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상의 역사를 말하다(39)-중
한세기를 웅상에서 살다가신 이조기 할머니의 삶
웅상뉴스 기자 / jun28258@gmail.com 입력 : 2017년 08월 28일
<지난호에 이어>자식들이 주장들이 강해 부락에서 쫓아내려고 부락 청장년들이 회의를 해 공동으로 괴롭힐 때도 굴하지 않고 너희들이 힘으로 한다면 우리도 힘으로 대응하겠다며 백동에 있는 건장한 제종방 20~30명을 불러(그 중에는 김해, 양산, 울산지방에서 제일 가는 씨름꾼과 싸움꾼도 있었음) 너희들이 떼거지나 힘으로 우리를 누른다면 우리도 떼거지와 힘으로 너희와 대응하겠다 하며 그들이 제시하는 조건으로 개별 대결이든 전면 대결이든 힘으로 대결할 것을 요청하자, 힘으로 지역에 알려진 몇 사람들을 보고 화해할 것을 요청해 화해를 하고 그 이후로는 마을에서 전처럼 무시하지는 않았다.
생활도 안정되어 가고 마을에 정도 들고 할 때쯤 남편은 몸져누운 지 한달 채 못되어 62세 되던 해 1973년 음력 5월 3일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할머니 연세 51세, 큰아들 29세, 둘째아들 27세, 셋째아들 18세, 딸 16세, 장손 6세였음) 일정 치하인 그 시절에는 공동묘지 외에는 묘지를 쓰게 되면 처벌을 받던 때라 밤에 웅상면 소주리 뒷산 신흥부락 남서쪽 선산에 묘를 썼다. 밤중에 상여를 이용하고 묘를 썻지만 석천 사람들이나 백동사람 온 마을에서 나올 만한 사람은 다 나와 자신이 상주된 자세로 협력했다.
둘째아들은 같은 마을 이웃에 살림을 내었으나 농사일이나 모든 일을 같은 집에 살 때와 똑같이 큰집 일을 했고, 같은 마을에 사는 질부와 종손자도 같은 식구처럼 작고 큰일이 있을 때 같이 했다. 대소가 제삿날은 온 가족들이 백동까지 걸어 오가면서 한번도 빠진 일 없이 참석했고 석천에서 제사 든 날 역시 백동 대소가 식구 전원이 걸어와도 길 먼 줄 모르고 집 앞처럼 왕래했다.
전화가 없던 때라 급한 기별할 일이 있을 시에는 한밤에도 연락을 하러 다녔다. 1943년 2월 27일 같은 마을에 사는 종손부가 22세에 세상을 떠났다. 1943년 6월 19일 둘째 며느리가 29세의 나이에 순산을 하다 두 딸을 두고 낳던 자식과 같이 세상을 떠났다. 시집간 딸도 그 해 가고, 종손부가 낳은 딸도 갔다. 한 집안에서 다섯 사람을 연속적으로 상을 치러야 했다. 이런 때 사용하는 말이 남부끄럽고 내 답답하다는 말이다.
남편 장례 때와 같이 공동묘지가 아니면 묘지를 쓸 수 없던 때라 둘째 며느리 묘는 낮에 공동묘지에 묻었다. 그날 밤에 공동묘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아들과 친한 사람의 개인 산에 다시 묘지를 썼다. 험하고 먼 산이라 상여를 운반하기도 엄청 어려운 길인데 낮과 밤에 두 번 장사를 해도 석천 사람들은 어느 누구 한 사람 작은 불편의 소리도 없었다.
종손부는 공동묘지에 그대로 모셨다. (후일 1990년경에 둘째 며느리 묘도 종손부묘도 그의 자식들이 명곡 선령 하로 이장했다.)
가정의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는지 셋째 아들은 지원해 징용을 가 반년쯤 있었는데, 큰아들의 안면으로 셋째 아들은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둘째 아들은 두 딸의 아버지인 33살의 나이로 열다섯살 아래 18세인 청송심씨(1926년생 울산군 청량면 신촌)와 결혼하였다.
그 시절에 나이 많은 신랑감을 선호했던 것은 나이든 신랑은 생명의 위협을 받는 징용과 징집을 면제받았기 때문에 상처한 사람도 호기가 되었다. 일단 시집을 간 처녀는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아 안심을 할 수 있던 때라 앞을 보지 못하거나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팔다리가 불편해 징용과 징병이 면제된다는 특혜로 좋은 색시 감을 구할 수가 있었다.
일본은 처음부터 승산 없는 전쟁에 국력을 낭비하여 이를 감당하기가 어려워지자, 짜도 짜도 나올 것이 없는 국민도 아닌 국민에게 자국민이라 세뇌하고, 허울좋은 애국이라는 이름 하에 언어도 빼앗고 갖은 공출 제도를 만들어 주곡, 잡곡, 솔가지 기름,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놋밥그릇 숯가락마저 집안 구석구석을 뒤지며 수탈해 가고, 호구지책을 위한 면의 급사마저도 성씨를 개명하지 않으면 국민이 아니라고 못하게 하고 모두 성씨개명을 촉구하였고, 인간 생명을 한갓 미생물로 취급하고 의료시험 기구로 사용하고, 정신대, 징집, 징용, 인간 공출도 행정 단위로 공공연하게 배정하여 충당하다 부족하면 참새 사냥하는 것보다 가볍게 길거리에 다니는 청춘남녀를 마구잡이로 끌고 갔다.
우리 땅을 멋대로 앗아가 국유화 내지 일본인들의 사유화하고 각종 유물을 도굴하고 빼앗아 가고 혼을 더 빨리 무참하게 강탈해 가는 연구기관을 만드는 등 수탈에 광분했다. 더 가관인 것은 진짜 우리 국민들의 상당수 식자층은 이들의 앞잡이가 되어 자신의 이익을 챙겼다. 각종 인허가와 앗아간 우리 토지를 일본에 협조한 대가로 얻다시피 불하 받은 토지로 잘 누리고 산 사람도 많았고, 그 자손들은 그 재산으로 지금도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은 전국적으로 부지기수다.
자신들이 하는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밤마다 애국시민 교육시킨답시고 졸음밖에 오지 않는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들을 어찌 그리도 자주 했는지 모르겠다. 공출 앞잡이들은 갖은 공출 대상을 공출 받아 일부 착취하고 나머지를 공출한 앞잡이도 많다. 명곡마을만 해도 당시 이장을 했던 모 분은 많은 양의 놋밥그릇을 모아 해방이 되어 그 많은 놋밥그릇을 차지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해방을 맞아 온 나라가 술렁거리고 지도자란 사람들은 애국한답시고 권력 투쟁으로 나라는 완전 갈 길을 잃고 의기 있는 많은 젊은이들은 우익이니 좌익이니 자기 패가 아니면 죽이는 것이 예사였다. 큰아들은 이제 우리 나라가 되었으니 나도 무엇인가 해야된다며 1945년 서른여섯살의 나이에 철도공작창에 간부로 재직한 할머니의 생질 소개로 공작창에 납품업을 하고 자녀 공부시키기 위하여 부산으로 가고, 석천마을 청년들 다수가 좌익세력에 가담하였다.
그때 셋째아들도 20대 중반기에 넘치는 혈기를 온통 좌익운동에 앞장 서 형이 아무리 달래고 말려도 듣지 않았고, 뒤에 안 일이지만 웅촌면 좌익간부를 맡아 경찰통신시설을 자주 파손하고 전주를 온통 다 베어낸 일도 있다고 한다. 경찰서에 들어가 경찰서 기물을 파괴하고 경찰 때리는 일을 예사로 했다고도 들었다.
셋째아들과 동갑내기인 제종손자도 동참한 것으로 아는데 어느 날 경찰이 와 셋째아들을 수갑을 채워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곳으로 잡아갔다. 동생 구제한다고 둘째아들은 농사일이고 뭐고 다 제쳐두고 나날이 어디로 가는지 다니기만 했다. 아들이 잡혀 간지 한 달이 지나 집으로 왔는데 완전 시체와 비길 바 없는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왔다. 왜 이렇게 되었냐고 물으니 뒤에 알게 된다 하고 내가 얼마나 훌륭한 큰일을 하는지 뒤에 보면 알게 된다는 소리만 했다.
할머니는 뒤에 안 일이지만 바로 빨갱이 간부가 할머니 아들이었다. 동생 구제한다고 농사일을 뒤로하고 다니던 둘째 아들은 큰아들과 의논하여 나날이 동생을 구제하기 위해 아는 사람이라는 사람들을 다 찾아다니며 돌아가는 사정을 묻기도 하고 사정을 했다고 한다. 집안에 경찰 간부가 있어 (경남도경에서 경찰에 봉직하다 공비들에게 살해되어 국가 유공자가 됨) 그분 힘으로 총살당할 것을 면하고 풀려났다고 한다.
동생이 풀려나고 둘째 아들은 이곳에 있다 동생은 빨갱이가 되어 이북으로 넘어 가든가 잡혀가 죽을 것이 뻔하다고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안달을 해 고향으로 갈 채비를 하는데 셋째 아들은 죽어도 여기서 죽는다 하며 가지 않으려고 때를 쓰기만 했다.
할머니는 둘째아들에게 백동에는 두고 온 토지도 일부 남아 있어 가는 것이 어떠냐고 하니, 명곡에 집안도 더 많고 외가도 있으니 명곡으로 가겠다 하며 그의 외삼촌이 배려하여 웅상초등학교 사택으로 사용하던 명곡리 966번지(지금은 7호국도에 편입되었다) 집을 세를 얻어 1948년 여름에 이사를 했고 외삼촌 땅을 일부 얻고(명곡리 938-4) 남의 땅 (명곡리 945)도지를 얻어 외삼촌 산과 부락 산에서 나무를 베어와 집을 짓기 시작했다.
만약 20년 넘게 산 석천에서 이런 행위를 했다면 맞아 죽었을 것이다. 집안과 외가가 어울려 사는 마을이라 온 지 한두 달 지나도 나무를 베어간다고 나무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우리 산에서 베어가라고 하는 이도 있었다. 아무렇게나 초가 삼간을 지어 흙도 채 마르기 전에 장판지도 바르지 않은 상태에 거적이를 펴고 동짓달에 이사를 했다.
이사 온 지 사흘만에 그 집에서 필자가 태어났다. 필자는 웅촌 석천에서 어머니 뱃속에서 4개월 정도 자라 명곡에서 태어났다.
1950년 6.25 동란이 일어나 우리 지역을 중심으로 한 부산과 동부 경남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 국토는 초토화가 되었다. 그래도 요행히우리 지역은 직접 폭격을 당한 지역은 아니었지만 피난민들의 처참한 생활과 한집 건너 전상자 가족이 생기고 한집에서 두세 사람이 군대에 가서 전사를 당한 집도 더러는 있고 군인, 민간인 할 것 없이 인명 손실이 500만 명이 훨씬 넘는 전쟁이었다. 남한도 북한도 상처만 남았고 죽어가면서도 전쟁은 왜 하는지,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죽어간 영혼들, 집도 잃고 팔다리와 육신의 일부를 잃은 상의 용사들은 할 짓 없어 동양아치가 되고 무수한 부모 잃은 고아들이 길거리를 헤매다 각설이가 되고 미군 차량에서 장난으로 던져주는 껌 한 자루에 죽을 힘을 다한 어린이들, 이를 즐기는 미군.
젊은이란 젊은이는 집집마다 전쟁에 끌려가고 장손도 고등학교 재학 중일 때였는데 같은 또래는 학도병으로나 군에 갔는데 군에 가지 않은 걸 보면 돈의 힘이 아니면 큰 힘을 쓰는 사람을 이용했을 것이라 추정된다. 그때 전쟁터에서 총에 맞아 죽어가면서 “빽이 없어서 죽어간다, 돈이 없어 죽어간다”고 했어 빽 아니면 돈하며 죽었다 한다.
공비도 경찰도 주민 괴롭히기는 같았다. 공비 출현했다고 신고를 하면 공비들이 죽일 사람 죽이고 잡아갈 사람 다 잡아가고 약탈할 것 다하고 산으로 간 뒤 구경하러 오는 식으로 지체하다 오는 게 경찰이고, 나이든 사람들은 후방에서 지역방어를 한답시고 보초를 서기 위하여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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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극수 시인 (현)양산문화원 이사 양산시 향토문화연구회 감사 웅상의 발자취 편집위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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