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체코 리토미슐 마을의 스메타나 광장 |
ⓒ 웅상뉴스(웅상신문) |
| 체코 수도 프라하에서 약 160킬로미터 곳에 있는 리토미슐, 인구 1만 정도의 작은 도시 리토미슐은 스메타나 광장을 중심으로 리토미슐 성, 성당 등이 있다. 이름만 들어도 미술적인 느낌이 듬뿍 나는 리토미슐,
세계적인 작곡가 베드르지흐 스메타나가 태어난 곳이고 매년 6월 말부터 7월 초까지 약 2주간에 걸쳐 스메타나의 리토미슐 음악축제가 열린다는 말을 들었는데도 리토미슐이 감각적이고 아름다운 색채로 만들어진 도시일 거라는 생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 생각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스메타나 광장에 있는 즐라타 호텔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 마을을 산책하면서 본 것은 고요하게 흐르는 예술적 분위기였다. 광장 옆 긴 통로의 건물 곳곳은 하루를 준비하는 상점이 조용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
 |
|
ⓒ 웅상뉴스(웅상신문) |
| 눈길을 끈 것은 꽃을 파는 남자였다. 아침 햇살을 받은 장미꽃을 붉은빛을 내뿜고 통로는 더없이 평화로웠다. 광장을 지나 마을을 관통하는 강으로 향했다. 청명한 하늘과 물가에 흐드러지게 가지가 늘어뜨린 수양버들과 단아한 집이 평화롭고도 발랄했다.
마을 곳곳에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마을답게 화려한 르네상스 양식이 돋보이는 건물들을 만났다. 알록달록한 건물은 하나같이 세련되고 독특하고 여유로웠다.
아침 산책이 끝난 후 광장에서 약 500미터 동쪽에 있는 리토미슐 성에 단체 일정으로 보러 갔다. 리토미슐 성은 6월에 있는 스메타나 음악제 준비로 공사 중이었는데,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
 |
|
ⓒ 웅상뉴스(웅상신문) |
|
|
 |
|
리토미슐 성 외벽, 즈크라피토 기법으로 하나씩 파낸 벽돌 |
| 1999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된 리토미슐 성은 브라티슬라프 폰 페른슈타인(Vrat백작이 이탈리아 건축가들을 초빙해 1568에 착공, 1581년에 완공한 것으로 르네상스 양식과 기술을 전적으로 도입했다. 공사로 구석구석 볼 수는 없었지만 보는 것만으로 특별한 느낌이었다.
특히 이 성의 외벽 전체는 르네상스 양식의 끝손질 디자인, 즈크라피토 기법으로 하나하나 조각으로 파낸 것이다. 벽면에 석회를 바른 다음 마르기 전에 긁어내면서 바탕색이 드러나게 하는 기법이다. 외관은 이 기법으로 8,000여 개가 넘는 ‘가짜 돌’로 장식되어 있고 조각마다 다른 모습으로 꽃, 식물, 사람, 과일, 신화 속 모습, 동물 등이 다채롭게 그려져 있다.
대체 스메타나 음악가는 대체 어떤 사람인가. 궁금했다. 사실 음악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는 나였다. 한때 4년 정도 피아노 교습도 하고 클래식 음악만 들은 적도 있지만 시간이 나면 음악 대신 영화를 보는 편이었다.
베드르지흐 스메타나는 보헤미아 왕국이었던 시절, 정식 음악교육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현악사중주에서 연주를 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음악적으로 성장했고 일찍이 프라하로 나갔다.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이 지배하고 있었던 보헤미아는 민중 사이에 저항 운동이 확산되고 있었다. 스메타나는 4살 때부터 피아노와 바이올린 수업을 받았고 6살 때 처음으로 공개 연주회를 하는 등 뛰어난 실력을 가졌다.
그의 나이 22세가 될 때인 1846년 리스트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피아노 연주자가 되고자 했다. 하지만 1848년 6월, 프라하에서 일어난 혁명운동을 계기로 민족의식에 눈을 떠 국민 의용군 행진곡 등을 작곡하는 등 민족 운동으로서의 작곡가의 역할을 자각하게 된다. 그의 음악은 전반적으로 과도한 민족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서정적인 면이 짙었으며, 보헤미안 민족 음악의 시조로 불린다.
한창 활동하던 1874년, 신경매독과 관련된 귓병으로 지휘자를 그만둔 스메타나는 그해 10월, 청력을 완전히 잃었음에도 조국에 대한 깊은 사랑을 나타낸 교향시 <나의 조국>을 작곡했다.
나의 조국 중 2부 블라타<몰다우>는 대중적으로 알려진 작품이다. 1884년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한 그는 ‘예술적인 사상을 형성하고 표현하는 사람만이 완전한 인간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2023. 4. 12)
|
 |
|
6월에 있는 스메타나 음악제 준비로 공사 중인 리토미슐 성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