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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상스토리를 재발견하다

-천성산 가림으로 별개의 문화권을 형성한 웅상의 역사를 그려보다
김경희 기자 / 입력 : 2013년 11월 12일
회야강을 중심으로 촌락을 형성하고 발전해 온 웅상!! 1991년 읍으로 승격할 때 인구 2만이 넘어서고 농업 위주의 주업에서 농공지역의 병용으로 산업도시화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인구도 점점 증가, 2007년도부터 웅상읍이 4개동으로 나뉘어졌고 지금은 인구 10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 이처럼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지만 지리적 특수성으로 제대로 조명을 못 받고 대다수 주민들에겐 문화의 불모지였다. 많은 도로와 아파트가 들어서고 인구들이 증가하고 대형마트가 생겨 생활이 편리해졌지만 사람들은 과연 행복할까.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의 뿌리를 찾는 것에서, 현재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어딘지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에서 오지 않을까. 그런 측면에서 웅상의 역사를 한 번 짚어보는 것도 대단히 중요한 일이지 싶다.

ⓒ 웅상뉴스
"웅상은 한동안 울산에 편입되어 있다가 1906년 양산에 편입되었다. 그 이전까지 천성산이 가로막혀 양산과 웅상의 교류는 거의 없었다. 양산과는 역사와 전통, 생활권이 완전 별개 지역이었다. 교류는커녕 전쟁도 울산 동래 쪽으로 향했다. 임진왜란 때 웅상 출신 의병장들이 부대를 이끌고 동래범어사, 기장, 울산, 언양, 경주 대구 등 많은 전투에 가담했고 3.1운동 때도 웅상 출신 애국지사들이 동래범어사, 남창에 참여했다. 그 많은 전쟁을 치루면서도 양산과 전쟁했다는 근거는 없다. 이러한 역사적 흐름이나 위치적 배경 때문인지 웅상은 문화 유적이나 역사적 인물 관리가 너무 소홀하게 취급되어 왔다.”

인터뷰에 응한 박극수 웅상지편찬위원장이 말했다. 1948년에 웅상 명동에서 태어난 그는 전국의 최연소 농협 조합장으로 일할 때도 잠깐 직장 때문에 떠났을 때도 가족들이 있는 웅상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았고 은퇴한 요즘도 농장을 하는 향토사학자로 강의도 하고 현지답사도 하면서 웅상 역사를 깊이 공부하면서 주위에 알리고자 애쓰고 있는 전형적인 웅상 토박이었다.

웅상에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았을까.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삼호리, 명곡리 고분군으로 미루어 보아 웅상에서 사람들이 취락생활을 한 시기는 선사시대부터 했음을 알 수 있다. 삼한 시대 웅상은 경상도의 낙동강을 분계로 한 동쪽에 위치한 진한에 속했다. 삼국사기의 열전에 우시산국이라는 나라가 나온다. 신라 탈해왕 때 벼슬하던 거도는 우시산국과 거칠산국을 병탄하기 위해 군사를 장토의 벌판에 모아놓고 다만 말을 타고 달리며 즐겁게 노는 마숙놀이를 창안했다. 그 속임수는 거도의 뜻대로 연례적으로 되풀이 되는 걸로 인식되었고 그럴 무렵 군사를 일으켜 두 나라를 병탄하고 말았다. 그때의 우시산국을 학자들은 우가 울로 변한, 울산이라고 보고 있다. 신라시대 웅상은 삼국사기지리지에 의하면 지금 양산인 양주의 관할에 속했다. 고려 때 웅상은 태조 때 웅상‧울산에다 홍례부를 두고 하나의 행정통치로 통합, 오늘날 웅상‧울산의 기초를 이룩했다.
ⓒ 웅상뉴스
조선 시대 때 태종이 울주군을 울산군으로 고쳤고 이때 웅상도 웅촌면에 속했다. 대한민국 수립 이후 6.25전쟁 때 웅상은 꽤 큰 역할을 수행했다. 반격과 북진을 위한 방어기지의 역할을 맡았고 피난민들을 수용하고 전 학교는 육군병원의 역할을 맡았다. 전국의 피난민 수가 585만에 달할 정도로 피난 동포의 안전지대였다.

ⓒ 웅상뉴스
ⓒ 웅상뉴스
마디로 웅상은 양산시에 속해 있지만 천성산을 가림으로 별개의 역사와 문화가 형성해 왔다. 따라서 역사와 문화에 대한 연구가 도외시되고 있다.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박 위원장의 말에 따르면 삼한시대 이전에 축성된 우불산성을 문화재로 지정하고 복원 관리해 줄 것을 연구 자료까지 제출하고 건의해도 별 진전이 없고 임진왜란 때 웅상 출신으로 의병장으로 출전하여 공을 세운 분들의 존함이 경상남도와 양산시 어느 문헌과 어느 위령탑에도 명기되어 있지 않으며, 3.1운동에 가담한 애국지사들의 기록 또한 미미하다. 문화재도 마찬가지다. 미타암석아미타불입상, 우불산시사, 웅상농청장원놀이 등 문화재 이외에 가치는 있지만 아직 발굴하지 못한 것이 있다. 바로 용당의 탑골은 그 자체로 문화재 가치를 지닌다.

박극수 위원장은 “이처럼 웅상에는 충분히 연구할 만한 문화재도 많지만 인정 또한 남다르다. 인근 마을에 걸인들이 200여 명이 모여서 집성촌이 이루어 산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한 끼도 굶지 않았다. 그 이유는 집집마다 자신들이 먹을 게 없어도 걸인들에게 줄 음식을 따로 준비를 했기 때문이다. 보리밥이든 죽이든. 그리고 걸인들은 걸식이 쇠퇴한 노인들을 봉양했다.”면서 웅상에서 전해져오는 훈훈한 민담을 전했다.
김경희 기자 / 입력 : 2013년 11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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