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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현주 전 부산일보 논설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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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도 명예도 없이 40대 중반을 통과하고 있던 연암 박지원에게 중국의 넓은 세상을 구경할 기회가 찾아왔다. 그의 삼종(8촌)형 박명원이 청나라 건륭 황제의 만수절(70세 생일) 축하 사절단 정사(사행단장)로 가게 됐기 때문. 관직이 없었던 박지원은 공식 사행단이 아닌, 박명원의 자제군관(개인 수행원) 자격으로 동행하게 된다. 이렇게 우연히 시작된 그의 중국행이 조선 500년 최고의 걸작을 낳을 줄이야! 연암 박지원(1737~1805)의 『열하일기』는 그가 1780년 5월~10월까지 사행단과 함께 청나라를 다녀온 뒤 쓴 여행기이다. 그러나 이국적 풍물이나 기이한 체험 등을 단순 나열한 평범한 여행기가 아니다.
요동벌판의 찜통더위와 폭우에 맞서 생사가 교차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엮은 드라마이자, 험난한 여정 속에서 시시각각 벌어지는 사건을 따뜻한 유머로 감싸 안아 상황을 반전시키는 하이 코미디이다. 이질적 문물의 본질을 놀랄 만한 집요함으로 관찰·기록한 다큐멘터리이자, 새로운 대상들과의 접촉을 통해 사유를 확장시켜 나가는 사상서이기도 하다. 『열하일기』는 의주서 압록강을 건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압록강~연경까지 2300리. 강을 건너 요동으로, 요동벌판을 지나 성경(지금의 심양)으로, 다시 산해관에 이르는 여정은 스릴과 서스펜스의 연속. 찌는 듯한 무더위와 예고 없이 퍼붓는 소나기. 강은 범람하고 갈 길은 바빴다. 많게는 하루 예닐곱 번 강을 건너야 했으며, 아찔한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말도 지쳐 쓰러지고 일행은 더위를 먹어 토사곽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연경. 그러나 황제는 연경에 없었다. 북동쪽 변방인 열하의 ‘피서산장’에 가 있었던 것. 사절단은 숨도 돌릴 틈 없이 열하로 떠나야 했다. 열하까지 700리. 황제가 군기대신을 급파해 빨리 올 것을 독촉하는 바람에 무박 나흘을 달려가야 했다. 여기까지가 『열하일기』의 시공간적 배경이다. 악전고투의 여행길이었지만 연암은 ‘물 만난 고기’였다. 지치지 않는 체력과 호기심으로 가는 곳마다 청인들을 만나 필담을 주고받으며 우정을 쌓고 그들의 삶 속으로 육박해 들어갔다. 말 위에서도 취재하고 기록하고 글을 썼다. 멀리 바깥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본 고국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얄팍한 ‘소중화주의’에 사로잡혀 멸망한 명나라를 여전히 그리워하고 천하를 평정한 청나라를 오랑캐라 업신여기며 배척하는 조선. 민중의 삶은 아랑곳하지 않고 기득권 지키기에 급급한 사대부들. 연암에게 청의 선진 문물은 벤치마킹의 대상이었다.
연암은 이렇게 외쳤다. “중국의 제일 장관은 저 기와 조각에 있고, 저 똥 덩어리에 있다.” 버려진 것, 사소한 것 하나라도 재활용해 사용하고 있는 청의 실용주의 정신에 연암은 깊은 감명을 받았다. 실사구시와 이용후생이란 실학사상의 요체를 단적으로 요약한 명문장은 이렇게 탄생했다. 그렇다고 연암이 노상 계몽주의에 입각해 ‘훈계’만 일삼는 것은 아니다. 『열하일기』가 걸작이 된 것은 무엇보다 유머와 패러독스가 전편에 흐르고 있기 때문. 산해관 옥전현의 한 점포에 들렀을 때의 일. 이상한 이야기가 한쪽 벽을 빼곡 메우고 있었다. 이를 본 연암이 베끼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청인이 “선생은 이걸 베껴 무얼 하시려는 겁니까?”라고 묻자 연암의 대답이 걸작이다. “귀국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읽혀 모두 허리를 잡고 한바탕 크게 웃게 할 작정입니다. 아마 이 글을 보면 다들 웃느라고 입안에 든 밥알이 벌처럼 튀어나오고 튼튼한 갓끈이라도 썩은 새끼줄처럼 툭 끊어질 겁니다.” 이렇게 창조적 모방을 통해 탄생한 작품이 조선 양반 사회를 통쾌하게 조롱하는 『호질(虎叱)』이다.
열하에서 연경으로 돌아와 객관(숙박업소)에서 귀국을 준비하는 연암. 역관들이 모여들어 연암의 봇짐에 눈길을 준다. 그 속에 진귀한 물건들이 잔뜩 들어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눈치다. 연암은 창대를 시켜 속속들이 헤쳐 보였다. 그 속에는 아무런 귀중품이 없었다. 붓과 벼루뿐. 그리고 청인들과 필담을 했던 초고와 일기만 가득했다. 그 놀라운 기록 정신이란! 『열하일기』는 나오자마자 장안의 화제가 됐다. ‘폐인’과 ‘안티팬’으로 갈라져 논쟁이 치열했다. 정조는 1792년 문체반정을 주도하면서 문체를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열하일기』를 금서로 지정했다. 연암에겐 반성문을 요구했지만, 연암은 끝내 이를 거절했다.
역대급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올여름. 이럴 땐 집 떠나면 고생이다. 『열하일기』를 읽으며 200여 년 전의 중국 대륙으로 종횡무진 시간 여행을 떠나가 보는 것은 어떨까. 천하제일의 피서법으로 강추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