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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세기를 웅상에서 살다가신 이조기 할머니의 삶


웅상뉴스 기자 / jun28258@gmail.com입력 : 2017년 07월 24일
학성 이씨 시조 예(藝)의 16세손으로 명곡에서 1887년에 출생하여 1982년에 아흔여섯 살에 세상을 떠남. 할머니 성함은 이조기(李朝琪) 댁호는 홈실댁. 1901년 열 다섯 살 되던 해 이웃마을(백동마을) 울산박씨 늙은 총각 박시종(朴時淙) 26세 1876년생 1939년 세상 떠남, 당시 평균 결혼연령 20세 미만임)에게 시집을 갔다.

집안 내력은 명곡에 정착한 울산박씨 박지영(朴之榮)의 11세손으로 고조부님께서 1,700년경 백동에 이거해 살게 되었다. 명곡에 있는 집안은 삼종방 내외의 촌수였다.

그 시절 결혼은 당사자의 의사는 물어보는 일 조차도 없이 부모님과 대소가의 의사가 결정되면 당사자는 무조건 따라야 했다.

부모님이 울산박씨 가문의 총각을 선택한 것은 일곱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열 한 살에 어머니마저 여윈 찌들린 가난에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는 처지였지만 명문지가의 후손으로 그의 아버지는 탁월한 학문을 가지고 소시에 초시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충분한 자질을 가지고도 초시 이상의 과거 응시를 거부하고 청빈한 선비로서 일생 훈장 생활로 보내신 울산 고을선비 중에 선비셨기 때문이다.

지고한 선비의 후예라는 사실 하나로 뼈대 있는 가문의 값진 선택이라며 친정아버님은 항시 명예스럽게 생각하셨다.

남편은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기거할 데가 없어 큰집 종형댁에 일을 도우며 의탁하기도 하고 위로 네 분 계신 누님집도 전전하며 떠돌이 생활을 하다 오갈데가 마땅치 않아 추운 겨울날 들판 볏짚 볏가리에서 밤을 지낸 날도 많았다.

결혼할 때까지 남편은 남의 집 머슴살이를 16년 동안 했다.

어린 나이 때는 입치레하는 것도 눈치가 보여 힘에 겹도록 일을 하면서도 쫒겨나지 않는 것만 다행으로 알고 새경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열 살부터 열 두 살 까지는 밥만 얻어먹고 열세살 때 일년 새경으로 쌀 10되를 받았고, 열네살 때 새경은 20되를 받고 열다섯살 때 쌀 한 가마 새경을 얼마나 악착스럽게 일을 했는지 열일곱살 때부터 마을 최고 상새경을 받는 머슴들과 같은 새경을 받았다고 한다.

몇 년간은 가난한 선비이신 종형 생활비로 주고 몇 년간은 정(丁)씨 댁으로 시집간 누님댁에 맡겨 관리를 하여 얼마간의 땅도 사고, 집도 마련하고(백동 마을회관 북동쪽) 장가도 들었다.

남편은 당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철도 없어 떠돌이 생활로 당신 어머니가 남기고 가신 화롯불은 지키지 못한 것이 너무 죄스럽다 하시며, 물려준 화롯불은 할머니로부터 받은 화롯불이며 할머니는 그 위에 선조들로부터 받은 불이라며 어머니가 주신 불은 살리지 못했지만 큰댁(종형댁)에 가면 할머니가 주신 불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며
큰집에 가 종형수가 신주 모시듯 관리하는 화롯불을 분양 받았다. 일생 살아 숨쉬는 순간까지 한순간도 꺼트리지 말고 살려 며느리에게 물려줘야 된다는 종형수의 당부 말씀을 듣고 세상 떠나는 순간까지 한순간도 화롯불을 꺼트린 일이 없다.

지금은 화롯불은커녕 화로마저 어디로 갔는지 안타까운 일이다.

그 시대의 불은 부싯돌을 이용하여 불을 얻었고 1920년경부터 일반민가에서 성냥불을 이용했다. 그후 기름 라이터, 가스라이터로 불씨를 만들었다.

할머니께서는 소죽 끓이는 불이나 밥을 해먹는 불이나 단 한 개비 성냥를 그어본 일 없이 화롯불의 불씨로서 불을 만들었다.

불이나 물이나 모든 사물이 하늘이 내린 것이기에 경제적 값어치로 다스리는 것이 아닌 하늘의 뜻으로 다스렸다.

남편은 머슴살이 22년을 채운다고 결혼하여 머슴살이를 6년간을 더하고 생활도 그런 대로 안정이 되고 아들 셋을 낳고 딸을 낳았다. 첫 아들은 결혼한 지 8년이 지난 후에 보고(1909년생) 둘째 아들 (1911년생)의 터울은 두 살 터울이고,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1920년생)은 아홉 살 터울, 그 밑에 딸(1922년생)은 2살 터울이었다.

선비의 자식으로 생활이 어려워 학문을 닦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자식에게만은 공부를 시키고자 두 아들을 서당에 보냈는데 두 아들 다 머리가 영리한지 공부하는 속도가 다른 집 아이들을 훨씬 앞지른다고 해 참 듣기가 좋았는데 가까운 집안 서당 훈장의 아들이 할머니 큰아들보다 한 살 아래고 작은아들보다 한 살 더 먹는데 큰아들이 자주 훈장의 아들에게 맞곤 했다. 형이 맞을 때마다 작은아들은 훈장 아들이 문밖으로 나오기를 숨어 기다리다 문밖에 나오기만 하면 멀리 끌고 나와 형이 맞은 몇 배를 때렸다.

훈장댁에서는 작은아들을 그렇게 타이르고 했지만 듣지도 않고 집에서는 서당에 간다고 하고 서당에는 가지 않고 개울이나 들과 산에서 놀다 서당 끝날 시간이면 집에 왔다. 둘째아들은 아무리 졸라도 서당은 가지 않고 일만 열심히 하게되고 큰아들은 서당 공부를 하다 더 많은 학문을 얻기 위하여 통도사 부설 통도중학교에 보내 공부를 시켰다.

수업료는 얼마였는지 알 수 없지만 남편은 아들 수업료로 통도사에 쌀을 바쳤는데 매달 간격으로 쌀 한 가마니(80kg)를 지고 백동에서 천성산을 넘어 통도사까지 지고 갔다. 빈몸으로 가기도 멀고 험한 태산준령을 무거운 짐을 지고 가기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몸의 힘으로 간것이 아니라 사랑의 힘으로 간 것이었을 것이다.

수업도중 큰아들은 (열일곱살 때 1925년) 한마을에 사는 한 살 위인 고령김씨 규수(1908년생)을 아내로 맞아 결혼을 하였다. 며느리는 마을 안동네 사람이라 하여 안동댁이란 댁호로 불렀다.

먹을 것 먹지 않고, 입을 것 입지 않고, 쓸 것 쓰지 않고 살아 당시 일정한 이상의 재산을 가진 사람만이 될 수 있는 유권자가 웅상면 전체에 30명 정도 되었다고 하는데 할아버지께서는 유권자가 될 수 있을 정도의 토지를 소유한 자경농가가 되었다.(이 부분은 할머니 말씀에 의하여 받아 적은 내용이라 필자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다.)

큰아들은 결혼한 그 이듬해(1926년) 경마장에서 경마 투기를 해 재산 전체와 맞먹는 엄청난 돈을 다 잃어버리고 집에 오기가 민망했던지 집에 오지 못하고 명곡 외가댁에 머물고 있어 남편은 아들이 행한 모든 행위의 소문을 듣고 가족들을 불러모아 (당시 남편은 50세, 할머니 39세, 둘째아들 16세, 셋째아들 7세, 딸 5세) 자초지종의 이야기를 하고 절대 원망하거나 욕하거나 하지 말라며

신신당부를 하고 처가댁에 있는 아들을 배웅하러가니, 아들의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고 큰일하라고 큰선비 되라고 천성산 고복 태산을 가쁜 숨을 쉬고 그 먼길을 쌀가마니를 지고 날랐는데 그 깐 작은 살림 좀 축냈다고 남자가 눈물이라니 남자가 눈물 흘려야 될 때는 국가가 위태로울 때와 부모가 세상 버린 때다. 살림 잃은 것에 대하여는 하나도 억울할 것이 없는데 너 인상이 대범하지 못한 것 이 억울하다 하시며 한마디 꾸중 않으시고 살림을 정리하고 진 빚을 다 갚아 주시고 일생동안 그 일을 단 한번도 재론하지 않으셨다 한다.

가세가 기울어 살아갈 방안에 갈등하던 중 잘 아는 어느 분의 연고로 웅촌면 석천에 소작할 논이 있어 아들딸을 데리고 1927년경 이사를 하여 20여년을 살았다. 석천에 간지 일년 지난 후에 혼자된 질부와 여덟살된 그의 아들(종손자)과 같이 석천으로 왔다. 학성이씨(서면파)집성촌이며 그들의 본향이라는
자긍심을 가진 그들의 세도에 서러움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둘째아들은 웅상 주남 월성이씨가의 규수(1916년생)를 맞고 셋째 아들은 온양 동상에 오씨댁의 규수(1926년생)를 맞고 딸은 통천 김녕김씨 댁으로 시집을 갔다.

생계가 어려워 생계를 꾸릴 목적으로 왔지만 서러운 말을 다하지 못할 정도였다.

울산 고을을 여신 분은 울산박씨 시조 장무공이신데 주인을 뒤로하고 객인이 주인 노릇을 한다며 절대 기죽지 말라 하고 자식들에게 학문으로 아니면 힘으로라도 재압을 해야한다고 주입을 시켜 근동 마을에서 학문으로서는 또래 선비중에서 큰아들은 누구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았고,

둘째아들은 농사일에서나 길흉사시 하는 일에 근동에서 가장 으뜸이었고, 셋째 아들은 체구도 왜소하면서 웅촌 씨름대회에 나가면 항시 우승 아니면 준우승을 년년세세로 했다. 종손자는 모래가마니 오래들고 있기 대회 우승을 했다.

딸은 너무나 예쁜 미인이었다. 큰아들은 선비에다 풍류기가 많아 나날이 풍류를 즐겼다. 관리로 나아갈 것을 주변에서 권유했지만 나라 없는 나라에 관리로 나아간다는 것은 나라를 빼앗아 간 강도들에게 우리 백성들의 살을 더 깊게 베라고 칼을 갈아주는 일이라 하며 관리로 나아가지 않는 것은 할아버지 뜻을 그대로 물려받은 자세다.

둘째아들은 시태바리를 가도 가장 먼저 가장 훤칠한 나무동, 풀동을 해 날랐고, 농삿일도 남보기에 수월하면서 능률을 제일 많이 올렸다.
↑↑ 박극수
시인
(현)양산문화원 이사
양산시 향토문화연구회 감사
웅상의 발자취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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