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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성산 이야기(16) /적멸굴(寂滅窟)-하


웅상뉴스 기자 / jun28258@gmail.com입력 : 2017년 12월 20일
ⓒ 웅상뉴스(웅상신문)
靑山疊疊彌陀窟 (청산첩첩미타굴)
滄海茫茫寂滅宮 (창해망망적멸궁)

첩첩한 푸른 산은 아미타의 굴이요
망망한 큰 바다는 적멸의 궁전이로다.
-원효대사, 오도송-

오도송이란 선승들이 깨달음을 얻고 그 깨달음을 읊은 선시(禪詩)를 말하는 것이다. 원효대사는 과연 어떤 다른 곳이 아닌 이곳 천성산에서 깨달음을 구했을까.

원효대사 (617~686) 의 속성은 설(薛)이다. 아명은 서당(誓幢)· 신당(新幢). 이름은 사례(思禮). 원효라는 이름은 출가한 뒤 지은 이름으로, 첫새벽(始旦)을 뜻한다. 태종무열왕의 둘째 사위 내말 설담날의 아들이다.

원효대사도 소년 시절엔 화랑도였다. 숱한 전쟁터를 누비면서 많은 죽음을 보았다. 어린 소년은 많은 죽음 앞에서 허무에 시달렸다. 생이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생멸의 허무에 시달리던 원효는 황룡사에서 승려가 될 것을 결심한다. 이 때 나이 15~1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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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 (黃龍寺)에서 스님이 된 원효는 의상 (義湘) 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 그러나 여행 도중 굴속에서 자다가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는 “ 진리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 는 깨달음을 터득하고는 되돌아왔다.

그리고 저잣거리의 거렁뱅이나 미친 사람 술주정꾼들과 어울려 춤추고 노래하며 서라벌을 누볐다. 사람들로부터 괴이한 요승이란 소릴 들으면서도 화엄경을 설파했다.

유학의 좌절과 끝없는 생의 허무는 그를 세속의 거리로 내몰았다. 그런 와중에도 무열왕의 눈에 들어 요석공주 (瑤石公主) 를 만난다.

요석공주는 태종무열왕과 셋째부인인 보희와의 사이에 난 딸이다. 그러나 스님으로서 불가의 계율을 크게 거스른 것이다. 원효는 실계 (失戒)의 비탄에 빠져 스스로 소성거사 (小性居士)라 부르며 광대복장을 하고 산천수도의 길을 떠난다. 전국의 명산유곡을 누볐다. 그 중 한 곳이 천성산이다.

삼국유사 등 여러 기록으로 볼 때 원효대사는 전국각처의 수도처 중에서도 천성산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원효는 이 곳 천성산에서 득도한 뒤 일심 사상 (一心思想), 화쟁사상 (和諍思想), 무애사상 (無碍思想) 3대 불교사상체계를 정립시켰으며 89개 암자를 세우는 등 많은 자취를 남겼다.

이들 암자는 대부분 사라지고 7~8개만 남아있다. 미타암도 그중 하나인데 미타암 기록으로 보면 원효대사가 29세 때 미타암을 건립한 것으로 계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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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미타암 주지스님께 『 89개나 되는 많은 암자를 한 스님의 힘으로 어떻게 다 지을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한 적이 있는데 『 아마 당시로서는 워낙 유명한 스님이었기 때문에 많은 그를 흠모하는 많은 사찰들이 원효의 공적으로 삼지 않았겠느냐』고 했다.

원효는 당나라 태화사(泰和寺)에서 공부하는 1,000명의 승려가 장마로 인한 산사태로 매몰될 운명에 놓인 것을 알고, ‘曉擲板而救衆(효척판이구중)’이라고 쓴 큰 판자를 하늘로 날려 보내어 그 절 상공에 뜨게 하였는데,

이것을 보고 놀란 대중이 일제히 법당에서 나와 쳐다보는 순간 뒷산이 무너져서 절이 매몰되었다. 이에 1,000명의 승려들이 원효를 찾아와서 가르침을 받고 모두 도를 깨쳤다고 한다. 그래서 천명의 성인이 났다고 해서 천성산 (千聖山)이라 했으며 기장 장안사 척판암도 이때의 기적을 기리기 위해 지은 이름이다.

적멸굴은 붉은 눈썹을 닮았다해서 적미굴(赤眉窟)이라고도 한다. 이곳은 원효대사에 이어 조선 후기 천도교 창시자인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1824~1864) 선생의 수도처로도 전해 오고 있다.

최제우 (崔濟愚) 선생은 1856년(철종 7년) 이곳의 내원암(內院庵)에서 49일간 기도하고, 다음해 적멸굴(寂滅窟)에서 49일간 기도했으며, 1859년 다시 경주 용담정(龍潭亭)에서 수도한 뒤 유불선(儒佛仙) 동양 3교의 사상을 바탕으로 동학(東學)을 창도했다.

그 후 1909년 3.1운동 33인의 한 분인 의암 손병희(義菴 孫秉熙) 선생이 내원암에서 49일간 독공(篤工)했다. 그리고 적멸굴을 참배한 후 함께 수행한 6인의 이름을 내원사 입구 금강암 병풍바위에 새겨놓았다.

적미굴은 어지러운 세상을 고뇌한 한 사람의 지식인이 동학의 교조로 거듭난 곳이기도 하다.
↑↑ 김 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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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상뉴스 기자 / jun28258@gmail.com입력 : 2017년 12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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