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포와 총칼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맨몸으로 나라를 지킨 민족
이번 12.3 비상계엄 사태에 즈음하여
웅상뉴스 기자 / jun28258@gmail.com 입력 : 2025년 01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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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을사년 2025년은 1905년 을사늑약이 있었던 해로부터 120년이 되는 해이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오적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이 우리나라를 일본에 팔아먹었다. 을사늑약으로 일본이 가장 먼저 행한 행위는 우리나라 외교권을 박탈하는 행위였다.
조선은 세계만방에 일본의 속국이 되었음을 알리기 위한 술책으로 외국에 있는 우리나라 외교 기관을 모두 폐지하고 주한 공사들을 모두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이어 군사통치권, 사법권까지 몰수하고 국가의 모든 통치권을 통째 빼앗아 간 것이다.
오늘날 정치 지도자 중에서 을사늑약이 이루어진 배경이 전 백성 책임이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이도 있지만, 당시 상식을 가진 모든 백성은 하나같이 일본이 우리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절대 반대하였다. 을사늑약에 앞장서고 동조한 세력들은 국가 장래와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개인 영달에 혈안이 되어 찬동하였다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한다. 한일합병은 1910년 8월 22일 이루어졌다.
을사늑약으로 국가의 모든 통치권을 상실한 나라가 더 잃을 것도 없는 판에 일본에 우리나라 백성들에게 더 철저하게 수탈해가도 좋다는 다짐 이상의 의미가 없는 약속이었다. 이 약속 또한 정신이 온당한 백성이라면 누구 한 사람 원한바 없는 일이었다. 친일세력들이 자신들의 이기심 충족하는 길을 더 확고하게 만들기 위한 수단에 의한 행위일 뿐이다. 1
906년에는 전국적으로 행정구역 개편이 단행되었다. 이 역시 주민의 의견 한마디 수렴없이 일본인들이 일방적으로 자행하였다. 양산군(당시 양산시)의 행정구역 변경은 양산군에 속해있던 구포면, 대저면, 외남면 중 구포면은 동래군으로, 대저면은 김해군으로, 외남면은 울산군으로 병합되고 울산군 웅상면은 양산군으로 병합되었다. 양산군을 눈꼽만큼이라도 걱정하는 이가 행정개편에 관여하였다면 이런 개편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당시 구포면과 대저면은 양산군 전체 재정 규모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지역을 타군에 이속되게 하는 일은 양산군의 재정이 빈손 상태가 되는 실정이었고 웅상면은 부족국가 때부터 울산에 속해 수천 년 동안 역사문화 전통과 생활권이 완전 별개 지역이다. 당시 교통 사정은 웅상주민이 양산군청에 토지대장 한 장 발급받기 위하여 걸리는 시간은 꼭두새벽에 출발하여 어둠이 드는 저녁이 되어야 돌아올 수 있는 실정이었고 양산군청 공무원들이 웅상에 가벼운 업무 출장을 와도 하룻밤 숙식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대저면은 낙동강 건너편이라 생활권이 별개라 생각할 수 있지만, 원시시대부터 강은 생활권의 연결고리였다. 강에는 뗏목만 이용하면 맘껏 왕래할 수 있었고 강 옆 양쪽에 밧줄만 메면 노를 젓지 않아도 밧줄을 이용하면 부력을 가진 물체를 타면 맘껏 오갈 수가 있다. 웅상 대운산과 천성산에서 발원한 회야강 물이 동해로 흐르는 주변에 형성된 마을들이 우시산국이란 부족국가를 이루었다.
강은 문화 발상지와 동일 생활권을 만들었다. 건축기술이 발달한 지금으로서는 강을 왕래하는 교량을 설치하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낙동강에 대저면과 양산을 연결하는 다리를 놓았다면 대저면에서 김해시청 가는 거리보다 양산시청에 오는 거리가 훨씬 가까운 거리다. 지역민을 위한 행정개편이 아니라 지역민 간 분열을 초래하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저의였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이루어 지던 날 궁궐 모습이나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령이 선포되는 날 국회의사당의 모습이 흡사하다고 본다. 을사늑약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 중무장한 일본 군인들이 궁궐을 에워싸고 협상장을 들락날락하며 위협을 가하며 협상에 응하지 않으면 목숨을 앗아 간다는 위압적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12.3 계엄선포 시 최전선을 지키는 탱크를 서울까지 몰고 오고 최고도의 훈련을 받은 세계 최고의 테러기술을 가진 부대원들이 최신예 무기로 무장하고 국회의사당에 투입되고 수많은 경찰이 국회 기능을 마비시키기 위하여 동원되었다. 12.3 비상계엄 사태는 탱크에 깔려 죽을 수도 있다는 위협과 총알이 날아와 죽을 수도 있다는 일촉즉발의 위협을 무릅쓰고 사태를 저지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자발적으로 몰려온 애국시민들의 용기가 민주주의와 나라를 지킨 것이다.
을사늑약이 이루어지는 시절 지금 시대처럼 신속한 정보교환이 가능하고 교통수단이 있었다면 대포와 총칼로서도 충성스러운 수많은 백성이 운집한 힘을 감당하지 못해 을사늑약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 확신한다.
이를 증명하는 일은 우리나라 역사가 증명한다. 임진왜란 때 임금과 대신들과 관리들, 관군마저 제만 살겠다고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도망하러 가도 도망갈 능력도 없는 힘없는 백성들이 맨몸과 죽창으로 대포와 총칼에 대응하며 나라를 지켰고, 반만년 역사 중 가장 거룩하고 위대한 민중의 봉기인 동학혁명 때는 죽는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부패한 세도가들 학정에 시달려 죽는 것이나 봉기에 참여하여 죽는 것이나 죽는 것은 매한가지이지만 의로운 죽음은 동학 혁명군에 가담해 죽는 일이라 하며 수십만 명이 자진하여 희생당했다.
독립운동에 참여한 애국지사들과 시민들, 4.19혁명에 참여한 학생들과 시민들, 5.18사태에 대응한 시민들, 죽음의 위협을 알면서도 싸웠던 정의로운 민중들의 용기가 나라와 민주주의를 지켜왔고 이게 바로 자랑스러운 우리 민족의식이다. 우리 민족의식이 살아 있는 한 우리 조국은 지켜질 것이다. |
웅상뉴스 기자 / jun28258@gmail.com  입력 : 2025년 01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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