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터닝포인트
소설가 김서련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4년 12월 22일
 |  | | ⓒ 웅상뉴스 | 길 양편의 나무들이 앙상한 몸을 드러내고 있다. 지난 10월, 바다가 훤히 보이던, 20년 넘게 살던 아파트를 팔고 발품을 팔아 살 집을 알아보러 다니던 중, 단번에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길이다. 무수한 잎사귀들이 떨어져 내린 나뭇가지 사이로 차디찬 공기가 맴돌고 어디선가 새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아파트 입구에서 도로변까지 얼마 되지 않는 길인데도 마치 수백 킬로가 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잠깐 걸음을 멈추고 나무들을 올려다본다. 신혼살림을 꾸렸던 사직동 주공 아파트의 은행나무들이 떠오르고 유년기 때 자주 올라가던 산길의 나무들이 떠오른다. 그때의 시간으로 되돌아간 듯 마음이 저절로 고요해지고 평온해진다.
시간은 생각하기 나름인가. 몇 년 전, 지중해 바다의 카프리 섬에 갔을 때도 그랬다. 정적의 중심인 듯한, 고요 그 자체였던 산을 내려와서 배를 기다리던 10분 동안, 나는 카페에서 에스프레스를 마셨다. 단 10분이었지만 내겐 1시간, 아니 종일 그곳에 있은 듯한 느긋한 여유를 느꼈고 고적했다. 지금도 그때의 그 고요한 기분과 에스프레스의 쓴 맛이 혀끝에서 맴돌고 있다. 이제 나는 이 길을 늘 걸어 다닐 것이다. 아주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나무들이 내뱉은 숨결을 느낄 것이다. 나는 어떻게 변할까.
결혼 초, 직장조합아파트에 당첨되고 사하구의 끄트머리에 짓고 있던 아파트를 보러 다닐 때를 떠올린다. 함께 당첨이 된 지인과 함께 아파트를 보고 나서는 허허벌판인 을숙도에 가서 오뎅도 먹고 술을 마시곤 했다. 그땐 무슨 생각을 했던가. 주거환경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새 아파트로 들어가게 돼서 좋아했던 것 같다.
바다와 강과 을숙도, 종일 집안 깊이 들어오는 햇살과 노을, 강 너머 야경을 볼 수 있는 아파트에선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다. 아이 첫돌을 지냈고 소설을 썼다. 시간이 지나면서 알뜰살뜰 자식들을 생각하던 시댁 어른들도 떠났고 아버지도 떠났고 함께 휴가를 보내던 지인도 떠났고 정들었던 이웃들도 하나 둘 다른 지역으로 떠났다. 그리고 언제까지 그곳에서 살 듯이 굴던 나도 어느 순간 훌쩍 떠나왔다. “장소를 바꾸는 건 큰 터닝포인트가 될 거예요. 굿럭” 페이스북에 포스팅한 페인트를 칠한 책장 사진에다 C소설가가 달아준 댓글이다. 안 좋았던 일들을 모두 버리고 새로운 집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겠다고 단단한 결심은 했지만 큰 터닝포인트까진 생각하지 못했다. 가구든 뭐든 버릴 것은 버리고 가져갈 것은 페인트 칠하고 인조가죽을 붙이고 타일을 붙였다. 몸살이 나면 약을 지어 먹어가면서 일했다.
그리고 마침내 며칠 전 이사를 했다. 동향이라 아침에만 햇빛이 들어오는 게 익숙하지 않고 5층이라 누군가 높은 곳에서 집안을 들여다볼 것만 같아 신경이 쓰여 잠깐씩 종일 햇빛이 들어오고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던 예전의 아파트가 그리워지기도 했다.
그런데 하루이틀 지나면서 그 말을 실감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지난 10년 넘게 거실을 텔레비전과 소파를 없애고 서재로 만드는 바람에 부재했던 생활의 중심이 다시 거실로 옮겨지면서 가족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함께 텔레비전을 보고 커피를 마시고 수다를 떨었다. 남편도 아이도 나도 변하고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분리수거만은 절대로 안한다고 버티던 남편이 순순히 분리수거를 하고 아이도 제 앞가림을 하고 내 생활 패턴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의도적으로 노력을 하는 것도 아닌데, 나도 모르게 생각이 변하고 행동이 변하고 있었다.
큰 터닝포인트가 내게 오려나. 집을 옮겼다고 당장 뭐가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계기가 되어 여태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것은 바로 잡고 이전과 다른 삶을 살기를 기대해본다.
뒤돌아보면 그동안 가족들과 느긋하게 텔레비전을 보지 못했고 제대로 휴가도 가지 못했고 늘 무언가에 쫓기는 듯 마음이 바빴다. 그렇다고 특별하게 뭔가 성과를 이룬 것도 없다. 나는 옷깃을 여미고 자박자박 걸음을 옮겼다. 굿럭! 허공에다 큰 글씨로 써본다. C소설가의 마음이 내게로 전해져 온다. 굿럭!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인생의 큰 행운이 함께 하기를.
12월, 오늘은 내게 특별한 날이다. |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4년 12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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