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상의 역사를 말하다(39)-하
한세기를 웅상에서 살다가신 이조기 할머니의 삶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7년 09월 19일
<지난호에 이어>보초라는 것이 지서(파출소)를 몇 겹으로 에워싸고 대창을 들고 공비가 오지 못하도록 밤에는 차례대로 구령을 하며 섰다고 하니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지켜야할 경찰이 자신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국민들에게 보초를 서게 했다는 사실은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지금까지는 할머니가 하신 말씀을 그대로 옮겼고 이후부터는 필자가 보아온 할머니와 가족들의 모습을 쓴다.
고모부는 청량면 용암리 신촌에서 어머니와 앞뒷집에 자란 어머니 친구 분을 아버지 중매로 새 아내(새 고모)로 맞아들이고 근무하던 웅촌 면사무소를 그만두고 백부님의 소개로 부산 철도 공작창으로 근무지를 옮겼다. 제종 형님은 명곡 고령 김씨댁 처녀와 재혼을 했다.
제종 형님 가족도 아버지가 오신 지 1년 후 명곡과 접한 7호 국도 명곡 교량 건너 동남쪽 회야천 변 주진리 24-2번지에 있는 물레방아를 매입하여 이사를 오고 제종 형님 온 후 일 년이 지난 후, 작은아버지 내외분은 할머니를 모시고 석천에서 출생한 다섯 살 난 사촌형을 데리고 우리 집과 제종형님 집과 진외가 (아버지의 외가)이웃인 명곡 소정마을 7호국도 명곡교량 북동쪽 회야천 변 명곡리 947번지에 집을(난간 집이라 한다)구해 이사를 왔다.
우리가 명곡 온 지 2년 지난 어느 날 석천에서 태어난 세 살 난형이 세상을 떠났다. 1950년 정월 초하룻날 작은어머니가(25세) 갑자기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작은아버지는 웅촌면 방개 김해 김씨 처녀와 결혼을 했다. 세상 본 지 얼마 되지 않은 남동생이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 생존하신 동안 할머니보다 세상을 먼저 떠난 자손은 필자의 아버지, 어머니 두 분, 숙모, 고모, 고모부, 형동생, 4촌, 아들 총 10명이었다.
자손이 험한 일을 당할 때마다 당신의 공덕이 부족한 탓이라며 전부 당신의 죄라고 하셨다. 편안하게 앉아 계시는 순간에는 먼저 간 자손들 생각 때문에 이에 벗어나기 위해 죽자살자 일하시는 것밖에 모르셨다.
긴 여름 낮 밭을 매시면서 보리밥 한 그릇 김치 한 가지 가지고가신 것 드실 때외는 일체 쉬는 모습을 보지 못해 좀 쉬시라면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남의 삶(먼저간 자손들의 삶을 빼앗아 사신다고 생각함)을 사는 것인데 죽지 못해 사는 몸을 아껴 무엇하냐고 하셨다. 죽으면 썩어질 몸, 말씀 그대로 죽으면 썩어질 몸이라 그런지 당신의 몸을 얼마나 고단하게 하셨는지 모른다.
우리 밭과 작은아버지 댁 밭이 나란히 있는데 작은아버지 댁 밭은 다 매고 우리 밭엔 아무리 풀이 많아도 그 풀 한 포기 뽑아 주지 않았다.
아버지 어머니는 이에 대하여 일체 언급하지 않았지만 지금도 할머니의 그 속마음을 확실하게 알 수 없고 할머니 도움을 받고자 한 것도 아니지만 어린 우리는 서운했다.
작은아버지 댁에 할머니가 거처하시는 것도 그 당시 관습으로서는 맞지 않는 일이었지만 큰아버지가 부산으로 떠나게 되고 큰집에 같이 살던 작은아버지와 같이 남아있게 된 것이 작은아버지가 할머니를 모시게 된 이유인 것 같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작은아버지는 남 형제 중 막내고 아버지와는 아홉 살이나 떨어져 큰아버지와 아버지도 작은아버지를 어른이 되어도 어린애 취급을 했고, 할머니도 그런 눈으로 보셨다. 좌익에 가담하여 풀려나올 때 시체와 같은 모습에 얼마나 충격이었는지 할머니는 평생 그 충격을 담고 사셨다.
작은아버지는 사상 불순자로 요시찰 인물이 되어 평생을 한 달에 1회 이상 정보당국으로부터 사생활 모습을 조사 받아 왔다.
할머니는 또 잡혀갈 것이 아닌가 행여 또 가담하지 않을까 조바심 때문에 더 끼고 사신 것 같다. 연좌제는 1990년경까지 실시되었다. 사상이 불순한 요시찰 인물의 친인척은 공직자가 될 수 없었다. 연좌제 대상의 친인척은 일체 공직자가 될 수 없음에도 우리 사촌 중에는 국가 최고 기밀과 정보를 취급하는 중앙정보부 간부가 된 분도 있고, 다른 공직자로 근무한 사람도 있는가하며 공무원 채용고시에 합격하고도 신원조회로 인해 불합격 처리된 사람도 있다. 이런 차별은 사전 신원조회 조사기관의 경찰공무원과 결탁의 여부에 있었다. 당시 공무원들의 모습이 이와 같은 모습이었다.
1950년경 백동에 살던 제종형님 두 분 가족은 우리 바로 옆집과 그 옆집에 이사를 오고, 물레방앗간을 돌리던 제종형님 댁은 1952년경 우리집 바로 앞집에 이사를 했다. (2003년 지금은 명곡 주유소 자리) 몇 백 석 지기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씨름꾼 종숙부님은 다른 가정을 차려 가정을 돌보지 않고 떠돌다가 공비들이 저지른 만행을 뒤집어쓰고 경찰에 쫒기는 처지가 될 때, 이 세상에 믿고 몸 숨길 곳은 조강지처뿐이었는지 백동에 살았던 종숙모님에게 숨겨 줄 것을 요청하며 찾아와 미타암 절 근처 토굴에 숨어 여러 달 동안 아무도 모르는 밤중에 밥을 지어다 바쳤다. 눈이 온 날은 그 발자국을 지우기 위해 손으로 지우며 오갔었다.
남편을 찾지 않으면 사상범 은닉죄로 전 가족을 몰살하겠다 하며 종숙모를 경찰서 유치장에 가두고 모진 고문까지 해도 모른다고 일관하며 참았다.
그 당시에는 오해로 사상범으로 지목된 사람 도 즉석에서 총살형을 했던 때라 관계된 공비가 잡히고 오해가 풀려 토굴을 나오게되자 바로 다른 가정을 이룬 집으로 가 버렸다.
이런 남편을 만나 연명하기조차 힘들어 두 딸을 데리고 울산시 유곡동 친정 쪽으로 가 살기도 하고 이곳저곳을 전진하다 1955년경 우리 집 도로 건너 작은아버지가 살던 (명곡리 960-7번지) 집으로 이사를 하고, 작은아버지는 우리 옆집 제종형님 뒷집으로(명곡리 944번지)살림을 옮겨(작은아버지는 명곡에서 집을 3번째 옮김) 대소가 여섯 집이 한 울타리를 접한 이웃에 살며 울을 트고 살았다.
농삿일이나 가정 대소사 모든 일을 한집일 같이 돌보며 어줍잖은 별난 음식이 있어도 한자리를 했다. 종숙부님은 1960년경 마음을 잡았는지 종숙모님이 살던 집으로 와 같이 살다 1962년 딸을 한 명 더 낳아 식구만 늘리고 다시 다른 가정으로 가신 후, 그 집에서 일생을 마쳤다.
할머니가 우리 집 일을 도우시게 된 때는 아버지가 상처하시고 새로 맞이한 나를 낳아 주신 어머니가 1974년 49세로 돌아가신 이후부터였다.
당시 할머니 연세는 88세였지만, 젊은 사람 보다 일을 더 많이 하셨다. 어머니 잃은 손자들이 안쓰러웠던지 거처는 작은아버지 댁에 그대로 하시면서 아침나절은 우리 집의 일을 하시고 오후에는 작은아버지 댁 일을 하셨다. 아흔 여섯 살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같이 반복하다, 돌아가시는 그날도 우리 집 콩 한 가마니를 타작하시고, 작은아버지댁 콩 반 가마니를 타작하시고 그날 저녁에 돌아가셨다. 일을 하지 마시라고 말리면 “ 나는 일할 때가 제일 편하다”하고 가만 계시면 맘이 편치 못했던 모양이다.
할머니는 자주 “내같이 죄 많은 년이 모든 것이 복에 겹다” 하며 모든 것에 얼마나 감사했나 하면 나무를 아끼면 산신령이 복을 주시고, 물을 아끼면 용왕님이 복을 주시고, 곡식을 아끼면 하늘과 땅이 복을 주신다며 정성으로 몸소 실천하신 분이다.
소죽을 끓이고 부엌에 남은 불덩이를 화롯불에 담고 남으면 숯을 만들던가 딴 부엌에 옮겨 다른 용도로 사용했고, 맑은 물은 세수하고 발 씻고 걸레 빨고 남은 물은 마당 먼지 나는 곳에 뿌리거나 꽃밭에 뿌려주기도 하셨다. 데워진 물을 버려도 완전 식히지 않고는 버리지 않았다.
그대로 버리면 땅속에 미물이 뜨겁다 하시며 식혀 버렸다. 어디에 버린 쌀 한 톨, 한 알 밥이라도 있으면 다 주워 씻어 소를 주던가 하였다. 밥을 먹고 난 후, 밥그릇 국그릇 반찬 그릇까지 차례로 물을 부어 씻어 그물을 마시면서 이렇게 밥을 먹어야 체하지 않는다고 했다.
아이들 먹던 음식 남기면 아이들 출세하지 못한다며 아이들 먹다 남은 음식은 누가 먹는 다 먹게 하였다.
갖가지 민간요법을 이용한 약을 구해 헛간에 달아 놓고 이웃 사람들이 아프면 손수 달이거나 조제하여 갖다 주셨다. 마약인 줄 아셨는지 모르셨는지 양귀비를 채소밭에 많이 길러 약재로 사용하였다. 그 외 많은 약재도 재배하고, 약이 되는 나무, 풀, 산돼지 쓸개, 꿩, 산토끼까지 말려 달아 놓았다.
어느 누가 요구를 했는지 그렇게 하자고 약속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하루도 빠지는 날 없이 아버지는 저녁을 드시고 나면 무조건 작은아버지 댁 할머니가 거처하시는 방에 가셔서 할머니, 작은아버지와 밤이 늦도록 계시다 오셨다.
제종형님들도 종숙모님도 자주 오셨다. 작은아버지 역시 우리 집에 하루에 몇 번씩 오시지 않는 날은 하루도 없었다.
풋감을 주워 홍시를 만들든가 고구마, 무, 찐쌀, 밀 볶은 것이나 시래기 뿌리 삶은 것 등 군것질 거리를 장만하셔서 아들과 손자 누가와도 무엇이라도 주셨다. 집에 누구라도 와 무엇이라도 대접해야 하는데 손님이 먹지 않고 가겠다하면 “우리집에 오신 손님 물 한 모금이라도 먹지 않고 가면 우리 집 못산다고 하는데 우리집 못 살아도 좋으냐” 말씀하시며 대접받지 않고 가신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항시 험한 일을 하시면서 옷매무새는 흐트러짐 없이 정갈한 모습이었고, 주무실 때 말고 누워 계시는 모습은 본 일이 없다. 한쪽 다리를 접어 눕히고 한쪽 정강이를 세우고 여성스러운 모습으로 앉아 밤을 새워도 그대로 앉아 계셨다.
부채를 부쳐도 당신을 향해 부치지 않고 앞서 앚아 있는 자손들이나 다른 분을 향해 부쳤다. 네가 시원하면 내가 시원하다 하셨다.
돌아가실 때의 모습은 그렇게 평화롭기만 했다. 신앙을 가지지 않으셨지만 성직자와 같은 생활을 하셨다. 글자 한자도 모르시는 무지한 그분들의 생활 모습을 흉내 내지 못하는데 세상이 이기적인 모습으로 치 닫고 있는데 과연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 할머니들 모습으로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음 좋겠다.
우리 할머니만이 그런 모습으로 사신 것이 아니라 그때를 사신 모든 할머니들이 다 비슷하셨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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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극수 시인 (현)양산문화원 이사 양산시 향토문화연구회 감사 웅상의 발자취 편집위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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