡히는 대로 던지는 고약한 거친 행동이 날로 심해갔다. 이런 이상한 행동이 늘어감에 기침을 더 심하게 하고 가래가 올라 잠을 이룰 수가 없을 정도였고 50이 넘어서는 농사일을 제대로 할수 없고 논, 물관리를 위해 논에 왕래하는 것마저 겨우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런 와중에도 자식은 태어나 8남매가 되었다. 두 딸은 시집을 보내고 중간자식들은 학교에 다니고 더 어린 자식들은 애기라 경출은 남의집 품팔이 할 사정도 못되고 남편의 약값도 감당해야하고 자녀들의 학비 감당하기가 벅차 가계사정은 더 빈곤하기만 했다. 식량마저 부족해 장이쌀로 연명하는 처지가 되었다. 장이쌀을 제대로 갚을 사정이 못되어 못갚아 장이쌀을 빌릴 때도 없어 끼니가 떨어저 굶을 때도 예사로 있었다.
산다고 바빠 친정에도 자주 가지 못하고 일년에 한두번 정도 다녀왔다. 명곡에서 친정까지 거리는 80리 길이 되었다. 지금은 용당고개로 차량이 통행하는 도로가 되어있지만 1970년경까지 울산으로 둘러 다시 갈아 타고 갈 수도 있지만 차비도 아깝고 차비장만 하기도 어려워 산길, 들길따라 염천의 더운 날에 등어리에는 어린 딸을 업고 초등학교 1학년짜리 아들은 걸리고 친정갈 때는 가지고 갈거리가 없어 애만 업고 가지만 친정에서 돌아올 때는 친정도 여유롭지 못해 줄거리가 별로 없어 돈될 만한 것은 줄 것이 없고 고구마, 감자, 보리쌀쌈, 미역귀리니, 다시마 지금시절에는 자동차로 싣고 가라고 해도 별로 달갑지 않을 먹을거리를 무겁도록 보퉁이에 싸 올케와 친정엄마는 신촌에서 남창 장까지 20리 길이나 이고와 그곳에서부터 경출이는 간신히 머리에 이고 용당고개를 넘어 명곡까지 와야했다. 초등학교 1학년 아들에게도 제자리에서도 간신히 지고 일어날 수 있는 짐을 짐바에 지워 같이 와야했다.
가벼운 홀몸으로 오가기도 버거운 길을 딸을 업고 머리에는 고개가 뿌러질것 같은 무거운 보퉁이를 이고 험준한 고개길을 넘어 올 때 무슨 생각으로 아픔을 참고 왔을까 돈으로 가치를 따지면 몇 푼 되지 않지만 가난한 딸 가족들 굶어죽을까 애간장 태우며 간이라도 떼어주고 싶고 살이라도 베어주고 싶은데 줄거리는 없고 친정엄마의 피눈물 응어리 보따리이다. 아무리 고개가 아프고 힘들어도 엄마의 피눈물 보퉁이를 버릴 수 있나 하는 맘으로 이고 왔을 것이다. 어린 아들은 성인이 되어 그 순간의 기억을 하면 어린맘에 쓰러질것 같은 고달픔이었지만 내 어깨가 아무리 아파도 우리동생 업고 무거운 짐을 이고 가는 우리 엄마 고개만큼이나 아플까. 엄마도 참는데 나도 참아야지 하며 이를 악물고 비자땀을 흘리며 참고 견디며 왔다고 한다. 살아가다 힘든 순간이 닥칠 때마다 순간이 아무리 힘겹다 해도 그때 용당고개 넘어 올 때 무거운 보퉁이 무게에 짓눌린 엄마 고개 아픔 만큼이나 할까. 그때 짊어지고 온 짐바도 지고 왔는데 이것쯤 못 참을까 하는 맘으로 힘든 순간을 버티어 왔다고 한다.
남편의 병색은 날로 더해가고 병원 입원치료를 받아야 할 사정임에도 의료 보험이 되지 않던 시절이라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어 갖은 민간요법의 각종 약을 구해 치료약으로 사용하고 약국에서 약만 사다 먹여도 약값도 버거웠다. 남편이 극도로 건강이 나쁜 상태인 50이 지나고도 3자녀를 더 보았다. 막내아들을 낳을 때 남편은 58세때였고, 경출은 43세때였다. 임신을 하고도 굶기를 예사로 하고 끼니는 접해도 거친 음식에 극도의 영양실조에 일은 머슴처럼 고되게 하였으니 산모가 성할 리가 없었다. 이런 몸으로 해산일 가까이 설명절 준비하느라 분주하고 고되기가 평소보다 훨씬 더했다. 강정도 만들어야 하고 콩나물도 키워야 하고 술도 담궈야 하고 식혜도 담궈야 하고 남편의 두루마기 도포도 새로 지어야 하고 아이들 설빔도 준비해야하고 제기용 놋그릇도 닦아야 하고 이불도 빨아야하고 제사장도 보아야 하고 집안대청소도 다 했다. 설날이틀 앞날이 되는 음력 12월 29일 경출은 산통이 오기 시작하자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들어가 막내아들을 낳다 애기가 반쯤 나온 순간에 기운을 잃고 기절을 해버리고 말았다. 낳던 애기와 같이 세상을 떠나고 말 위험한 순간에 다행스럽게 초등학교 5학년 짜리 딸이 동생을 낳다 혼절한 엄마의 모습을 보고 이웃에 약방을 하며 산파술을 하던 김금순 여사에게 연락하여 애를 잡아 당겨내어 애는 탈이 없었지만 경출은 혼절상태에서 몇시간을 헤매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몸이 움직여 지지않는 상태에서 비몽사몽간에 애기 안부를 물었다. 가족들은 경출이 깨어나지 못할 것 같은 불안에 병원에 가자고 했지만 끝까지 고집을 부리며 내 건강 내가 안다며 좀 지나면 일어날 수 있다고 병원에 가지 않았다. 아무런 처방도 하지 않고 누운 상태로 며칠 안정을 취한 것이 전부였다.
애기를 낳은 다음날은 설 하루 앞날이라 차례상 차릴 음식을 만들어야 하는 날이다. 몸은 이렇고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당시 주변가족들의 사정은 두 딸은 시집을 가고 큰댁도 있고 손아래 동서도 있었지만 큰댁에는 시 조부님과 시아버지 차례상 준비를 해야하고 손아래 동서도 상처자리에 시집을 와 시동생 전처의 차례상을 차려야 했고, 경출의 집은 남편의 전처 차례상을 차려야 했다. 남편은 병이 무거워 병원에 입원중이었고 아들은 아버지 병시중으로 병원에 보호자로 가 있었다. 18세 어린 나이에 시집온 이후로 제삿날이나 명절을 치루면서 성심성의를 다하지 않은 때가 단 한 번도 없었다. 28세 젊은 나이에 가신분이 불쌍하기도 하고 제사때마다 혼령이 있다면 당신이 두고간 두 딸과 남편에게 더 잘할 수 있도록 경출의 맘이 흔들리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며 제사를 모셨다. 성심을 다해 차례상음식을 만들기 위해 일어날려고 아무리 해도 일어나 지지않아 또 일어날려고 하다 넘어지고 또 일어나다 넘어지면서 일어나려고 악을 쓰고 있는데 초등학교 5학년 딸이 엄마 내가 차례상 음식 만들게 하며 음식을 만들다 모르면 엄마한테 물어가며 하며 된다 하며 딸혼자서 차례상 음식을 다 만들어 차례를 잘 모셨다. 환경이 사람모습을 만드는지 그 딸은 어릴 때부터 크면서 아이 어른짓을 하며 자랐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목적도 희망도 없이 살아왔다. 오로지 목적이 있다면 오늘은 가족들 굶기지는 말아야 할텐데 하는것이 꿈이며 목적이었다. 죽는게 사는것보다 훨씬 편하다는 생각을 자주 했지만 죽을 수 없었던게 내가 죽고나면 남편 병 시중은 누가 하며 어린자식들은 굶어죽을 것인데 하는 걱정이 생명을 부지하게 했던 것이다. 어릴때 형을 보내고 장남이 된 아들은 아버지가 건강이 좋지 않아 중학교 입할할 때부터 쟁기질을 하며 농사를 지었다. 태어날 때부터 약질로 태어나 태어난 즉시 병마에 시달리며 사경을 헤메다 겨우 생명을 지탱했고 지나면서 배를 굶을 때가 많아 정상적으로 성장하지 못해 키도 너무 작고 마른체구로 안쓰러울 정도였는데 힘에 겨운 일을 하면서 불평한번 하는 일을 본 적이 없다.
중학교 다니는 동안 점심 도시락을 사주어도 가지고 가지 않았다. 도시락 가지고 가지 않는다고 나무라면 도시락 가지고 다니기도 귀찮고 점심 안먹어도 배고프지 않다하며 기어이 도시락을 3년 동안 들고다니지 않았다. 귀찮다 배고프지 않다는 말은 거짓말이었고 점심이라도 굶어 동생들이라도 배고프게 하지 않게 해야겠다는 눈물겨운 맘에서 도시락 지참을 거부했던 것이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 농사일을 하거나 소풀이라도 한짐 베어다 놓고 학교에 가야 하는 처지이다 보니 학교가는 시간이 항시 급해 새벽에 일터에 나아갈 때 책보따리와 교복을 마루에 챙겨두고 일하러 갔다.
아침밥은 앉아 먹지도 못하고 일어선 채로 허겁지겁 밥을 먹고 학교에 가는 습관을 계속하다보니 밥을 얼마나 급하게 먹는지 밥을 입에 넣고 반찬을 넣기 전에 밥을 넘겨버려 반찬은 따로 넘겼다. 어떤 거칠은 음식을 주어도 탓하지 않고 너무나도 달게 잘먹었다. 얼마나 일찍 철이 들었는지 초등학교 1학년때부터 밥이 부족하다 싶은 생각이 들면 동생들 밥이 적을까 배가 고파도 숱가락을 놓아버렸다. 꿈이 무엇이냐고 하면 첫마디에 학자되는게 꿈이라고 주저없이 이야기 하던 아들이었는데 중학교 3학년때 월사금을 주지 못해 반년치나 밀리게 되자 고등학교 진학을 하라 말아라 하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데 중학교 월사금도 내지 못하고 양식도 모자라 쩔쩔메고 아버지 약값도 감당하지 못하고 농사지을이도 없는 집에서 고등학교 진학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며 내가 할 일은 동생들 배고프게 하지 않고 아버지 병원치료받게 하는게 꿈이라며 농사에 전념하며 아무리 고되고 험한 일도 품팔이 할때가 있기만 하면 설레이는 자세로 갔다. 그때 가계사정은 있는 재산을 다 처분해도 빚을 절반도 갚지 못할 상태였음에도 누굴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고 십대 중반의 어린아이가 이때부터 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빚도 추슬려 갔다. 밤늦게 돌아와 저녁을 먹고는 책과 싸우는 일이 전부였다. 너무 안타까워 낮에 일을 좀 작게 하던가 밤에 책보는 시간을 줄이든가 하라며 아무리 말려도 농사일과 책보는 일에 열정을 다했다.
제때 정상적 교육과정을 받지 못한 한 때문인지 나이들어서도 계속 학문추구에 전념했다. 경출은 막내아들을 낳고 1년쯤 지난 40중반의 나이에 정신질환이 왔다. 천성이 너무 여리고 지나치도록 착한이가 갖은 풍상으로 받은 상처가 병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정신이 혼미해 가족끼니도 챙겨줄 사정이 못되고 가족들도 감당이 안되어 병원입원도 하다 병원에서 약을 지어 집에서 치료를 하다 갖은 방법을 다해도 병은 치료되기 보다 짙어가기만 했다. 본인 맘이 아닐때는 정신없는 짓을 하다 정상상태 일때는 죽는 것이 가족을 위한다는 맘에서 갖은 방법으로 생명을 버리려고 여러차례 자해를 가했으나 생명이 얼마나 질긴지 저승문턱까지가다 병원에 가 다시 살아오고 했다. 이런 경황없는 상태에서 다행스럽게도 아들이 배필을 만나 결혼을 했다. 우리가정 사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아무도 딸줄사람이 없는 처지인 집에 며느리는 우리 가정사정을 너무 소상하게 알면서도 시집오기를 자원한 것이다.
이는 필시 하늘에서 며느리 맘을 움직이지 않았다면 그런 맘이 생기지 않았을 것인데 하늘의 뜻으로 보내진 며느리인지라 바로 며느리는 천사였던 것이다. 그때 가족 구성은 짙은 병들은 남편은 64세였고 경출 본인 역시 중환자로서 49세였고 두 딸은 시집을 가고 큰아들은 26세, 며느리 22세, 딸은 20세와 16세 그 밑으로 아들14세, 10세, 6세였다. 가족은 9명이며 며느리는 결혼하자 말자 임신이 되었다. 배속 생명까지 합하면 가족10명이었다. 경출은 며느리 본 날로부터 4개월 지난때 추석앞날 하늘이 보낸 천사 우리 며늘아 미안하고 고맙다. 너만 믿고 나는 떠난다 라는 간단한 유언장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끓고 세상을 떠났다. 경출이 남편도 경출이 떠난 일년 지난때 하늘나라로 갔다.<끝>
↑↑ 박극수
시인
(현)양산문화원 부원장
양산시 향토문화연구회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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