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상의 역사를 말하다(32)
일본 징용으로 인해 상처받은 주남 이재진의 모 김해김씨 삶의 이야기(1부) 결혼하자마자 끌려간 남편, 해방 후 돌아왔지만 26세의 젊은 나이로 죽어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6년 11월 24일
|  | | ⓒ 웅상뉴스(웅상신문) | | 본 이야기는 필자가 이재진의 어머니가 생존 시 직접 하신 말씀을 듣고 삶의 모습을 보아 온 이야기를 더듬어 적은 것이다.
주남 이재진 모는 웅상면 북부마을 김해김씨 가문에서 1남 3녀중 첫째로 1927년 음력 3월 17일 태어나 일본인들이 정신대와 징용모집 하느라 혈안이 된 시기인 1943년 18세 때 주남 경주이씨댁 가문의 3남 2녀 중 장남인 22세 총각을 배필로 맞아 결혼했다.
결혼한 후 한달도 채 못 된 어느 날 남편은 일본 징용으로 끌려갔고 2년이 지난 후 해방을 맞이했을 때 돌아왔다. 시집온 새색시가 남편 없는 시가에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시동생 두 사람과 시누이 두 사람과 더불어 사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시절에는 마을 부자집 몇집을 제외하고는 집집이 다 어려운 처지였지만 그 중에서도 유독 어려운 처지의 가정사를 이끌어 가는 것은 죽을 수도 없고 죽지 못해 사는 것이었다. 시가 식구들 하루삼시세끼 끼니 챙기는 일도 예삿일이 아니었다.
세월이 바로 가는지 거꾸로 가는지 모르면서 시집살이란 본래 이런 것이구나 하고 체념하고 사니 자신의 처지가 어려운 처지인지 불행한 처지인지도 누구와 비교해 볼 겨를도 없이 살았다.
그녀는 시집올 때 친정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을 되뇌이며 살았다. ‘여자는 시집가면 죽어도 시댁 귀신이 되어야하고 살아도 시댁이 자기 집이다 생각해야 한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움이 닥쳐도 참는 것 말고는 아무 방법이 없다. 내가 너에게 해준 것은 낳아 성하나 타준 일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잘 먹이지도 입히지도 못하고 잘 가르치지 못하고 학교문전에도 보내지 못했고 소가 아플 때면 약도 지어오고 수의사를 부른 적이 있지만 너희들이 병치례를 할 땐 병원 한번 데리고 가지 않고 크면 크고 말라면 말라 하고 키웠음에도 생명부지하고 이날까지 살아주어 고맙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지만 시집간 이후부터는 전적 잘 살고 못살고 하는 것은 네가 타고난 분복이고 시가에서 사랑받고 사랑받지 못함은 네 할 탓이다. 어찌 되었든 가문 욕되지 않게 살아라.’ 딸을 시집보내는 심정이 어떠한지 사랑이 있는지 감정이 있는지 없는지 아무런 감정도 없는 모습으로 한 말씀이 전부였다.
그 시절 농촌 주부들의 하루 일과는 집집마다 대동소이 했다. 그녀라고 별다르지 않았지만 시집 온지 얼마 안 된 새색시는 마음에 부담이 더 되었을 것은 뻔한 일이다.
철따라 다소 다르긴 해도 1년 똑같이 반복된 일은 새벽 첫 닭이 울기 전 일어나는 것 이었다. 시계가 없어 시간을 알 수 없었지만 대충 짐작해 보면 3시 정도는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일어나자마자 해야 하는 일은 끼니 꺼리가 부족해 밥에 넣어 양을 부풀릴 거리를 장만해야 한다. 시래기, 무, 쑥, 나물 등을 다듬고 썰어야 하는 시간이 한 시간 이상 소요된다. 가족들이 마실 물, 설거지물, 세숫물, 소죽물 모두 먼 우물에서 길러 사용했다. 물동이에 담아 이고 적게는 10동이, 많을 때는 20동이 이상을 길러 와야 했다. 이에 소요되는 시간도 1~2시간 된다.
보리쌀을 한번 푹 삶아 다시 쌀과 같이 밥을 한다. 지금 보리쌀은 쌀에 없는 영양 보충한다고 보리쌀을 밥에 넣지만 그 시절 보리쌀은 밥의 주 원료였고 가정 사정에 따라 다르지만 그녀의 집 밥은 쌀은 거짓꼴로 조금만 넣어 밥을 했다. 쌀을 넣는 것도 어른들 밥그릇에 담기 위한 것이었고 일반 가족들은 전부 보리쌀과 시래기, 무, 쑥밥이다.
보리쌀을 쌀과 같이 밥을 하기 전에 미리 한번 삶지 않으면 밥이 억세서 먹을 수가 없어 한번 푹 깊이 삶은 보리쌀을 쌀과 같이 넣어 밥을 했다. 보리쌀 삶고 밥하는 시간도 만만찮게 걸렸다.
먼동이 트면 채소밭에 가 부추라도 베어오고 상추라도 뜯고 호박잎과 고추라도 따와 찬을 장만해야 한다. 밭에 갈 때면 그저 갈 수도 없다. 오줌동이에 받은 오줌이라도 이고 가 채소밭에 뿌리고 풀이라도 뽑고 와야 한다. 밥 때가 늦을까 허겁지겁 챙겨 가족들 밥상 들어 놓는다. 밥상 차리는 것도 밥상마다 다르다.
어른들 밥상에는 밥 색깔도 다르고 찬도 다르다. 밥 때에는 가족들이 숭늉 달라 뭐 달라 심부름하다보면 밥을 먹었는지 말았는지 모르고 끼니때가 지나간다. 설거지를 대충하고 남자들 따라 들일을 나가 같이 하고 점심때 저녁때 같이 들어와 끼니 준비를 해야 한다. 남자들의 생각은 집에 들어오면 우렁 각시가 밥상을 차려 놓는 걸로 아는지 배고프다 밥 빨리 안주고 뭐하냐며 불호령이다.
저녁을 먹고 나면 빨래도 해야하고 길쌈도 하고 해어진 옷가지를 꿰매어야하고 이불 홑청도 꿰매어야한다. 밤마다 자정 가까운 시간이 되어야만 잠자리에 들 수 있다. 가족들이 다 잠들고 난 이후 아무도 몰래 장독에 정한수를 올려놓고 징용 간 남편이 무사하길 날마다 빌었다.
낮에는 일에 쫓겨 몸이 고단한지 아픈지도 느끼지 못하다 막상 잠자리에 들면 만신이 아프지 않는 곳이 없다. 만신이 아프고 쑤셔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이보다 훨씬 더 고달프고 더 아파도 참을 수 있다. 제발 징용 간 남편만 무사할 수 있다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징용간 사람들의 징용생활 이야기를 들으니 땅속 십리길 들어간 굴속에서 석탄 캐느라 고되기가 말로 형언할 수 없고 황천길 가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난다고 했다. 그녀는 마음이 혼란스럽고 불편하면 행여 마음이 남편에게 전달되어 남편 마음이 편치 못할까 걱정되어 마음으로도 불평하는 일을 삼가 하자하며 나날이 보냈다.
남편은 징용간 지 2년이 지난 후 해방이 되고 나서 돌아왔다. 징용살이가 얼마나 고달팠던지 삶아 놓은 시래기 같았다. 남편은 가족들이 마음 아플까 징용살이 고되지 않았나 물으면 다른 사람들도 다 하는데 나라고 못했겠냐 하는 게 대답 전부였다. 다른 사람을 통해 들은 이야기이지만 주는 밥도 너무 험하고 양도 부족하고 노동은 너무 고되게 시켰다한다고 했다. 밥은 고양이밥을 주고 황소 일을 시킨 것이다. 영양실조와 과로로 죽어가는 사람도 수없이 많고 광산 안전시설이 너무 허술하여 사고사로 죽는 사람도 너무 많았다 한다.
일본인들은 징용 온 한국 사람들을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하며 하찮은 도구 취급 했다고 한다. 채찍 가하는 일은 그들의 유희인 양 했다고 하니 천인공노한 일을 일본인들이 지행한 것이다. 얼마나 불쌍하고 억울한 일인가 징용으로 인해 깊은 골병이 들어 은신하기조차 버거워하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양 하는 남편이 안쓰럽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존경스럽기도 했다. 징용가기 전 그토록 팔팔한 모습은 어디가고 시름시름하면서도 들에 나가 일도 열심히 하고 가정에서도 남편의 도리를 다하고자 안간힘을 쏟는 모습이 평생 살면서 가슴이 미어지게 아프게 했다.
그녀 부부가 낳은 자식, 오로지 하나뿐인 재진이를 낳은 지(1947년 음력 9월 26일) 4개월이 지난 1948년 음력 2월 15일 날 26세의 나이로 남편은 세상을 하직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나니 시집올 때 친정아버지 말씀이 생각났다. ‘잘 살고 못살고 내 분복 탓이다.
내가 복이 없어 시어른의 젊디젊은 자식이 어른들 보다 먼저가고 어린 동생들은 형, 오빠를 잃고 어린 자식은 아버지 얼굴도 모를 때 아버지를 잃은 자식이 되었다. 모든 게 내 박복한 탓으로 일어난 일이다 죄가 있다면 모든 게 내 죄다. 지금부터 중죄인이 되어 평생 죄를 용서받는 마음으로 살자는 다짐을 날이면 날마다 하며 살자’하면서 살았다. <다음호 2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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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극수 시인 (현)양산문화원 이사 양산시 향토문화연구회 감사 웅상의 발자취 편집위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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