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상의 역사를 말하다(32)-2부
일본 징용으로 인해 상처받은 주남 이재진의 모 김해김씨 삶의 이야기(2부) 그 당시 어머니들은 자식들 먹여살리기 위해 힘겨운 노동도 마다하지 않아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6년 12월 14일
이재진 모친은 행동거지도 낮추고 또 낮추고 언어도 웃음도 헤프게 하지 말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죽는 그날까지 다짐하고 다짐했다. 남편과 결혼한 횟수는 4년이 되었지만 징용 간 2년을 빼면 한 지붕 밑에 같이 생활한 횟수는 2년밖에 되지 않았다.
“언제라도 내가 죽어 남편을 만나더라도 부끄럽지 않은 아내가 되어야지. 가는 사람도 가고 싶어 갔겠나. 하늘이 가자고 하니 가는 수 밖에 없는 일 아니겠는가.
내가 가정을 충실하게 이끌어 가지 못한다면 남편의 마음이 편지 못해 어찌 저승을 가겠는가. 구천을 떠도는 객귀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를 악물고 살자”고 그녀는 다짐을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가난한 집에 시부모님 모시고 시동생 두 사람 시누이 두 사람에 어질다 해도 시가 식구들은 주눅 들고 어려운 상대다. 부지런을 떨지 않고 아끼고 절약하지 않으면 안될 처지라 억척스럽게 생활하고 궁핍하다고 할 정도로 절약을 해 시동생과 시누이는 결혼을 시켰고 시부모님 장례식을 치르고 아들은 웅촌면 중대 경주 김씨 댁의 규수와 결혼을 했다.
아들도 착하지만 며느리도 착해 억척스럽게 사는 그녀의 모습을 탓하지 않고 잘 따라 주었다. 세월이 변한 탓도 있지만 억척스럽게 살아서인지 남에게 빌리러 가지 않을 정도의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남편을 일찍 보내고 나니 세상에 무엇이 소중하다해도 사람만큼 소중한 것이 없음이 절실해 아들 며느리에게 자식은 사람 뜻으로 조절하지 말고 하늘의 뜻에 맡겨달라고 당부했더니 고맙게도 2남 3녀의 귀한 손자손녀를 안겨주었다.
"앞을 보아도 좋고 뒤를 보아도 좋고 생각만 해도 좋은 내 새끼들 저것들 시집장가 다 가는 것 보고 죽어야지' 하는 욕심도 가져보았지만 그게 어디 사람 뜻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70을 넘기고 오늘 저녁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다.
단지 걱정스러운 일은 22세에 혼자되어 50년을 넘게 살아 그 긴 세월동안 변한 그녀의 모습을 가지고 26세에 세상 떠난 남편을 만나면 나를 몰라보면 어찌할까 걱정되어 내 죽으면 예쁘게 분단장하여 입관하라"고 시켰다. 74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이재진의 모친은 말했다.
청춘에 미망인이 되신 분들은 대다수 억척스러움이 지나쳐 속된 표현으로 독하다는 평을 받는게 보편적인 모습이다. 타고난 성품이 표독스러워 그런 모습이 아니라 생존본능이 발동하여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다.
지금은 지능으로 세상을 살아 갈 수 있는 방법이 많아 여자들도 좋은 직장에 높은 위치에 있는 분들을 너무 쉽게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당시엔 남자도 그랬지만 여자는 더욱 직장을 구할 자리가 없었고 오로지 농사짓는 일밖에 할일이 없었다. 농사일은 모든 일들이 힘겨운 노동이라 처음부터 끝까지 있는 힘을 다해야 하는 일이다.
그 당시 농촌 여인들의 품삯은 남자들의 절반 밖에 되지 않았다. 하루 남자 품삯은 쌀 1되, 여자는 보리쌀 1되였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평소 아무리 힘센 여인이라 해도 약한 남자 힘에 미치지 못했다. 지게질, 삽질, 쟁기질 등은 남자들이 하는 일로 분류되고 여성들은 하지 못하는 일로 되어 있었다. 남자가 없는 집에서는 일일이 놉을 할 수가 없어 혼자된 여성들 중에는 스스로 해결하고자 하는 분들도 있었다. 행여 자식들을 굶어죽이지나 않을까 하는 강박관념이 짓눌려 강할 수밖에 없었다.
이재진의 모친은 누가 보아도 보편적 미망인의 처지보다 훨씬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 같은데 내심으로는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몰라도 언제 어느 때 보아도 항시 다정다감한 웃는 얼굴로 정이 넘치는 억양으로 대해 주셨다.
필자가 기억하기로 웅상에서 사람을 만나 가장 다정다감하게 대하는 분은 주남에 세 분이 계셨다. 아산장씨 댁에 출입한 장래규의 모친(학성이씨 부인) 학성이씨 댁에 출입한 이창언의 모친(울산박씨 부인) 경주이씨 댁에 출입한 이재진의 모친(김해김씨 부인) 이분들은 필자와 친밀한 관계를 가진 분들이기도 하지만 만날 때마다 한결 같이 가식이 전혀 없는 모습에 진실되게 몸과 마음을 다해 인사를 해주신 분들이다 만날 때만이 그런 모습이 아니라 전화상으로 통화할 때도 정감어린 억양으로 대해주셨다. 이런 모습의 품성은 순간적인 다짐으로 나타나는 모습이 아니라 평생을 다듬고 가꾸어온 품성이다.
이재진은 필자의 외가 집안 형이기도 하고 외가 바로 이웃사촌이다. 집안을 불문하고 외가댁과 절친하게 지내는 사이다. 이런 관계도 있지만 같이 농사를 열심히 짓는 동지적 입장도 있다. 농사기술 정보교환도 하고 같은 어려운 처지에 처해 열심히 산다는 동질감 때문인지 옛날부터 절친하게 지내는 사이가 되어 지금까지 좋은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
당신 자식과 친한 사이라는 관계 때문인지 유독 필자에게 정을 많이 주셨다. 필자는 웅상농협 조합장 재직 시 서창 장날이면 날마다 장 전체를 다 돌아보았다. 이분 역시 밭에서 직접 가꾼 농작물을 장날마다 팔러 나오셨다. 장에 오실 때마다 우리 집에 보낼 채소를 정성을 다해 깔끔하게 다듬어 별도도 가져오셔서 쥐어주셨다.
“우리 집에도 농사짓는데 채소 많이 있습니다.” 하면 “그 채소하고 이 채소하고 다르다. 이 채소는 나의 정이 담겨있는 채소다 정으로 받으라”하시면 불청을 할 수 없어 주는 대로 받아왔다. 그토록 정이 많으신 분이었다.
이재진과 필자는 20대에 농촌지도자 연합회에 가입했다. 당시는 회의 명칭이 영농기술자연합회라 했다. 필자는 20대 후반에 웅상농협 감사로 선출되고 30대 중반에 조합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과정에 가장 큰 힘이 되어준 분들은 농촌지도자회 회원들이었다. 필자는 당시 농촌지도자회 웅상회장을 맡아 있었다. 조합장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도 농촌지도자 회원들의 성원이 크게 있었다.
한 가지만 간단하게 소개하면 웅상농협 본소부지 매입 시의 일이다. 당시 본소 사무실은 서창 시장통에 있었다. 대지는 78평으로 기억된다. 조합장 취임 이전부터 구상해온 일이기도 하였고 그곳에서는 장래 농협이 있을 곳은 못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이전 부지를 은밀하게 물색하던 중 현 본소 사무실 도로에서 진입하는 부분 약 80평과 당시 교회부지였던 약 500평을 매입할 준비를 하고 임원들을 개별 면담하여 부지 매입에 동의해 줄 것을 합의하고 회의를 소집하여 상정하였음에도 부결되었다. 그것도 1차가 아닌 2차 부결이 되었다.
강력하게 부결 분위기로 몰아간 임원은 조합장 경선에서 낙선한 두분이었다. 조합장 경선에 낙선한 분들과 협력을 구하기 위하여 필자가 임원이 되도록 한 것인데 부결 사유는 고정자산 투자가 무리하다는 이유였다.
반대 논리는 그럴싸했지만 내심의 진심은 조합장이 조합운영을 잘 하는 것 같아 이를 방해하기 위한 짓거리였다. 임원회의 부결된 사안을 총회에 상정한다는 절차는 정상적인 절차가 아니었지만 대의원 총회를 소집하여 결의 받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긴급 총회소집을 통지하고 농촌지도자회 중심멤버였고 농협대의원이었던 고상길, 이재진, 김효성 등과 사전 모임을 해 부지 매입 절대 필요성을 설명하고 가결 찬성 분위기 조성을 분담하여 책임 하도록 하여(대의원 중 지도자회원들이 많았음)총회 가결을 받아 매입하였다. 매입즉시 본소 건물을 준공하여 이전 한 후 서창시장 부지를 처분하니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여 본소부지 매입비 80%이상이 되었다. 과정상 이야기 거리는 너무 많지만 지면관계로 차후하기로 한다. |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6년 12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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