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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위기가 닥쳤을 때 선조들은 어떻게 했는가? 똘똘 뭉쳤다

‘내 고장은 내가 지킨다’는 자발적 향토조직
지방 수령의 무능과 무장에 대한 비판이 의병봉기 활발하게 일으켜

김경희 기자 / 입력 : 2020년 08월 26일
ⓒ 웅상뉴스(웅상신문)
나라에 위기가 닥쳤을 때 선조들은 어떻게 했는가. 한마디로 똘돌 뭉쳤다. 전란이 일어나면 전국 곳곳에서 의병들이 일어나 나라를 위해 싸웠다.

임진왜란 때도 마찬가지다. 전란 초기 관군이 제대로 역할을 못하자 의병들이 들고 일어났고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어가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의병의 주도 세력은 지방 유생과 농민이었다.

후기로 갈수록 의병 지도층에 농민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아갔지만, 지방 유생이 의병전쟁에서 완전히 물러섰다고 볼 수만은 없다. 의병장과 그들을 따르는 농민들은 합심하여 전투력을 키웠고 자신의 지역을 거점으로 지리에 어두운 왜적들을 교란시키면서 전투를 벌였고 관군과의 연합전도 전개했다.
‘내 고장은 내가 지킨다’는 자발적 향토방위 조직과 지방의 수령과 무장들의 무능에 대한 비판이 전국적으로 의병의 봉기가 일어나게 된 계기가 됐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변방지역의 웅상은 어땠을까.

신라가 가야국을 병합해 삼국통일의 길을 여는데 우시산국도 큰 역할을 했고 왕건이 고려를 개국할 시 지역 호족장 박윤웅은 왕건을 도우는데 앞장서 새로운 국가건설에 선도 역할을 감당해 고려 개국 공신이 되었다. 우불신사는 신라 때부터 조선 말까지 국가에서 국태민안을 기도 하는 기도처였고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때도 간절한 기도를 했던 곳이다.

민족상쟁 6.25동란 때에는 전국토 일부분만 제외하고 인민군의 점령지가 되었을 때도 지역은 인민군의 점령지가 되지않아 피난민의 수용소와 국군병원의 피난처가 되어 북진의 힘을 충전하는 장이 되었다.

나라에 위기가 닥쳤을 때마다 힘이 된 웅상지역. 임진왜란 때도 지역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했다. 동래성이 함락되고 울산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웅상에도 의병이 봉기했고 지역에 거주했던 의병장이 이끈 의병은 약 400여명이 되었다고 한다. 만약에 그랬다면 그 당시 지역 인구로 보아 노약자 아녀자를 제외하고 젊은 남자 모두가 의병으로 출병했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 당시 의병들의 무기들은 활과 죽창 농기구들이다. 신예무기로 무장한 정예군인들인 왜적들과 숫자에서 밀리고 무장으로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세였다. 그런 상황에서 우불산성을 중심으로 벌인 전투에서 얼마나 많은 적을 죽였는지 서창 북부마을에 왜적들의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는 왜시등이란 지명이 있을 정도다. 농사만 짓던 의병들이 왜구에게 큰 타격을 줄 수 있었던 것은 내 가족과 내 고장은 내가 지킨다는 각오로 의병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기 때문이다.

미래의 후손들을 위해 나라를 위해, 지역을 위해 웅상의 의병장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최 선봉장이 되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봉기’
황민중(1544~) 선무원종 2등공신

아버지 린과 백씨 집중이 진사 급제한 학자의 집안에서 1544년 출생하여 24세의 나이에 진사 급제하여 학문에만 일생 매진할까 하였다. 그러나 당시 조정 중신들은 당쟁에만 혈안이 되고 지방 수령들마저 이에 동조하니 도탄에 빠진 백성들과 국방정책에는 관심도 없었다.

한심한 나라 사정에 한숨으로 나라 걱정을 하던 차 49세 되는 해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잔학무도한 왜구들은 천인공노할 범행을 자행했다.

평소 학문을 논하며 친하게 지냈던 울산일대의 지인들에게 봉기하자는 격문을 보내고 부유했던 가산으로 병장기를 마련하여 의병을 모집하니 금세 100여명의 의병이 모였다. 스스로 최 선봉장이 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표명하고 분의장으로 칭하고 대오를 정비하니 의기가 충만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10여일이 지난 5월초 울산 의군의 결진터인 기박산성에 편대하여 5월5일 경주 의군 500여명과 가세하니 의병대장 박봉수 휘하의 의병은 1500여명으로 5월 7일 밤 삼경을 기해 빼앗겼던 경상좌병영성을 기습하여 일격에 수복하고 수백의 적을 격살하니 병장기 노획 등의 전과를 세웠다.

병사들을 이끌고 운문산으로 들어가 좌병사 박진의 지원을 받아 동년 9월 순찰사 한효문과 더불어 의병을 통합해 남면군에 예속되어 기장방어에 공을 세우고 태화강 전투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선무원종 2등 공신에 녹훈되었다.
난중 나라에 인재가 부족하여 과거 별시령 문과에 응시해 급제하였다. 당시 고을에서는 무과에는 여러 명이 급제하였으나 문과급제는 유일하였다. 난 후 벼슬은 통정대부 돈령부 도정에 봉직되었다. 평산 10길 18에 후손들이 건립한 경오재에 배향되었다.


ⓒ 웅상뉴스(웅상신문)
‘나라를 구하는 길은 전백성이 의병이 되는 것’
박지영(朴之榮 조선 중기) 조선 의병



1500년경 웅촌대복에서 명동으로 입향한 울산박씨(흥려박씨) 박지영은 무안 군수를 역임했고 장무공의 후손으로 충청감사 추(諏)의 5대손이며 참의병조 참판 조(祚)의 증손으로 어모장군 자공(自恭)의 아들이다.

임진왜란으로 국가가 위기에 처하자 인척들을 구국 전선에 나아가도록 훈화하여 의병으로 출병하여 나라를 지키게 했다.

관군과 지방수령들 마저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이 나라의 처지에 인척들에게 나라를 구하는 길은 전 백성이 의병이 되는 길 뿐이며, 생명을 의롭게 하는 일도 국가를 위해 받치는 일이라 하며 노약자를 제외한 인척들을 모두 의병에 출병해 병사가 되게 했다. 비록 공신으로 추대되지 못했지만 많은 인척들도 병사가 되어 목숨을 초개같이 버릴 각오로 나라를 지켰다.

이때 선무원종 임란공신으로 이름을 올린 인척들은 박지영의 아들 박홍남, 조카 박홍춘, 중손자 박계숙, 종질 박응정, 제종 박인복, 제종질 박경열, 박경은, 제종손 박응춘* 박영록, 삼종손 박영준, 사위 김응방(본관김해), 생질 이겸수(본관학성)등이다.


‘국가위망지일을 당했으니 의로써 공명을 세우라’
이겸수(1555~1598,조선 중기) 조선 의병장



공의 자는 자허며 호는 잠와 승사호가 죽재요 자헌대부지중추원사 세자좌빈객 충숙공 휘예의 7세손으로 가정 34년 을묘 3월 22일 전시에 부서 웅상면 주남에서 태어났다. 공은 어려서부터 자질이 총명해 아는 것이 범인과 다르더니 급장에 문필과 차경에 탁월했다.

38세에 임진왜란을 만나, 국가위망지일을 당했으니 의로써 공명을 세우라는 울산 박씨 모친의 말씀을 받고 서면 방 왜군에 나아가 많은 전과를 획득했으며 사명대사와 함께 가등청정, 소서행장 등 일본 장수들과의 외교 교섭에 큰 공을 세웠다.

선조 갑오(1594) 정월 25일에 조정의 예로 권무병과에 급제하고 북부주부겸 지휘사에 제수됐으며, 만력 24년 병신 7월 25일 공의 나이 42세 때, 통훈대부 기장현감에 제수돼 수령으로 선치했으며, 선조 무술 4월 15일에 정주판관으로 제수받아 부임하면서 시 한수를 남기고 중도에 병을 얻어 향연 44세의 나이로 월성부에서 사세했다.
사략 선조실록과 분충서난록, 용사잡록에 전해져 오고 있으며, 배 순흥안씨 무오생과 양위를 부서아리 유좌지원에 합폄했다.

정조 7년(1783) 계묘에 웅상면 주남에 남강사를 창건해 공을 배향하고, 사림봉향을 했으며, 고종 무진(1868)에 종원들의 발의와 향도사림의 공의로 남강서원으로 승호돼 묘호왈 충열사 사호왈 남곡사라 하고, 후학양성 및 사림유생들의 강학 논경이 빈번했던 곳이며 동치 고종신미(1871)에 폐철 돼 사림봉향이 중지됐다.

희공의 영일 함이여 효로써 재가 하고 충으로 보국하니 8년 병란에 뛰어난 전적이 많았지만 천운이 다해 평정을 이루지 못했으며 나라에 큰 공을 세우고 돌아가셨지만 추인할 사람 없어 이 땅에 자취가 끊어지니 매우 슬픈 일이었으나
충의세가에는 반드시 넉넉한 경사가 있으니 후손들이 번창하고 발의하고 병술년(2006)에 추진위원회를 결성해 성균관으로부터 승인과 문헌적 지원을 받아 무자년(2008)에 옛 터전 가까운 길지에 기공해 기축년(2009)에 완공해 죽재공을 배향하고, 사림봉향을 재개해 공의 덕을 기리고 후학들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나라가 어려우면 구국전선에 나서는 게 백성된 도리’
박홍남(1559~1638) 창의의사


흥려백 장무공 박윤웅의 후손이며 사은공 6대손으로 무안군수를 역임한 박지영의 아들이며 선무원종 1등 공신 박홍춘의 종제이다. 평소 나라가 어려우면 아무리 가정사가 화급해도 이를 뒤로 미루고 구국전선에 나서는 게 백성된 도리라는 아버지 훈화를 가슴 깊이 새기고 살아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종형제 종질 고종형 매부 등과 의논하여 의병들을 모집하여 나라를 지키기로 맹세하고 종형 홍춘의 부대 의진에서 우익장이 되어 동래성을 진격하니 성은 함락되고 적병들은 울산과 언양으로 진격한다는 소문을 듣고 적의 진로를 차단하고자

언양으로 달려가니 적의 병력이 대군이라 접전할 수 없어 의병의 대오를 2대로 나누어 1대는 적을 유인하기로 하고 1대는 전천(지금 활천리)어구에 잠복하고 종형 홍춘은 말을 달려 적진에 나아가 칼을 뽑아 높이들고 적에게 경고하기를, 이 우둔한 섬 오랑캐들아 지금 곧 명줄들을 거두어 너의 나라로 돌아가라하니 그렇지 않으면

수십만의 우리 의병들이 너의 목을 하나도 남김없이 베리라하니 적장은 군사들에게 추격하라는 명을 하여 추격하는지라 칼을 휘둘러 적의 목을 4-5급 치고는 거짓으로 후퇴하니 적병은 개미떼처럼 추격하는지라 이미 잠복해 놓은 전천어구까지 유인하였다.

이때 우리 의병은 때가 왔다 하고 북을 치고 진격하여 수백급을 참살하니 적은 혼비백산하여 도주하였다. 전투에 승전한 의병은 군세가 충전하여 한사람도 낙오된 자가 없었다. 적의 군기를 노획하여 의병들에게 지급하여 유리하게 이용하였다.
순찰사 박진의 명에 의하여 그해 9월 서면장이 된 홍춘과 함께 기장과 동래의 적을 막음에 수많은 전공을 세웠고 기장과 동래의 적을 완전 격퇴시켰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훈록도 모두 사양하니 고향에 돌아와 관직은 훈련원 봉사에 제수되었다. 향리의 청장년들을 모아 문무를 훈회하며 후학양성에 일생을 받쳤다. 후손들도 명동과 백동에서 후학양성에 일생을 보낸 이가 많다. 명동에 후손들이 건립한 귀후재에 배향되었다.

죽기로 맹세하고 전투 임해, 기습적인 공격으로 왜구들 사살‘
박경은(1566~1641) 창의의사 군수

흥려백 장무공의 후손이며 충청감사 박추의 6대손이다. 어모장군 옥포수군만호증 통정대부 형조참의 원우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에 올랐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응충의 조카 전영과 의병을 모아 동래의 적을 막고자 달려가니 동래성은 함락 직전으로 의병을 배치하여 적을 공격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되자 첨사 정발 장군이 전사하였다. 거느린 의병과 매부 전영은 적에게 포위되어 죽기를 맹세하고 싸웠으나 전영과 의병은 모두 전사하였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하고 시체를 수습하니 전영은 끝내 활을 움켜쥐고 전사하였고 화살은 한 개도 없었다. 처참한 광경을 보고 신예 무기와 벌떼 같은 적군과 정면 전투는 불가함을 깨닫고 다시금 의병을 모아 기습전을 하기로 하였다.

의병들은 언양으로 들어오는 적을 막기 위하여 성을 쌓고 허수아비를 만들어 군사들이 많은 것처럼 위장하고 의병들의 사기를 충전시켰다. 언양으로 몰려오는 왜구들을 맞아 왜구들을 사살하고 무기 등을 노획했다.

1594년 전라도 보성군수로 발령받아 재임 중 정유재란을 맞았다. 군민과 협력하여 적의 재침을 막았고 많은 전공과 선정을 베풀었다. 아들 이명은 팔도병사를 역임했다.
향년 75세의 고령으로 하세하고 울주군 온양읍 운화리에 안장했다.

‘기박산성 군비 정비, 병영성 기습 큰 전과 세워’
서몽호 (조선중기) 조선의 명장


서몽호는 매곡 출신으로 임란 때 삼종형 인충과 창의해 많은 공을 세워 훈련주부로 특채됐다. 자는 병보이며 면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의지가 굳고 용맹하며 궁사무예가 뛰어나 천부적인 재질을 타고난 무사였다.

임진왜란 때 선무원종 1등공신 서인충과 동래성을 구원하러 좌병사 이각. 울산 군수 이언함과 함께 출정했다. 그 후 기박산성에서 군비를 재정비해 병영성을 기습해 큰 전과를 세우고 문천회맹에 참가한 후 문수산 청송사에서 군비를 정비해 경주의 의견대와 봉길전투에 참가하고

멀리 장기의 소봉대까지 진격해 공을 세웠다. 현재 매곡동에 위치한 증산사에서 향사하고 있으며 묘도 이곳에 있다. 또한 증산사가 위치한 매곡마을은 달성 서씨의 집성촌이기도 하다.  

이처럼 의병의 봉기는 주도층인 유생과 농민이 일제 침략자와 그에 협력한 소수의 집권자들에 대해 저항함으로써 항일민족세력을 형성하는 데 가장 큰 구실을 했다. 당대에서 일제 침략 최대의 희생자인 농민과 농촌 지식인의 정치적 불만을 집약한 의병 봉기는 일제 36년 동안에 전개된 항일민족운동의 역사적 뿌리로서 그 의미가 자못 컸다.

또한 3·1 운동, 그리고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줄기차게 전개된 농민운동이 모두 한말 의병전쟁을 비롯한 항일운동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그 맥락을 파악함으로써 지난 70년 동안에 걸쳐 산발적으로 전개된 농민운동에서 일관된 농민적 요구를 읽을 수 있다.
(참고자료: 웅상사람들의 삶을 말하다 (박극수 지음)

김경희 기자 / 입력 : 2020년 08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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