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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현주 전 부산일보 논설위원 |
ⓒ 웅상뉴스(웅상신문) |
| 작가 귄터 그라스(1927~2015)는 당시 ‘자유 도시’의 지위에 있던 단치히(지금의 폴란드 그단스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독일 태생으로 식료품 가게 주인이었고 어머니는 폴란드령 카슈바이의 빈농 출신이었다. 그라스는 전형적인 소시민 출신이다.
『양철북』은 그라스가 태어난 단치히를 무대로 1, 2차 양차 대전을 전후해 파행을 거듭한 독일 역사를 오스카라는 난쟁이로 알레고리화한 작품이다. 1952~1954년 정신병원에 수감된 오스카 마체라트가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오스카는 외견상으론 세 살 때 성장이 멈춘 난쟁이지만 정신적으로는 태어날 때부터 성인의 지성과 인식을 갖추고 있다.
『양철북』을 번역한 장희창 전 동의대 교수의 해석은 유용하다. “성인의 지성과 난쟁이의 몸이라는, 이러한 그로테스크한 결합은 기발한 예술적 장치로 기능하며, 속물근성의 표현일 따름인 타협과 굴종에 의한 시민의식과 자아의식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독일 시민사회로부터 거리를 두고 관찰할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한다.”
즉, 오스카는 난쟁이이므로 정상인들이 가질 수 없는 ‘아래로부터의 시각’ 내지 ‘개구리 시점’에서 사물을 포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소설의 대표적 표현 기법은 반어와 역설과 풍자. 그라스는 난쟁이라는 알레고리화한 인물을 통해 20세기 초·중반 독일 역사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는데, 이러한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소설 곳곳에 내재한 오스카 개인사의 상징성을 날렵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오스카가 지하 계단서 추락해 성장을 멈춘 장면은 나치 치하라는 당시 독일 사회의 부조리를 거부하는 것을, 오스카의 친아버지일지도 모르는 폴란드 출신 얀 브론스키의 죽음은 폴란드의 패배를, 오스카가 그레프 부인과 벌이는 질척이는 성교는 수렁에 빠진 러시아와의 전쟁을, 나치 배지를 삼키다 질식사한 아버지 마체라트의 죽음은 독일 제국의 붕괴를 풍자 내지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마체라트의 죽음 후 오스카는 다시 성장하기로 결심하지만 99㎝의 키가 단지 121㎝ 자라는 데 그치고 곱사등이가 되고 만다. 이는 전후 독일 사회가 단순한 반성에만 머물렀을 뿐 성숙한 시민사회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음을 암시한다고 하겠다. 오스카는 양철북을 두드리거나 소리를 지름으로써, 가게 진열장 창문을 깨뜨려 사람들의 도둑질을 부추긴다. 그라스는 이러한 스토리를 통해 독일 소시민의 뒤틀린 욕망을 여지없이 폭로하고 있다.
특히 오스카가 교회 예수상에 북채를 쥐여 주며 북을 두드려 보라고 명령하는 장면은 1, 2차 세계대전이란 인류의 불행 앞에서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 기독교에 대한 비판 의식을 드러낸 것이다.
오스카의 북 치는 행위는 부조리한 사회와 나치즘에 대한 경종 혹은 비판적 기능으로써도 작동하고 있다. 오스카는 수차례 나치당의 집회장에서 북을 두드림으로써 행진곡이나 찬가를 왈츠나 폭스트롯으로 변형시키거나 행사를 흩트려 놓곤 한다.
그라스는 평생 문학과 현실을 동일시하며 사회 변혁을 부르짖은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그는 특히 일상 속에 잠재해 있는 폭력성에 주목했다. 나치 정권의 발호를 정치적인 관점에서 직접적으로 묘사하기보다 소시민적 일상의 배후에 도사린 야만성, 즉 일상 속의 파시즘을 폭로하는 방식으로 작품 활동을 했다.
동네 아이들이 오스카에게 오줌이 섞인 개구리 수프를 강제로 먹이는 장면, 오스카 아버지 마체라트가 비위가 약한 아내에게 말 대가리를 미끼로 잡은 장어 요리를 먹도록 하는 것 등. 이러한 소소한 폭력들이 파시즘이라는 거대한 폭력의 온상이 될 수 있음을 통찰한 것이다. 이 장면들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의 『채식주의자』 속의 일상 속 폭력과 궤를 같이한다. 작은 폭력이 큰 폭력의 원천이라는 인식이다.
그라스는 『양철북』에서 쿠헨 교수의 입을 빌려 자신의 문학관을 에둘러 표현하고 있다. “예술은 고발이고 표현이고 정열이다! 예술, 그것은 다름 아니라 백지 위에서 산산이 터지고 마는 폭탄이다!” 그렇다. 그라스에게 문학은 그냥 즐기는 언어 유희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걸고 끝까지 밀어붙여 결국 자신마저 파멸하고 마는 ‘언어의 전쟁터’인 셈이다.
전후 독일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정직과 신뢰의 상징 국가로 발돋움했다. 역대 총리마다 나치 희생자 묘지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모습도 보였다. 이 같은 독일의 신뢰와 발전 이면엔 ‘오스카의 북소리’와 같은 양심의 소리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도 최근 10년간 독일 사회는 다시 우경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내란수괴 윤석열의 12.3 비상계엄에서 이재명 대통령을 탄생시킨 6.3 조기 대선까지 한국은 극적인 ‘민주주의 드라마’를 연출했다. 응원 봉의 불빛, 그것은 바로 한국의 양철북이었다. 민주 시민은 언제나 각자의 양철북을 두드리며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절감한 6개월이었다. 민주주의는 너무 쉽게 훼손될 수 있는 ‘상처적 체질’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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