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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상사람들의 삶을 말하다(49)-상

아끼는 것이 최고 미덕이었던시절 삶의모습
웅상뉴스 기자 / jun28258@gmail.com입력 : 2018년 09월 11일
모든 생명체들의 공통된 소망은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행복하게 사는 모습은 잘먹고 잘사는 모습이며 도덕적인 모습에서 보면 배고프지 않게 적당하게 먹고 먹은 것을 탈없이 소화를 잘 시켜 무난하게 배설 잘하고 추위와 더위로부터 보호 받으며 편안하게 잠 잘자고 건강하고 건전하게 옳고 바른 길을 택해 살아 가는 모습이다.

인간 속성으로 보면 맛좋은 음식으로 맘껏 배부르게 먹고 부와 권력을 맘껏 누리며 쾌락을 즐기며 사는 모습이다. 먹지 않으면 굶어 죽게되고 추위와 더위를 막지 못하면 생명을 부지할 수 없기에 본능적으로 체내 음식 공급이 필요하면 배고픈 고통을 주어 음식을 먹게 했고 추위와 더위를 느끼게 하여 이를 피해야 한다는 본능을 가지도록 한 것이다.

인간이 동물과 흡사하게 살아갈 원시 시대에 하늘이 내린 인간성을 지키며 살아가다편리한 생활에 맛을 들여 이 욕구는 점차 무한하게 확대되고 욕구를 충족하는 방법이 발전해 감에따라 욕구는 충족하는 만큼 행복하다는 안정감보다 한편으로는 더 불안하고 더 허탈하게 하고 있다.

갈수록 빈부의 격차는 더욱 심화되고 계층간에 조화를 이루기 어려운 환경이 형성되어 계층간에 갈등은 갈수록 더해가고 있다. 살아가는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 추구이며 국가가 지향하는 목표도 국민의 행복 추구이다. 모든 정책은 국민 행복을 이루기 위한 수단 이어야 한다.

우리는 목적과 수단을 분별하지 못하는 시대를 살아 가고 있다 1960년대 이전까지 우리 지역 민들의 대다수는 부자가 되겠다는 욕망으로 살아간 것이 아니라 처절한 배고픔이나 탈피해야 겠다는 생의 목표로 살아 왔다. 가족 끼니 걱정 안하고 한해 여름동안 하얀 쌀밥에 소고기국을 한두 번이라도 먹을 수 있는게 대다수 주민들의 간절한 바램이었다.

웅상지역에는 천석군의 부자도 없었던 것으로 전해온다 용당에 거주한 울산 박씨와 석천에거주한 학성 이씨 가문에서는 많은 노비를 거느리며 오랫동안 세도가로써 풍요를 누리며 살았다는 기록은 있지만 그들은 부를 탐하여 재산을 축적했다는 기록도 구전도 없다.
조선 중기 이전에는 구전이나 기록으로도 전해 오는 특별한 부자에 대한 이야기가 없어 알 수 없고 조선 후기에 몇백 석을 수확한 부자는 몇 집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 오지만 뚜렷한 기록은 없고 후덕한 부자의 공을 기리는 비석이 7번 국도변 주진리와 평산리 경계지점인 삼성명가 아파트 입구 비석거리에 정기호 혜렴 불망비와 오덕근 송덕비가 건립되어 있었다.

도로 확장으로 철거될 것을 1999년 12월28일 웅상향토문화 보존회에서 웅상도서관 앞으로 이전했다 비문에 새겨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기호혜렴불망비(鄭基鎬惠廉不忘碑)

공(公)은 고종때 웅상면 덕계리 외산 부락에 거주한 부자로 인심이 후하여 소작인들과 주민들에게 물심양면으로 선행을 하여 그 은혜를 기리고자 주민들이 비석 거리에 1915년 3월에 세웠다.


오덕근 송덕비(吳悳根頌德碑)

공은 조선조 대원군 시대의 사람으로 통정대부 비서감승을 지낸 분으로 본 지역에 농토를 많이 가지고 있어 소작인들에게 세를 후하게 하고 가뭄 때에는 소작인들과 주민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는 등 선행을 하였음으로 죽은 뒤에 소작인들이 송덕비를 1916년 11월에 세웠다.

1950년경부터 1970년경까지의 농촌마을의 최고 부자는 벼100석을 수확하는 농가와 마을에서 방앗간을 경영하는 집이었고, 면에서 최고 부자는 양조장을 경영하는 댁이며 군단위 최고 부자는 정부 양곡도정공장을 하는 도정공장이었다.

1970년경에는 새로운 부자는 주유소를 경영하는 집이 부자였다. 벼 80석이상~100석 가깝게 수확하거나 100석을 능가 수확하는 농가에서는 최고 새경을 받는 머슴 두 사람을 들여야 했다. 최고 새경량은 연도 따라 인상이 되었다. 벼 8석에서 10석정도가 되었다. 먹고 사는것이 가장 중요한 일로 생각했던 시절이라 농촌의 모든 경제측정은 쌀값이 중심이 되었다.

인부의 노임도 마을 경조사의 부조 기준도 쌀량으로 했고 마을의 친목단체 운영자금도 쌀을 현금처럼 관리했다. 1960년경 시골 농촌 사립중학교 한달간 월 사금으로 쌀 10되 2000환(화폐교환이전)정도였으며 1965년경 도시 공립고등학교 한달간 월사금은 쌀 15되값 450원 정도했다.

당시 중등학교 학생 한 사람의 1년치 월사금은 최고 장정머슴 반년치 새경을 받쳐야 했고, 그 이외 학비와 관련된 책값이며 먹는 것 입는 것 차비 용돈을 합하면 월사금 이상으로 들어가야 하였으니 대다수 농촌가계의 사정은 끼니 이어가기도 어려운 사정에 자녀 공부시킨다는 일은 가계의 가장 무거운 짐이 되어 웬만한 가정은 자여 상급학교 공부시키는 일을 포기했다.

향학열이 높은 농촌 부모님들의 사정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도시에서도 일자리 구하기가 어려웠지만 농촌에서 일자리란 머슴살이 뿐인데 머슴살이 들어가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최고 장정 머슴이 죽도록 일해도 받은 새경 전체를 다 쏟아부어야 겨우 중등학교 자녀 한 사람의 교육비를 감당할 수 있는 지경이었다. 머슴들의 고달픔은 노예생활과 다를바가 없었다. 머슴들만이 아닌 농사를 짓는 모든농부들은 아무리 추운날에도 아무리 더운날에도 날씨 탓으로 쉬는 날 없이 새벽에 일어나 별이 뜨는 어두운 밤이 되어야 하루 일과를 마치는 연속이었다.

노동시간은 겨울에는 13시간 여름에는 15시간 이었고 농사일은 시름시름 해야 하는 일이 거의 없고 대다수 있는 힘을 다해야 하는 고된 노동이다. 불볕 더위 한여름에는 주로 논메기에 온 마을주민들이 메달리며 두레 논메기를 했고, 추운 한 겨울에는 땔감해다 나르기에 온힘을 다 쏟아야 했다.

그 당시 장정머슴이 받는 1년치 새경 80kg들이 쌀10가마니를 어떤 머슴은 하루저녁 도박판에 가 1년치 피땀을 잠깐 순간에 다 날려버리는 어리석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낄수 있는 것이며 아끼고 또 아껴 이를 악물고 악착스럽게 모아 농토를 구입하여 재산을 증식한 이도 우리 지역에 여러 사람이 있다.

지금 경제 사정과 비교 한다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마을 최고 부자가 수확한 100석중 머슴 새경과 농비를 제하고 나면 70석도 안될 곡식을 가지고 가족 먹고 살고 자녀 대학까지 공부시키고 재산을 증식해 갔다. 지금 벼 100석 전량을 가지고 온 가족 물한모금 마시지 않고 입을 봉하고 가계자금에 한 푼도 소요하지 않는다고 해도 자녀 한사람 대도시의 대학 학비 뒷바라지에도 부족한 처지일 것이다. 한정된 소득에 아끼는 것이 최고 미덕이었다.

먹는 것까지 아끼지 않을 수 밖에 없었다. 사정이 어려운 가정은 끼니 이어가기가 어려워 굶기를 예사로 하고 곡식은 조금 넣고 푸성귀들을 양껏 넣어 끓인 죽으로 연명하고 사정이 나은 가정은 살림늘인다고 아낄 수 있는 것은 다 아끼며 살았다. 입는 옷은 성할 때보다 헤어져 겹겹이 기워 입는 순간이 훨씬 오래였고 신는 신발은 검정고무신이 찢어지면 기워신고 서창장 신발때우는 곳에가 때워 신었다.

양은냄비나 그릇이 깨어지거나 구멍이 나면 때워 이용했다. 먼거리에 나들이를 해야 할 일이 있을 때도 차비가 아까워 걸어다녔다. 웅상에서 남창장까지 왕래했고 빈몸으로 오가기도 힘든 거리를 시장에 내다팔 농산물과 시장에서 구입한 먹거리와 생활용품을 무겁도록 지고이고 비지땀을 흘리며 도보로 이용했다. 용변을 보고 지금은 아주 고급 휴지를 사용하지만 억센 종이마저 구할 수 없어 짚으로 처리했다.
농촌어린아이들은 장난감을 돈주고 구입하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어린아이들은 가지고 놀 장난감을 스스로 만들어 놀았다. 물총, 화약총도 만들고, 얼음지치는 놀이기구도 수래도 만들고 자치기 등을 만들어 가지고 놀았다. 축구공을 구입할 사정이 못되어 짚으로 꼰 새끼줄을 단단하게 감고 또 감아 둥근 공처럼 만들어 축구공 대신 공차기를 했다. 깡통차기 놀이도 했다.

놀이기구가 필요하지 않는 빈몸으로 하는 놀이도 있는 힘을 다하는 격한 놀이 일색이었다. 장난감을 만들기 위하여 이용하는 연모도 옳지않아 망치를 이용해야 할 곳에 망치가 없어 돌을 이용해 못을 박기도 했고, 톱을 이용해야 할 곳에 녹쓸고 망가진 톱으로 나무를 짤라야 하는 과정에 여간 힘든일이 아니었다.<다음호에 계속>
↑↑ 박극수
시인
(현)양산문화원 부원장
양산시 향토문화연구회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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