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불산(于弗山)’을 아십니까?
예로부터 우리나라 3대 명산은 묘향산 금강산 우불산(于弗山)이였다는 놀라운 사실
최철근 기자 / 입력 : 2013년 07월 29일
|  | | ↑↑ 우불산성 서쪽방향 성곽은 많이 허물어졌지만 그래도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 ⓒ 웅상뉴스 | | 양산시 웅상지역 삼호동에 위치한 우불산은 두가지 큰 문화재가 존재하고 있다. 첫째가 우불산성(牛佛山城)과 우불신사(于弗神祀)이다. 우불산성(牛佛山城) 복원사업은 최근 웅상발전협의회에서 최대 현안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사업으로 웅상의 최고 문화재로 떠오르고 있다.
이는 웅상사람들이 1800여년의 역사의 유산이자 문화재이며 웅상지역의 맥과 역사가 묻혀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양산시 삼호동 양지가든 뒤쪽에서 가파른 산등성이를 곧바로 10분정도 올라가 보면 언덕진 평지에 아득한 명당같이 보이는 자리에 절이 보인다. 절을 끼고 도 20여분 쯤 가파른 성곽을 따라 밟고 걸으며 올라가다보면 움푹 패어진 자리에 성문으로 보이는 허름한 흔적이 나타난다.
 |  | | ↑↑ 산성을 올라오는 길이 제법 가파르다. | ⓒ 웅상뉴스 | 이곳을 지나고 얼마 되지 않아 망루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산정상이 나온다. 올라서자마자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면서 탁 트인 웅상 전역이 한눈에 보이는 그림 같은 전경이 1800여년 지나간 역사의 배경처럼 가슴을 설레게 한다.
우불산성은 삼국시대에 초축(初築)된 것으로 판단되며, 내역(來歷), 문화적 영역으로 보아 울산권에 속한다. 이곳은 울산이나 경주로 통하는 중요한 길목으로 산성의 군사적 목적은 충분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곳은 신라의 24개의 주요 제장(祭場)이었던 소사(小祀)와 관련된 곳으로도 의미가 있다.
우불산성은 경상남도 양산시 삼호동에 있는 우불산의 신라시대 포곡식 산성이다.
건립경위는 알 수가 없지만 우불산성 내부에서 채집되는 토기편과 서남쪽의 주남리 고분군의 존재 등으로 미루어 신라시대에 처음 쌓은 것으로 여겨진다. 성의 폐기 시점은 임진왜란 당시 우불산성을 거점으로 왜군이 일시 주둔했었고, 양산 지역의 옛 기록에 근거하여 살펴보면 임진왜란 때였을 것이다. 그 후 전란 속에서 양산 지역의 주민들이 옆에 삼호리성을 쌓아 왜군과 항전했다.
 |  | | ↑↑ 우불산성이 1800여년지난 지금도 성곽의 일부가 많이 남아 있어 지난 역사에 흠뻑 빠진다. | ⓒ 웅상뉴스 | 성벽에 남아 있는 석재의 양으로 보아 일정 단위를 이룬 체성(體城)의 규모는 상당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체성의 구축에 사용된 석재는 대부분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할석들이며 부분적으로 냇가 돌도 섞여 있다. 성의 축조 기법은 알기 어렵지만 붕괴된 석축의 양상으로 미루어 체성의 구축 방법은 협축식으로 여겨진다. 또한 우불산성은 후대에 한 차례 개축된 것으로 보이는데, 붕괴된 성벽의 중심을 따라 너비 1m 내외의 협축된 개축 흔적이 남아 있다.
성으로의 출입은 동쪽 성벽 중간의 계곡을 통해 이루어졌을 것이다. 성내의 지형은 정상 부위가 평탄한 반월 형상의 대지상이고, 외곽은 급경사를 이루며 남동장벽의 중간에는 얕은 곡부가 형성되어 있다. 현재 성벽은 많이 파손되어 있지만 곳곳에 흔적들이 남아 있고, 세 곳의 고지(高地)에 장대(將臺), 암문(暗門), 통로 등의 시설이 있고, 창고와 연못의 위치도 확인이 가능하다.
현재 성벽은 거의 붕괴되어 원상을 유지한 부분은 찾아볼 수 없으며, 성벽 북쪽은 납석(蠟石)의 채취로 인하여 성벽의 바닥 부분까지 훼손된 상태이다. 현재 동쪽 성벽의 중간인 골짜기에는 관음정사(觀音精舍)가 있다.
 |  | | | ↑↑ 산성 내에 한가롭게 자리잡은 집 한채가 보인다. | ⓒ 웅상뉴스 | | 우불산성은 내력이나 문화적 영역으로 보아 지리적으로는 울산권에 속한다. 이곳은 울산이나 경주로 통하는 중요한 길목으로, 군사적 역할을 수행했을 것이다. 특히 이곳은 신라의 24개의 주요 제장(祭場)이었던 소사(小祀)와 관련된 곳이라 그 의미가 깊다.
웅촌과 웅상읍은 이조 중엽까지는 울산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울산 서면이였다. 고종1년에 지금의 웅상읍과 웅촌면을 웅촌면이라고 불러 오다가 1906년에 웅상면은 울산군 웅상면으로 웅촌면은 울산군 웅하면으로 갈라서 부르다가 한일합방후인 1914년 울산의 웅상면을 양산으로 떼어줘 버렸다. 그러나 양산 웅상읍에 있는 우불신당에는 울산 군수가 철마다 하늘에 국태안민의 제사를 올렸다. 우불산은 예로부터 우리나라 3대 명산인 묘향산 금강산 우불산이였다.
웅상읍에서 흘러가는 회야강물이 울산 시민의 70%의 식수원인 회야강댐이 된다. 지금도 울산 향교에서 용당리 당촌 마을에 있는 우불신사에 와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웅상에 있는 우불산과 우불신당은 울산에서 제일 중요시하는 산이고 신당이다.
 |  | | ↑↑ 남쪽 성의 문으로 추정되는 암문(暗門) 통로 | ⓒ 웅상뉴스 | 웅상읍 골짝 골짜기에서 나오는 모든 물과 논 밭에서나 집집마다 흘러나오는 물이 모두 다 모여 울산시민의 식수원이 되고 있으니 울산과 웅촌 웅상은 수천년 전부터 한 거랑의 물을 먹고 같은 문화를 이룬 고을이였다. 그런데 왜 웅상이 천성산 넘어 양산천의 물을 먹고 살고 있는 양산으로 가야 했는지 ....
웅상과 웅촌은 삼국이전에는 우시산국이라는 부족국가의 도읍지였다고한다. 울산이라는 지명도 우시산국의 울뫼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니 웅상과 웅촌은 울산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땅이다.
우불산성이 복원을 기원하는 웅상사람들은 지난 1800여년의 역사가 말해주는 웅상의 맥이며 최대 문화재임을 자랑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우불산성일주를 마치고 산아래로 발길을 향하면 아래에 신사가 나타난다.
 |  | | | ↑↑ 산성안에서 평온한 세상을 만날 수 있다. | ⓒ 웅상뉴스 | | 이 우불산신사는 우불산 일대 지역을 수호하는 우불산 산신을 모시고 있는 제당. 경상남도 양산시 용당동 1134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1991년 12월에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187호’로 지정되었다. 우불산신사는 기우제에 특히 효험이 있어 가뭄이 심하면 마을 사람들이 이 제당에서 기우제를 올리면 제를 지낸 뒤 사흘 안에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한다.
우불산신사는 정면에 석축 기단 위에 우불산신을 모시는 앞면 3.7ⅿ, 옆면 2ⅿ 규모의 제당과 출입문 측면에 제기를 보관하고 제물을 조리하는 부속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제당은 단청 맞배지붕 형태이며 중앙에 ‘우불신사(于弗神祀)’라고 쓴 나무 현판이 걸려 있다.
우불산신사 주위에는 돌담에 기와로 장식한 담장이 사방으로 둘러쳐져 있으며 출입문 앞쪽으로 수령이 100년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가 서 있다. 우불산신사 앞으로는 개천이 흐르고 있는데, 구전에 의하면 예전에 이 개천은 명주실 한 타래를 다 풀어도 끝이 닿지 않을 정도로 수심이 깊었다고 한다.
 |  | | | ↑↑ 성의 서쪽은 급경사로 가파르며 성을 쌓았던 돌들이 아래로 흘러 내려가고 있다. | ⓒ 웅상뉴스 | | 우불산신사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우불산의 옛 명칭은 우화(于火)이며 24 소사(小祀) 증 하나로 신라시대부터 나라의 태평과 국민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 해마다 음력 이월에 제의를 올렸다고 하며,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는데, 특히 기우제의 효험이 있었다고 전한다.
고려시대에는 소사에 산악신이 표기되어 있지 않아 이 시대에도 국가에서 관리를 보내 제를 지내게 하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태종실록 권1 태종 14년 8월 신유조에 따르면 조선시대에는 신라시대와 같이 우불산신제가 소사로 받들어졌고 국가에서 매년 봄․가을에 향축(香祝)을 내려 제사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0 울산군 사묘조에 보면 우불산신사는 1623년(인조 1)에 세워졌으며, 1644년(인조 22)에 제사(齊舍) 세 칸을 세우고 임야 및 전답 5두락을 단의 재물로 하여 해마다 이월과 팔월 하정일(下丁日)에 울산부사로 하여금 제를 지내게 하였다.
 |  | | ↑↑ 산성내에 관음사라는 암자가 있다. | ⓒ 웅상뉴스 | 조선시대 우불산은 울산군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근대 이후 행적구역이 개편되면서 지금은 양산시에 편입되어 있다.
우불산신사는 이후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쳤다. 지금의 건물을 1918년에 다시 세운 것으로 1974년에 중수하였다. 중수할 당시 제당은 맞배지붕 형태의 목조건물로 무단청이었으며, 제당 출입문 위에는 ‘우불산신사(于弗山神祀)’라는 나무현판이 걸려 있었다. 이후 1980년대 후반에 ‘우불산신사 보존회’에서 다시 보수하여 현재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우불산신사는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보수 전과 대비해 그 특징을 살펴보면 우선은 제당의 건물에 색을 입히고 단청으로 장식한 변화와 제당 출입문 위의 현판이 ‘우불신사(于弗神祀)’로 교체된 점을 들 수 있다. 이 밖에도 제당에 오르는 계단과 기단의 일부를 시멘트에서 돌로 교체하거나 제당 출입문에 유리를 부착하고 담장에 기와를 얹어 마감하는 등의 변화도 있었다.
우불산신사의 내부에는 나무로 만든 제단이 중앙에 놓여 있으며, 제단 위에는 나무로 만든 위패 보관함 안에 ‘우불산신령 위(于弗山神靈 位)’라고 쓴 나무 위패가 모셔져 있다. 우불산신제는 신라시대 이래로 국가의 24 소사 중 하나로 매해 음력 이월과 팔월 하정일 두 차례 제를 모셔오다가 우불산신제가 국가적 의례로 행해지는 전통이 단절된 이후에는 우불산 일대 지역(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양읍과 웅촌면 일대까지)을 수호하는 수호신으로 섬겨져 지역주민들이 주민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며 공동으로 제의를 행해 왔으나. 근래에는 제의 담당층이 제한되어 서창, 소주, 덕계, 평산 등 네 개 마을 주민들이 주관하며 매해 한차례 음력 팔월 하정일에만 제의를 베풀고 있다.
우불산신제를 주관하는 제주는 매해 음력 팔월 초유일(初酉日)에 우불산신사 보존회와 유림회 회원들이 모여 회의를 거쳐 선정한다. 제주의 선정 기준은 그해 부정이 없는 사람 중에서 마을의 발전에 공헌한 이나 생기복덕을 보아 깨끗한 이를 가려 선정한다. 제주로 선정된 이는 제를 지내기 사흘 전부터 부정을 가리는 금기를 행하며 제당 주위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려 부정을 먼저 가신다.
과거에는 제주의 금기가 제를 지낸 뒤에도 일정 기간 지속되었으나, 근래에는 제를 지낸 뒤 달리 행해지지 않는다. 제의를 베풀 때에는 제주를 비롯하여 마을 주민들도 함께 참여한다. 이때 출산과 혼사는 달리 가리지 않으나 초상과 사고 등 흉사는 가려 흉사가 있는 이는 제의에 참여하지 않는다.
제의에 진설하는 제물은 녹포(근래에는 쇠고기와 돼지머리로 대신함), 생선회 또는 육포, 생미나리, 살짝 익힌 조밥, 수수밥, 과일(밤, 대추, 배, 감, 석류) 등이다. 이를 음복하면 액병을 물리칠 수 있다고 여긴다. 제의의 절차는 제당에서 산신제만 지내며 제의 방식은 유교식으로 행한다. 제의가 끝난 뒤에는 제물의 일부를 떼어 제당 앞에서 잡귀를 풀어먹이는 시석을 행한 뒤, 우불산신사 안의 부속건물에서 날것으로 올린 제물을 조리하여 제의에 참여한 이들이 제당 옆에 위치한 사찰에서 함께 음복한다. 음복이 끝난 뒤에는 제의를 주관한 우불산신사 보존회 회원들이 모여 총회를 개최한다.
우불산신사의 연원에 대한 구전자료는 주로 조선의 건국주인 태조 이성계와 연계되어 전해진다. 일설에는 조선을 건국하기 전 전국의 명산들을 돌아보던 중 우불산에 오게 된 이성계가 우불산의 형세가 장엄하고 경관이 수려한 것에 반한 이성계가 이곳에서 발원하면 소원을 성취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 우불산신사를 짓게 하였다고 한다.
다른 일설에는 조선 왕조가 개창될 무렵 이성계가 우연히 이 마을을 지나다가 우불산에 산신이 거주한다는 말을 듣고 왕으로 등극할 수 있기를 기원하며 제를 지냈는데, 이후 우불산신의 도움으로 왕으로 등극한 이성계가 명을 내려 우불산신사를 짓게 하고 유림들로 하여금 봄․가을 정일에 제를 지내도록 하였다고도 한다.
우불산신의 영험함에 대한 구전자료는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여 일본군을 응징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먼저 임진왜란 때 왜병들이 우불산 남쪽에 진을 치자 우불산신이 신풍(神風)을 일으켜 왜병들을 몰살시켰다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이 있던 어느해 울산부 서면장(西面將)이 우불산성에 진을 치고 왜군과 맞서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때 왜병들이 지경고개를 넘어 화승총을 쏘면서 우불산성으로 쳐들어 왔다. 바로 그때 남루한 차림의 한 도인이 걸어와 왜병들을 바라보며 필묵으로 글을 쓰고는 글쓴 종이를 손에 들고 하늘로 날렸다. 그러자 도인이 글을 쓴 종이가 바람에 실려 대운산 상봉에 떨어졌다. 그때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불어 낙엽이 왜병이 있는 곳으로 떨어졌는데 떨어진 낙엽은 모두 병졸로 변하여 왜군들과 대적해 싸워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왜병을 섬멸시킨 바람을 우불산신이 현신하여 일으킨 바람이라 하여 신풍(神風)이라 하고 패한 왜병들의 시신이 쌓여 있던 곳을 왜시등(倭屍嶝)이라 불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에 이 지역에 부임한 일본인 관리들은 본인과 가족들이 해를 입어 일본인들이 이 지역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였고, 특히 우불산신사가 있는 곳은 함부로 지나가지 못하였다고 한다.
 |  | | ↑↑ 우불신사 | ⓒ 웅상뉴스 |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우불산신의 영험담은 다음과 같다. 일제강점기 때에 일본이 우불산신사를 강제로 헐도록 하였는데, 사람들이 신벌을 두려워하여 함부로 나서지 못하자 윤씨라는 사람이 큰소리를 치며 앞에 나서 사당을 허물기 위해 기왓장을 뜯었다. 그런데 얼마 후 기왓장을 뜯은 윤씨는 갑자기 병을 얻어 피를 토하고 죽고 말았으며, 이 일을 지휘했던 일본인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한편, 우불산 앞길에는 아무리 고관대작이라 해도 말에서 내려 경의를 표해야만 했다. 이를 어기고 말을 탄 채 지나가다가는 화를 피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루는 경상감사 양씨가 이러한 소문을 익히 들어 알면서도 우불산신을 믿지 않고 이 같은 사실을 의심하여 말을 탄 채 제당 앞으로 지나갔다. 그러자 홀연히 한 점 붉은 구름이 산꼭대기에 뜨더니 맹호로 돌변해 무례하게 말을 타고 제당 앞을 지나간 경상감사 양씨를 물어 죽였다. 그 무덤이 아직도 웅촌면 검단리 산기슭에 있다고 전해진다. |
최철근 기자 /  입력 : 2013년 07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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