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상사람들의 삶을 말하다(48)-상/길과 우리생활
박극수 시인 (현)양산문화원 부원장 양산시 향토문화연구회 감사
웅상뉴스 기자 / jun28258@gmail.com 입력 : 2018년 07월 27일
모든 동물들이 살아 가는데 길이 없다면 생명을 보존할 수가 없다. 길따라 생활 영역이 이루어진다. 우리 고장은 양산시에 속해 있지만 역사성, 전통성 생활권은 울산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행정구역이 삼한시대부터 조선 말기까지 2000여년 동안 울산에 속해 있었던 탓도 있지만 선조들이 행정구역을 울산에 속하게 한 가장 우선된 조건은 울산과 통행이 용이한 길이 있었기 때문이다. 태산준령은 길이 될 수가 없고, 평탄한 평지가 펼쳐진 회야강변 따라 길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용당고개 길이 연결된것도 낮은 고개 따라 연결되었다.
원시시대 생활권의 형성은 인위적인 방법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내린 지형지세 따라 이루어지게 되었다. 울산과 동일 생활권이 되었던 것은 하늘이 내린 자연여건으로 필연적 동일 생활권을 이룰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길따라 사람의 인연도 맺어지게 마련이다. 지금은 차량으로, 비행기로 이동하는 길을 이용하게 되어 먼 외국이나 먼 지역에도 예사롭게 연이 맺어지지만 도보에 의하여 이동하는 길을 이용할 시기에는 먼거리에 있는 지역민과는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없어 자주 만나는 가까운 지역민과 연을 맺을 수 밖에 없는 처지라 옛 사람들은 척간에 집성을 이루어 살며 결혼대상도 대다수 인척과 관계가 있는 대상과 연을 맺었다.
우리지역에 집성을 이루고 산 씨족들은 대다수 경주, 울산에서 선대 어른들이 웅상으로 정착하게 된 문중이 많다.
도시화로 변하기 이전인 1970년경까지만 해도 지역에 사는 분들은 친가, 처가, 외가, 사돈으로 이루어져 있어 사돈 팔촌까지 따지면 남이 없을 정도였다. 필자의 선대 어른들 이동경로 또한 경주에서 울산에서 웅촌 대복에서 12대 조부님께서 웅상명곡(명동)에 정착하여 집성을 이루어 살게 되면서 울산박씨 명곡파라는 파를 이루게 되었다. 6대 조부님 4형제분은 명곡뒷들 명동이라는 마을에서 출생하셔 성장해 맏형과 둘째형은 백동으로 이거해 정착하고 셋째분과 네번째분은 명동에 살았다.
백동으로 이거하게된 동기는 소유경작한 농지가 명동에서 경작하기 보다 백동에서 경작하는 길이 가까워 농사 짓기가 훨씬 수월했기 때문이 아닐까 추정된다. 우리 선조들이 이동하게 된 요인은 전쟁피난으로 이동하기도 하고 충신열사들이 간신도배들의 모함에 의하여 역적으로 몰려 멸문지화를 당할 처지가 되어 생명을 부지하기 위하여 길따라 이동한 집안도 있고, 대체로 흉년이 들거나 가세가 어려워 먹고 살기가 난감하여 생명을 부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동하였다.
6.25동난 이후까지도 그랬지만 농사를 지어 가계의 윤택이 희망이 아니라 굶어 죽지 않으려는 발버둥이었다. 농작물을 가꾸기 위하여 운반해야 할 씨앗과 모종, 퇴비 농용자재 운반이나 수확한 농작물을 거두어들이는 운반용구도 길의 형태따라 변했다.
사람이 지고 다니는 지게, 우마를 이용한 질메가 운반수단이다. 우마차를 이용한 농가들이 있어도 우마차를 이용할 길이 없어 이용할 수 있는 농토는 일부에 속했다. 강변에 있는 주민들은 강너머 농사를 짓기 위하여 배를 이용하게 되고 하천을 넘나들며 농사를 지어야 했던 사람들은 돌다리를 놓아 오가며 농사를 지었다. 작은 개울을 사이에 두고도 운반수단에 어려움이 많았는데 태산준령을 너머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불가능 했다.
길은 짐승이나 사람들이 오가다보니 이에 짓밟힌 풀과 나무는 제거되고 자연적으로 오솔길이 되었다. 시대변천에 따라 길의 형태가 변화되었다.
1960년 이전까지 농촌 대다수 들길, 산길, 마을안길은 리어커도 다닐 수 없는 길이었다. 군사혁명 이후 새마을 사업을 하게 되면서 리어커가 간신히 다닐 수 있는 길로 넓혀 리어커보급이 일반 농가에 보편화 되게 되었다. 1970년경부터 경운기 보급이 되기 시작하자 리어커 길의 폭을 1.5m만 되면 되었지만 경운기 길은 2m정도는 되어야 통행이 되었다.
정부에서는 농로확보를 위한 토지매입비는 지원되지 않았지만 도로 포장을 위한 시멘트가 지원되긴 해도 마을사람들이 시멘트를 모래, 자갈, 물을 섞어 포장하는 작업은 전적 감당했다. 이 당시에는 마을지도자 역량의 발휘여부가 마을의 형태를 바꾸는데 절대적 역할을 했다. 필자의 마을 역시 어느 마을과 다를바 없이 농로길이란 길은 사람만 걸어다닐 수 있는 폭1m 내외의 도로였고, 이나마 토지대장 지목에 도로라 표기된 토지는 간혹있었고 개인사유 토지를 밟고 다니는 길이였다. 들은 넓고 길이 좁은 들에 경운기라도 다닐 수 있는 길을 만들기 위하여 마을의 지도층인사들의 희생적 노력이 필요했다.
길을 조성하기 위한 인력동원은 무임금으로 마을분들의 힘으로 해내었다. 인력동원을 위한 노력도 예사스러운 일이 아니였지만 길에 편입되는 토지를 양해받는 일은 너무나도 어려웠다. 토지지주가 외국에 가 거주하는 분도 있고 토지소유자가 사망하고 후손들의 행방을 알 수 없는 토지가 있는가하면 마을에 거주하면서 그길을 누구보다 더 많이 이용하는 주민들 중에서도 토지사용 승낙을 잘해주지 않는 주민도 여러명이었다. 필자도 농로개설에 앞장서 토지 사용동의를 받기 위해 많은 집을 찾아 다녔기에 토지승낙에 임한 한분한분의 자세를 세세하게 기록할 수가 있다. 대다수 쉽게 허락하였지만 어떤 댁은 열 번 이상 방문해 설득하고 사정한 댁도 있고, 아무리 설득을 해도 설득이 되지 않아 당초 계획대로 농로를 개설하지 못하고 둘러 더 연장된 방향으로 농로를 개설하기도 했다.
한평도 돈을 주고 매입한 토지가 없고, 농로개설양해만 구하고 조성한 농로라 토지대장정리가 되지 않아 지금도 그 농로를 사용하고 있는 곳에서는 분쟁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마을이 생긴 이래도 가장 획기적인 일을 한 것이다.
그때 농로 조성한 들은 도시계획상 주거지역으로 지정되어 많은 면적이 토지 구획정리 사업으로 주거지로 변경이 되었다.
농로 편입토지 양해받기 위한 과정을 이야기 하면 집집마다 인심과 가장의 인품의 모습을 이야기하는 역사책이 될 것이다. 웅상에서 오래 거주한 주민이라면 그분의 성함만 말해도 잘 알정도로 잘 알려진 분이고 지역에 큰 영향을 발휘했고, 주민들에게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던 분이 토지사용 승낙을 끝까지 해주지 않아 긴 거리를 둘러 농로를 개설한 구간이있다.
자기 이름자도 못쓰는 분 가족끼니를 걱정하는 분 마저 모두 양해를 구해 농로를 개설하였는데 지역의 최고유지이시고 경제력으로도 여유가 있는 그분 한분만이 유일하게 양해를 받지 못했다. 지금도 그분이 그토록 반대하며 승낙을 해주시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차마 그분의 존함을 거명할 수 없지만 그 사실을 아는 주민들의 기억속에 그대로 각인되어 있을 것이며 기억속에 있는 사실을 대화과정에 이야기가 흘러나와 후대까지 명예에 누가 될 것이다.
농로가 없던 시절 30마지기 농사만 지어도 머슴을 들이지 않고는 농사를 지을 수 없었지만 경운기 다닐 수 있는 농로가 개설되고 경운기로 농사를 지을 때는 많은 면적의 농사를 지울 수 있었다. 필자도 경운기로 혼자서 경지정리도 되지 않은 도가리 논을 80마지기 가량 지을 때도 있었다. 소로 논갈이할 때 절반도 안되는 농사를 지울 때보다 휠씬 수월했고 면적당 소득도 증대되었다. 밤낮없이 땀을 흘리며 일했던 그 시절이 일생 중 가장 행복했던 순간인 것 같다.
국가에서 도로라는 개념을 가지고 관리해온 것은 삼국시대 부터이다. 부족국가들이 세력을 확장해 가는 과정에 요새지에 축성이나 행정구역을 이루어가는 과정에 중요도로는 국가에서 관리해왔다. 신라 초기 육촌의 왕래를 위한 도로가 이루어졌다. 고려시대부터 지역의 교통요충지 마다 역을 개설하여 관리와 백성들의 왕래와 국가문서 전달, 물류이동을 담당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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