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상의 역사를 말하다/1900년대 웅상 최고의 유학자 학성이씨 이규락의 삶(1)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5년 04월 21일
이규락씨는 1920년 4월 4일 울주군 상북면 명촌리 123번지에서 출생해 2005년 4월 19일(86세) 웅상읍 명동에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종우씨는 명동에서 1864년 1월 20일 출생하여 1930년 9월 17일(67세) 웅상 명곡에서 별세했다. 형님 인락은 1912년 8월 11일 울주군 상북면 명촌리 123번지에서 출생 1931년 11월 9일(20세)웅상 명동에서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명동에서 경제적으로는 여유가 있는 가정에서 출생해 20세 때 고령김씨 어머니와 결혼했다. 누나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다시 밀양박씨 어머니와 결혼했으나 그도 누나를 낳다 누나와 같이 세상을 떠났다. 1890년경 3번째 강릉 유씨 어머니와 결혼하였다. 결혼한 지 8년이 지나도 자녀를 보지 못해 고향을 떠나야만 자녀를 볼 수 있는 운명을 지녔다는 말을 듣고 고향을 떠나 울주군 상북면 명촌리 123번지에 옮겨 살았다. 외지에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곳에도 토지가 있었고 풍수지리상 자손이 번성할 수 있는 곳이라 하여 가게됐고 여동생이 그곳에서 태어나 2남 2녀의 남매를 보게 되었다. 자녀를 보기 위하여 고향을 떠나 왔지만 죽을 때는 고향 돌아가 죽어야 한다며 1925년 아버지연세 62세때 명동 정지골로 귀향을 했다. 그곳에서 얼마간 살다 명동 앞각단에 4칸집 기왓집을 잘 지어 이사를 옮겼다. 그 당시에는 마을에서 최고 좋은 집이라 했다. 형님은 1928년 열일곱 살 되던 해에 울주군 청량면 중리 고령김씨 종가댁 5남 1녀의 고명딸과 결혼을 했다. 형수는 형님보다 세 살 위셨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질녀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고향 온지 5년쯤 지난 67세 되던 해 1930년 9월 17일 세상을 하직하셨다. 아버지 돌아가신지 1년 지나 형님이 20세 되던해 1931년 11월 9일에 아버지를 따라가셨다. 그때 이규락은 웅상초등학교 4학년을 마치고 웅촌초등학교 5학년에 다니고 있을 때라 가정사정을 잘 몰랐지만 형수가 어머니를 모시고 후덕하고 지혜롭게 처신해 주신 것 같다. 웅촌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경기중학교를 다닐 수 있었던 것도 형수가 계시지 않았다면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외지에 있는 많은 토지를 관리하고 머슴을 두사람이나 두고 시어머니 모시고 어린 딸을 데리고 이십 초반의 미망인이 농사를 지을 수 있었던 것도 형수님 인품의 힘이었다. 성품이 여성스러우면서 당찬 곳이 있어 머슴들에게도 소작인들에게도 존경의 대상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형수 혼자서 가정 경영을 다 맡아주신 것이 고맙고 미안해 집에 머물면서 유학공부와 풍수지리학도 열심히 공부했다. 결혼하라는 형수의 극성을 이길 수 없고 형수 혼자 가사 일을 다 맡아 감당하는 것도 안쓰러워 20세 되던 해 울주군 농소면 화산리 밀양박씨 송정파 종가댁의 4남 2녀 중 다섯 번째로 태어난 동갑내기 규수와 결혼을 했다. 아내는 시어머니와 손위 동서를 모시고 종가댁 따님다운 모습으로 시집살이를 잘했다. 풍수지리학을 공부하고 보니 아버지산소도 형님산소도 좋지 않고 살고 있는 집터도 좋지 않아 첫딸을 낳고 소정마을로 이사를 했다. 그곳에서 1남 3녀를 더 보아 1남 4녀의 자녀를 보게 됐다. 아버지 산소와 형님 산소를 명곡에서 용당리 탑골 저수지 북쪽 방향 산 정상에 이장을 했다. 두 아들을 보아 형님 양자로 들이고 자신의 후계를 이어가게 하고 싶었는데 아들을 한사람만 보게되어 죄송하고 미안해 어쩌면 좋을까 많은 고심을 했는데 형수님이 “무슨 걱정이고 동일이를 내 아들로 생각하며 이날까지 살아왔는데 동일이를 내 아들로 하고 시동생 아들도 하면된다.”하기에 양가독자를 하고 손자가 나면 형님 손자 내손자로 만들면 되겠다하고 자손번성을 위해 선조 묘지에 지성을 다하기 위하여 풍수지리학 공부에 더욱 매진하였고 유학공부도 불경공부도 열심히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의심나는 게 더 많아 불경에 심취되어 절에 입문까지 하며 참선을 하면서 여러 절을 전전하다 한때 성철스님과 같은 절에서 예불을 같이 드리며 공부를 했다. 학문추구 한답시고 가정을 돌보지 않았지만 형수와 아내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어머니 잘 모시고 가정을 잘 이끌어 갔다. 형수댁호는 중계댁이고 아내댁호는 화산댁인데 우리 집을 마을 분들이 중계댁이라 칭하였지 화산댁이라 칭한 건 드물었다. 가정 모든 처리를 형수의사를 가장 존중하며 아내는 순종했다. 집에 다니러 와 보니 어머니 건강 상태가 좋지않아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집에 있기로 했다. 그간 배운 학문으로 우리마을과 이웃마을분들의 장례시 묘지도 보아주고 장례 절차지도도 해주고 혼례시에는 예장지도 써주고 결혼식 홀기도 불로 주었다.(신식 결혼식때 주례와 사회자가 맡은 역할과 같음)필자의 결혼식 때도 홀기를 불러주셨다. 아들(동일) 부산개성중학교 2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린 딸과 아내를 두고 젊디젊은 나이에 먼저간 아들 때문에 얼마나 슬픔을 안고 살았을까 혼자된 며느리 눈치 보일까 가슴이 미어져도 아픈 표시도 맘껏 못하며 아버지 돌아가시고 30년 더 살다 가셨다. 형수와 의논한대로 아들에게 큰 상주(승중상)을 시키고 규락은 작은 상주가 되었다. 어머니를 아버지 모신 곳 옆에 모시고 집에서 빈소를 모셔 3년상을 다 치룰 때까지 삼시세끼 상석을 올리고 초하루 보름날은 삭망의 예를 갖추고 시묘살이 하는 심정으로 비가 오나 눈이오나 덥거나 춥거나 개의하지 않고 3년 동안 10리가 넘은 길을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삿갓을 쓰고 묘지에 다녀왔다. 이런 와중에 대통령 선거를 한다고 자유당 이승만 대통령은 장기집권을 위하여 출마를 하고 민주당 조병옥 선생이 대통령으로, 부대통령에 장면이 출마를 했다. 국회의장이었던 이기붕은 자유당 부대통령으로 출마를 하고, 내무부장관 최인규는 모든 공직자들을 다 동원하여 이승만 대통령을 꼭 당선시켜야 우리가 살 수 있다하고 공직자들에게 가정방문을 시키고 여당선거 운동에 적극 나서지 않는 공직자와 표가 작게 나온 지역이나 기관에는 책임을 묻겠다 하며 명을 했다. 우리 마을에는 웅상초등학교 선생들이 자기가 맡은 반 학생들의 집을 가가호호 방문하여 대통령에 이승만, 부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키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처럼 주입시키고 선거운동 한 방문흔적까지 받아 교장에게 보고하고 교장은 상부에 보고를 해야 한다했다. 이런 한심한 작태가 전국에 벌어지고 있었다. 찾아온 선생이 무슨 죄가 있지도 않는데 혈기 있고 의식 있는 선생이 이러시면 되느냐 꾸짖기도 했다. 선거 앞날 저녁에는 반장이 반원들을 모아놓고 술과 과자를 대접하고 고무신을 나눠주고 자유당이라 쓰여 진 완장을 나누어 주며 완장을 팔에 끼고 3인조 5인조로 짝을 지어 같이 투표소에 들어가 자유당에 표를 찍는지 안 찍는지 서로 감시를 하고 투표한 용지를 선거관리 종사원들에게 확인을 시키고 투표함에 넣어야 된다고 했다. 이에 불응한 사람은 표시해 두었다 관에서 보복이 있을 것이라는 말도 여러 번 했다. 마을도 편하고 가정도 편하기 위하여는 불평 없이 따르자 했다. 이장과 반장도 불러 모아 교육을 시켰다. 그때는 집집마다 땔감은 산에서 해 온 나무를 사용했는데 농촌에서는 100%산에서 해온 나무로 땔감을 했다. 산림법이 너무 엄해 신림법을 그대로 적용한다면 나무 몇 집만 해도 구속시키고도 남는다. 산림관련공무원들이 나와 이를 적용한다면 구속 안 될 집은 한집도 없을 처지였고 식량처럼 담가 먹던 농주도 집에서 제조하는 게 불법이라 농주 한 동이만 발각되면 벌금이 논 2마지기 값 정도는 벌금으로 물어야 했다. 이 법은 일정치하 때 일본인들이 만든 법을 그대로 이어받아 이행해왔다. 법의 취지는 산림을 보호하기위한 법이고 식량절약과 국민건강과 세수증대를 위한 것이란 명분을 내세웠지만 관이 주도하는 대로 국민을 이끌어가기 위한 술책이었다. 관이 국민에게 설득하기 어려운 문제만 들고 나오면 이를 이용하여 국민을 이끌어 갔다. 투표당일 투표장으로 가는 먼 입구부터 경찰관들이 총을 메고 경비를 하고 있고 선거가 축제가 아니라 불안의 도가니였다. 선거종사원들은 자유당이란 완장을 착용하지 않은 사람은 완정을 차고 오지 않았느냐 질책을 하며 투표장에 들어가는 길에 방해를 했다. 반장이 사전 교육한 방법으로 투표는 진행되고 있었다. 규락과 뒷집에 살며 의지가 상통한 친구 박일호와 규락은 “이런 정권은 반드시 망한다 이런 방법으로 투표하면 이승만이 당선 안될 리 없지만 의식 있고 양심 있는 우리까지 이에 동조하면 우리 양삼이 허락지 않는다.”하며 한조가 된 조원들에게 보이지 말고 비밀투표를 하자며 조원들이 보지 못하게 투표하고 투표용지를 공개하지 않고 투표함에 넣었다. 자유당 정권은 이것도 부족해 투표함을 이동하는 중간지점에 사전 만들어놓은 투표함과 운반해온 투표함을 바꿔치기를 하고 개표장에 사전에 한전과 짜고 정전사례를 만들어 부정한 행위를 하고 저지를 수 있는 부정한 행위를 다 동원하여 선거에 임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런 선거를 하고자 시킨 것은 아니겠지만 정권이 무너지면 자기 밥그릇이 넘어지는데 불안을 느낀 각료들과 공직자들이 혈안이 되었던 것이다. 3.15부정선거로 인하여 4.19학생의거가 발발되고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는 계기가 되었다 장기집권을 위하여 부정선거를 한 행위는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지만 자유당정권과 이승만 대통령이 잘한것도 많다 그중에서 정말 성공한 정책은 토지(농지)개혁이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이하 다음호에 계속)
 |  | | ⓒ 웅상뉴스 | ■약력 시인 박극수(현) 웅상지 편집위원장 전 웅상농협 조합장 웅상주부합창 단장 천성산문학회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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