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상의 역사를 말하다(37)-1부
평범한 이웃 아줌마의 생활모습 신혼의 달콤함은 커녕 빨리 늙어 죽어 버리는 것이 그때의 가장 큰 소망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7년 05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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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번 이야기는 필자의 이웃에 사는 현재 60중반 된 평범하게 열심히 사는 주부의 생활모습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1995년경 농업기술센터에서 주관하는 농촌주부생활수기쓰기대회에 출품하여 최우수상을 수상한 분의 작품을 양해를 구하고 싣는다.
출품한 작품을 그대로 싣는 것은 양해를 받았으나 이름은 거명하지 않기로 약속하여 이름은 거명하지 않는다.
그분의 삶을 소개하는 것은 비슷한 시기의 가난한 농촌 가정의 주부 생활이 엇비슷하여 시대상황을 소개하고자 함이다. 지금부터 그분이 쓴 수기를 옮긴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모습을 뒤돌아보니 생활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기 위함보다는 가족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발버둥이었던 것 같다. 나만 유독 그렇게 살아온 것이 아니라 가난한 우리 농촌 아낙들의 보편적인 삶의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일 것이다.
1974년 스물셋의 꽃다운 나이에 시집온 나에게 신혼의 달콤함은 커녕 빨리 늙어 죽어 버리는 것이 그때의 가장 큰 소망이었다. 잠자리에 들때면 오늘 이 밤의 잠이 내일 아침 없는 잠이 되어 버린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거친 음식을 먹는 것은 두고라도 하루세끼의 식사를 가족들에게 제공할 수 없는 현실이 죽음보다도 더 두려웠다.
농촌에서 자라긴 했어도 부모님 덕분에 처녀시절 호미자루 한 번 잡아본 적 없는 내가 농촌에서 해야 하는 어떤 일도 다해야 하는 고달픈 현실은 체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상상조차 못할 일이다.
농촌 사정을 잘 모르는 도시사람들이 촌에 가서 농사나 짓지 이런 말을 할 때 면 농촌은 인생 패배자들의 집합소인가 농민들 모독하는 말로 들렸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끼니를 잊지 못한다는 긴박감에 기운도 차릴 수 없을 만큼 심한 노동에 시달려야 하는 처지라 생각된다. 남편도 착하고 성실하긴 하지만 농촌일 못하기로는 나 못지않고 이런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결혼하던 그달에 아기가 들어서 더욱 고통스러웠다.
배가 불러 뒤뚱거리며 누구도 경작하지 않는 버려진 산답을 소작을 얻어 농사 짓던 모습을 회상해 보면 아찔하기까지 하다. 농기계도 없었지만 있다 해도 사용 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도가리에 논두렁 높이는 두 길 이상이나 되는 곳도 있어 구석구석 소도 들어 갈 수 없는 그런 논에 농사를 지으니 평지의 논보다 인력이 다섯 배도 더 소모되었다. 노예생활보다 더 고된 노동이었다. 더 기가 찬 일은 해마다 농사 수확으로 가계생활이 안되어 해마다 장이 쌀로 충당하다보니 시집오기 전에 누적된 장이쌀 이자 감당하기도 한해 농사 수확 전량으로도 부족한 처지였다.
오랜 병고에 시달리시는 시부모님의 약값과 시동생들의 학비 감당하기가 벅차 먹는 식량마저 절약하기 위해 쑥밥 시래기밥 무밥 잡곡과 보리밥으로 밥을 해먹고 수제비 죽같은 별난 음식도 자주 해먹었다.
빈터란 빈터마다 갖은 채소를 가꾸어 시아버지께서는 극구 반대하시며 말리셨지만 시집온지 반년도 안된 새색시가 임신 5개월 된 몸으로 서창장까지 2km 넘는 길을 리어커에 채소를 가득 싣고 끌고가 팔기 시작한 것이 15년 넘게 5일장을 찾는 장돌뱅이 생활을 했다.
리어커에 싣고 가는 시장꺼리는 량도 얼마 싣고 가지 못하고 시간도 오래 걸리고 힘도 들어 농사짓기 위해 구입한 경운기로 서창장 송정리장 오시게장 울산장까지 새벽 3시 4시에 일어나 끌고가 장사를 하다 밤 10시가 넘어 집에 오는 날도 많았다.
경운기로 시장꺼리를 운반하기 시작한 때는 남편이 운반해주다 남편이 농사일이 겹쳐 시간이 맞지 않을때는 경운기를 직접 몰고 가기도 한 것이 웅상에서는 여자로서는 가장 먼저 경운기 운전을 하게 되었다. 같은 마을에서 결혼한 처지라 서창 시장에 온 사람들은 대다수 아는 사람들이고 특히 친구들은 배가 불룩해 시장통에서 채소를 팔고 있는 모습이 처량해 보였는지 노골적으로 너 처지가 외 이토록 불쌍한 처지가 되었노 하며 그토록 가난한 집인줄 알면서 그댁에 시집을 갔노 하며 동정인지 질책인지 원망인지 분별할 수 없는 닦달을 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시장통에서 부끄럽다는 생각을 단 한순간도 해본 일이 없었다.
비록 가난하지만 어진 시부모님 모시고 착하고 근실한 남편에 착한 시누이 시동생들 거느리고 사는데 내 처지가 어때서 가난은 면하면 되는 것이다.
삶을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도 시간이 한가한 순간이고 시장통에서는 가지고 온 물건 빨리 다 팔아야지 하는 조급함 때문에 다른 생각할 겨룰도 없었다. 가난이 자랑스러운 일도 아니지만 부끄러운 일도 아니다.
가난하고 싶어 가난하나 그토록 열심히 사는 남편이 있고 나 역시 열심히 사는데 우리 가정도 다른 사람들에게 빌리지 않고 살날이 올 것이라는 꿈이 있었기에 고난을 잘 인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빈터마다 채소를 가꾸어 시장에 내다 팔기도 힘에 벅찬 터에 산답을 만평 넘게 경작하였던 것은 어떤 사명감에서도 아니고 농촌운동가적인 자세도 아니며 가족을 굶길 수는 없기에 연명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다.
시집올 당시 시부모님 내외분이 살아계셨는데 두분이 오랜 병고에 시달리고 계시다가 시집온 후 다섯달 만에 어머님이 별세하시고 아버님은 어머님이 가신 후 1년 뒤 따라 가셨다.
형제자매는 4남4녀로 남편 위로 시누이 두 분이 시집을 가시고 아래로 시누이 두 사람과 시동생 세 사람이었다. 남편 바로 밑에 시누이가 여덟살 차이가 나고 막내 시동생은 남편과 스물두살 차이였으며, 시어머니 돌아가실 때 막내시동생의 나이는 다섯 살이었고 시동생들의 터울이 세 살 네 살 터울이었다.
우리 부부가 낳은 자녀들과 보육원을 방불케 했다. 방학때가 되면 방학 시작하는 날부터 방학 끝나는 날까지 시집간 시누이들의 자녀인 생질들이 가난한 외가댁이 좋았는지 몰려와 초가삼간에서 아수라장이 되었다. 가족 중 우리부부이외는 누구도 농사일을 할 만한 사람은 없었고 철없는 내가 며느리, 아내 역할 뿐만 아니라 형수, 올케 나아가서 어린 시동생들의 엄마노릇을 해야 했다. 시집 온지 2~3년 까지 목욕탕에 갈 때에도 어린 시동생 두 사람은 여탕에 같이 데리고 들어갔다.
이토록 피곤한 와중에도 애기를 낳고 한달이 지나고 나면 생리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인위적으로 임신을 조절하지 않았다면 1년 터울로 열명은 낳았을 것이다. 큰애 낳은 지 3년 터울로 조정하여 둘째를 낳았다. 애기를 돌보아줄 사람도 없고 일은 많아 해도해도 밀리는 처지라 삼칠도 지나지 않은 때부터 애기를 날마다 허허 벌판 원두막에 눕혀놓고 채소를 가꾸고 시장꺼리를 준비했고 시장에 업고가서 장꺼리를 팔았다.
태어난지 8개월 된 어느날 밤 열이 펄펄나고 혼수상태라 밤중에 택시를 불러 부산침례병원에 가니 큰병원으로 가라 하기에 초량 성분도 병원에 입원하여 일주일간 혼수상태로 헤매다 하늘나라로 가 버렸다.
남편은 헛소리까지 하며 밤중에 애기 찾으러 간다며 뛰어나가기도 하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잠도 자지 않고 밥도 제대로 먹지 않아 내 슬픔 감당하기도 어려운 처지에 독한 마음을 먹지 않으면 남편이 넘어질 것 같아 남편을 위로하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고 욱박지르기도 하는 등 온갖 짓을 하며 간신히 나날을 살아갔다. 세월이 약이라더니 남편도 정신을 차리고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멍청하게 먼 하늘만 바라보는 순간이 많아 너무 가슴이 아팠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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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극수 시인 (현)양산문화원 이사 양산시 향토문화연구회 감사 웅상의 발자취 편집위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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