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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상의 역사를 말하다(30)

휴전(1953.7.27)직후 웅상의 초등학교 교육환경
박극수
시인
(현)양산문화원 이사
양산시 향토문화연구회 감사
웅상의 발자취 편집위원장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6년 09월 23일
지금의 우리나라 고령층들은 반만년 역사동안 가난과 무지를 어쩔 수 없는 체념으로 대대로 물려받은 세계교육 선진국으로 변화시킨 세대로, 해방 전후에 태어난 세대들이다.

1949년 12월 31일 교육법이 제정되어 초등학교 의무 교육을 실시하게 됨으로 해방 이후 세대들은 초등학교라도 가야하는 게 의무가 되다보니 대다수 초등학교 교육의 수혜를 받을 수 있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교육의 필요성을 알게 되고 자신들은 대다수 초등교육밖에 받지 못해도 자녀들에게는 악전고투를 무릅쓰고 교육의 뒷바라지를 해 최고의 학력자들로 만들어냈다.

의무교육이 법으로 제정되어 교육수혜자들의 학비부담이 많이 줄어들긴 했어도 입에 풀칠하기가 어려운 처지에 있는 국민이 많아 책값, 학용품값, 기성회비, 육성회비, 매달 납부해야하는 월사금 등 개인적으로 부담해야하는 금액을 감당하지 못해 취학을 하지 못하는 자녀들이 많았고 초등학교 입학을 했다가 중도에 중퇴하는 자녀들도 있었다. 필자 또래가 휴전 직후 초등학교 입학한 세대라 필자의 초등학교 시절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모교의 학적부를 참고하면 입학 때부터 졸업 때까지 정확하게 기록할 수 있지만 기록보다 기억을 더듬어 적는 이야기가 더 실감날 것 같아 어느 누구의 기억도 빌리지 않고 필자 혼자의 기억을 더듬어 적는다.

입학 때 한 반이 입학했는데 인원은 기억할 수 없고 졸업 때 인원을 더듬어 보니 6년 동안 한반 그대로 남학생 32명, 여학생 18명으로 50명이 졸업한 걸로 기억된다. 모든 동식물은 종족 보존을 위하여 암수 비율을 비슷하게 유지하도록 신의 섭리로 조정했다.

같은 해 또는 비슷한 세대에 같은 지역에서 태어나 자란 남녀는 필시 비슷하였을 것인데 남학생 수가 65%, 여학생수가 35% 비율이 되는 것은 필자의 어린 시절까지 아들선호사상이 강해 여자아이들은 학교를 보내지 않은 사람이 많았고 남자아이들은 초등학교에는 다 보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더 비교되는 것은 중학교 진학을 못한 반 학우들은 18명 그 중 남학생 7명, 여학생은 11명이었다. 중학교 진학한 남학생 수는 25명, 여학생은 7명 뿐이었다. 태어난 비율로 비교하면 남학생은 초등학교에 100% 입학했다면 여학생은 60% 입학을 했고 중학교 진학 비율을 남학생 80%, 여학생은 20% 진학을 했다고 보아야 한다.

필자의 현재 76세 되시는 작은 누님은 “꼴랑(하찮은, 시답잖은) 가시나를 공부시켜 뭐하노” 하시는 할머니의 사고 때문에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게 철천지한이 되고 뼈까지 아프고 서러운 상처를 받았다. 할머니와 같은 아들 선호사상 때문에 여자아이들은 같은 또래 남자 아이들보다 더 해어진 옷을 입고 더 험한 음식을 먹고 더 고된 일을 하면서도 구박을 받고 자란 사람들이 많다. 담임선생님을 맡았던 분들은 1학년 담임선생님은 키도 크고 인물도 훤칠한 모습인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김영목 선생님이다.

2학년 담임선생님은 키가 작고 예쁘장한 모습인 20대 초반인 김말자 여선생님이시다. 선생님의 아버님은 명곡마을에서 출생, 장성하여 부산으로 이전해 가신 분으로 선생님의 3촌 당숙 4촌, 6촌들이 우리 마을에 많이 계셨다.

고향 마을에 오셔서 고향 제자들을 더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임한 것 같다. 무슨 이유인지 잘 모르겠으나 3학년 때는 담임선생님이 세 분이나 바꾸어졌다. 첫 번째는 키가 작고 통통한 모습인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허득남 여선생님. 두 번째는 필자의 집 한집 건너 사시는 20중반쯤 되시는 이수생 선생님. 세 번째는 역시 한 마을에 사시는 큰누님의 동기이신 박수관 선생님이 담임을 하셨다.

이수생 선생님과 박수관 선생님은 고등학교 졸업하고 집에 기거를 하시다 당시 교원이 부족하여 임시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교원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해 평생 교직에 몸을 담았다. 아마 정년 하신 것으로 안다.

4학년 담임선생님은 사범학교를 졸업하시고 첫 교사 발령을 우리 담임선생님으로 오신 김천석 선생님이시다. 5학년 1학기를 끝내고 선생님은 군입대를 하시고 5학년 2학기부터 졸업 때까지는 40쯤 되어 보이시는 조덕순 선생님이 담임을 하셨다.

담임선생님을 거명한 것은 선생님들의 체벌 모습을 이야기 하고자 함이다. 당시 선생님들은 항시 회초리를 들고 다니셨다. 1학년 담임선생님이 체벌했던 모습은 기억이 잘 안나고 그 선생님은 항시 학우들을 칭찬하셨던 모습만 생생하게 떠오른다. 엉덩이를 자주 두드려 주시고 머리를 자주 쓰다듬어 주셨다.

2학년 담임선생님(김말자)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고향 제자들을 가르친다는 마음에서인지 얼마나 매섭고 표독스럽게 하셨는지 선생님은 따귀를 잘 때리셨다. 그것도 귀가 ‘윙’하고 울릴 정도로 세차게 때리셨다. 때리는 방법은 왼손으로 학생들의 볼을 비틀어 꼬집고 오른손으로 세차게 딱하고 큰 소리가 나도록 때렸다. 날마다 몇 명씩 맞지 않는 날이 없었다.

3학년 때 벌 받은 기억은 반 학우들 중 교과서가 없어졌다, 지우개가 없어졌다, 신발을 잃어버렸다, 심지어 기성회비 납부하려고 가지고 온 돈이 없어지는 일들 때문이었다. 선생님에게 고해 바쳐 이 사실을 알게 된 난감한 선생님은 해결방안이 없어 “나는 여러분을 믿는다.

혹시 순간적으로 나쁜 마음이 생겨 친구의 물건을 훔쳐간 사람이 있으면 선생님만 알고 넘어갈 것이니 자수해라”고 했다. 자수 권유 방법은 전 학우들의 눈을 감게 하고 그것도 잠깐이 아닌 30분 이상 눈을 감고 있으라고 하며 훔쳐간 사람은 그 자리에서 손만 들으라고 하셨다. 가만히 앉아서 눈만 감고 있는 일이었지만 거꾸로 매달아 놓은것 보다 더 가혹한 고문이었다. 그 순간 필자의 어린 마음에 학우들이 훔쳐갔을 리가 만무하며 다른 곳에서 잃어버리고 친구들을 도둑으로 몬다는 생각을 했고 지금까지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어른이 되어 다른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그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고 지금도 같은 생각이라 했다. 훔쳐간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자수한 학생이 있다고 생각해 본 일도 없다. 그러나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을 선생님이 쳐다보고 계실 텐데 행여 선생님이 나를 의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얼굴 색깔은 하얗게 되었다, 붉었다가 사색이 되곤 했다. 진땀도 났다. 다른 친구들도 같았다고 한다. 멀쩡한 양심에 괜한 주름만 지게 했다.

4학년 담임선생님은 젊은이답게 매질도 잘하시고 엎드려 벋쳐와 머리를 땅에 박고 엎드려 손을 등에 올리는 체벌을 몸에 땀이 흠뻑 배이도록 하셨다. 5학년 2학기부터 졸업 때까지 담임을 하신 선생님의 체벌방법은 공부시간에 복도에서 꿇어 앉아 손을 들고 있게 했다. 이 또한 엄청난 고문이었다. 벌을 주는 시간은 휴식시간이 지난 다음 공부시작할 때까지였다. 복도에서 벌을 받은것은 다른 반 선생님도 보게 되고 하급생, 상급생이 다 보는 부끄러운 모습이었다. 그 선생님의 마음에는 선생님이 보는 앞에서 벌을 받게 되면 요령도 피우지 못하고 선생님이 보지 않으면 적당한 요령을 피우면서 편하게 받다가 복도에서 봉변을 당하면 다음부터는 이런 벌을 받지 않아야겠다는 다짐을 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했을 것 같았다.

그때는 선생님의 가혹한 매질로 손바닥이 터져 피가 나고 엉덩이 종아리에 피멍이 맺혀 열흘이 지나도 다 삭아지지 않아도 맞은 학생이나 어느 친구도 집에 가서 선생님께 맞았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어쩌다 피멍을 보고 부모님들이 아셨다 해도 그 매질을 사랑과 훈육의 매질로 생각하고 선생님을 고맙다고 생각했지 원망하는 부모님은 한사람도 없었다.

나이가 70이 다 된 지금까지 필자의 초등학교 동기생들은 매월 동기회 모임을 한다. 그때마다 자주 나누는 대화는 야생마 같은 우리가 나름대로 맡은 바 직분의 도리를 다하려는 자세와 아버지 엄마로서 부끄럽게 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자세도 그 시절 선생님들의 체벌 덕분이란 이야기를 하며 다 동조를 한다. 그 시절 선생님과 같은 자세가 어느 선생님이 오늘날 교육에 임했다면 단 하루도 교단에 서지 못하고 전국이 떠들썩할 것이다. 교육의 가장 우선된 목적은 지식을 많이 가지게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일인데 어느 교육방법이 가장 사람답게 만드는 방법인지 정답은 모르겠다.

교실은 목조 기와집으로 1927년 일정 때 지은 건물이다. 지은 지 약 30년 정도 되는 건물은 국비지원을 받고 부족한 금액은 지역민들의 금전적 협찬과 인력의 협조를 받아 지었는데, 허술하게 지어졌는지 건물이 기울어 건물 뒤편에 더 넘어가지 못하게 나무를 기대어 여러 곳에 받쳐두었다. 비가 오면 비가 세고 교실 바닥 청마루는 깨어져 나간 곳이 많아 심하게 뛰다보면 바닥이 깨어져 발을 빠트리는 경우도 있었고 창문도 유리가 깨어져도 갈지 않아 비바람도 들어오고 여름에는 찜통 같은 더위 속이고 당시 우리지역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선풍기도 없었지만 있었다고 해도 사용할 수 없고 전기도 그 이후 한참 지나고 들어왔다.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난로 피우는 날이 없어 추위도 만만찮았다. 2학년 여름 방학을 마치고 학교에 오니 교실이 비바람을 견디지 못해 무너져 교실마저 잃어버렸다. 방학을 마치고 첫 조회 시간에 오강영 교장 선생님의 훈시말씀이 “교실이 무너진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만 하늘의 도움으로 방학 때 무너진 것이 너무 다행스럽다. 수업 중 교실이 무너졌다면 상상하기도 끔찍한 참변이 일어났을 것이다. 여러분들은 하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다.

교실이 없어 여러분들은 지금부터 교실이 지어질 때까지 노천에서 거적을 펴고 공부를 해야 한다. 더운 날은 나무 그늘을 찾아가고 추운 날은 양지 바른 곳을 찾아가고 비가 오는 날은 비를 피해 이곳저곳 떠돌이 공부를 해야 할 것이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이 될 것이지만 먼 훗날 여러분들이 어른이 되어 돌아보면 아름다운 추억꺼리가 되고 정말 공부다운 공부를 했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들의 앞날에는 하늘의 은혜가 항시 있을 것이 확실하다”는 말씀을 하셨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들은 교장선생님 말씀이 어른이 되어 나이가 더 할수록 새롭게 각인이 되고 그 말씀의 뜻이 더 깊게 다가온다. 노천에서 하는 공부가 어찌 옳은 공부가 되었겠나. 길거리 지나가는 사람도 보고 강아지, 소도 쳐다 보고 비바람 부는 날은 공부할 곳이 없어 집으로 돌아가는 날은 너무 신나는 날이었다. 맑은 날은 날마다 하루 두세 시간은 학교 건물 짓는 일에 도움을 주기위해 땅도 파고 돌을 주워 날라야하고 회야강에 몰려가서 모래도 책 보따리에 싸 날라야했다. 새 책을 사보는 학생은 형편이 좋은 집 자녀 몇 사람 뿐이고 대다수 선배들이 물려주는 헌 책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한두 해 물려받은 책은 약간 성했지만 몇 해를 물려받은 책은 찢어져 나간 부분이 많고 교과서 내용이 변경된 부분이 많아도 그대로 이용했다.

필자는 책도 옷도 모두 네 살 더 많은 사촌형이 물려준 것만 이용했다. 사촌형은 나에게 책을 물려주기 위해 절대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고 책도 정갈하게 사용하려고 책 포장도 예쁘고 단단하게 해 사용하였다. 책은 험하지 않아도 4년이 지난 교과서는 일부 변경된 부분이 많아 선생님이 필자에게 책을 읽으라고 지적하면 엉뚱하게 책을 읽어서 틀린 책을 읽고 있다고 생각을 못한 선생님은 야단을 치시곤 했다.

사촌형님은 나이가 네 살이나 많은 터에 반에서 체구가 큰 편이었고 필자는 반에서 체구가 작아 옷은 병아리가 우장 입은 꼴이 되어 그때 나의 별명은 ‘어바리 헐레장군’이었다. 그때는 모든 학생들이 입는 옷은 성할 때보다 해어져 기워 입는 순간이 더 오래였다. 사촌형(삼촌댁)집 사정이 여유롭지 못한 터에 사촌형은 유별나게 활동적이라 성한 옷이 하나도 없었다.

누더기처럼 해어져 기운 옷이 크기도 그랬으니 지금 생각해도 딱 맞는 별명인 것 같다. 당시 우리 모교인 웅상초등(국민)학교 학군지역은 주진, 명곡, 백동, 소주, 신기였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걸어 다녔다. 지금은 회야강을 건너는 여러 개의 교량이 설치되었지만 7번 국도(당시 1번국도)교량 이외는 교량이 없어 회야강 물이 범람할 때는 백동, 소주, 신기에 사는 학우들은 학교에 오지 못한 날도 있었고 학교에 와서 비가 많이 오면 집으로 가지 못해 친구 집이나 친척집에 자고 바로 학교로 가는 날도 일 년에 몇 날은 되었다.

비가 세차게 오면 친구들은 몇 번은 “비야 비야 따라라 소주, 백동 못가도록”하며 노래를 불렀다. 소주, 백동 친구들이 못가는 것이 신바람이 나는 것이 아니라 그 친구들과 밤을 새우는 게 좋아 그랬던 것 같다. 학교 통학방법은 매일 걸어오는 방법뿐이었다. 차도 없었지만 지금은 먼 거리로 생각하지만 차가 있었다 해도 차비가 아까워 차를 이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도시락을 지참하지 못하는 학생들은 반마다 몇 명씩 되었다. 미국의 잉여 농산물 강냉이 가루가 원조되어 그 양이 일부 학생들이 먹을 수 있는 양밖에 되지 않아 가장 가난한 사람 몇 사람을 선별해 강냉이 가루 죽을 먹게 했다. 선생님은 공정하게 선정한다고 했지만 가정 사정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어 어린 학생들이 보기에도 모순되었다고 생각이 드는 부분도 있었다. 강냉이 죽 끓이는 냄새가 얼마나 구수한지 냄새가 온 학교에 진동하여 강냉이 죽을 타먹지 못하고 도시락도 지참하지 못한 학생들에게 허기를 더욱 지게 했다.

강냉이 가루 죽을 타먹기 위해 급식소에서 줄을 서 있는 학생들은 배는 채웠는지 몰라도 마음의 허기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고 한다. ‘나는 걸인이다’라는 생각에 어린 마음에 얼마나 상처가 되었는지 모른다고 했다. 급식소에서 죽을 타 먹던 친구들은 지금도 급식제도에 관하여 논란이 나오면 단 한번이라도 급식소에서 죽을 타 먹기 위해 줄을 서본 사람이 아니면 그 아픔의 상처를 알 수 없다고 한다.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6년 09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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