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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웅상뉴스(웅상신문) |
| 나의 외가댁은 두 가문이시다. 경주이씨댁과 청송심씨댁이다. 경주이씨 외가댁은 두분 누나를 낳으신 엄마 친정이시고, 청송심씨 외가댁은 나를 비롯해 세사람의 남동생과 두 사람 여동생을 낳으신 엄마 친정이시다.
두 외가댁을 가지게 된 것은 경주이씨 엄마께서 형을 임신하여 형을 낳으시다 산고로 형과같이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는 두 딸을 가진 홀아비 신세가 되어있다 재혼을 하여 만난 부인이 청송심씨 엄마다. 18세에 열다섯살이나 많으시고 두 딸이 있는 아버지와 배필이 되게된 경위는 시대를 잘 못 만난 탓이다. 일본은 대동아전쟁으로 패전의 기미가 역력해지자 발광하는 자세로 갖은 방법을 다했다. 우리나라 젊은남자 18세부터 30세까지 성한 남자는 모두 징병과 징용으로 다 끌고가고 지적장애자와 신체적장애가 있는 분들만이 고향을 지키고 있는 상태였다.
여자분들은 13세이상 결혼을 하지 않은 성한 처녀들은 읍면 단위로 인원을 배정하여 강제로 정신대로 끌고 갔다. 이래도 계획 인원이 충원이 되지 않자 길거리나 빨래터에서 빨래하는 처녀, 논밭에서 일하는 처녀, 뱃틀에서 배를 짜고 길삼을 하는 처녀들을 분별없이 강제로 끌고 갔다. 시국이 이런 상태에 정신대 동원 적령기를 맞은 두 딸을 (엄마와 바로밑에 이모) 가지신 경주이씨 외할머니는 안절부절이셨다. 선비 가문에서 귀하게 자라 매사에 초연한 자세로 임하셨지만 두 딸이 언제 끌려갈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초조함과 근심이 가득했다. 불안한 맘을 견디지 못해 외할머니는 용하다고 이름난 점쟁이를 찾아가 두 딸의 앞날을 점처보니 엄마는 나이 많은 상처한 사람과 결혼을 해야만 명을 이어 갈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젊은 나이에 절명을 한다는 점괘가 나왔다. 딸들의 정신대를 면하기 위하여 많은 지인들에게 간곡한 부탁을 하여 혼처를 구하고 있는차 상처하고 두 딸이 딸린 나이 많은 아버지 혼처가 나와 점쟁이 점괘에도 맞아 떨어지고 아버지는 징병과 징용대상에 면하는 나이가 되어 전쟁터에 끌려갈 위험도 없어 외할머니가 보시기에 안성맞춤인 배필이라 결혼 당사자의 의사는 아예 물어보지도 않고 서둘러 엄마와 아버지는 결혼식을 하게 되었고 이모님도 엄마 결혼 후 두달만에 결혼식을 하셨다. 이때부터 청송심씨 엄마는 당신 이름도 당신 친정은 없어지고 경주이씨 엄마 택호 따라 평생 주남댁이란 택호로 불리며 사시다 세상을 떠나셨다.
어린시절에는 외가댁이 두 댁이라도 왜그런지도 몰랐고 그게 이상한 일인지도 몰라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5-6학년 정도가 되어 외가댁이 두 곳인 사정을 알고 진작은 충격이었지만 엄마의 차분한 설명으로 사정의 배경이 어쩔 수 없었다는 사정을 알고는 어린시절과 같이 두 외가댁을 왕래했다. 경주이씨 외가댁은 주남에 계셨고 청송심씨 외가댁은 울주군 청량면 신촌에 계셔 신촌까지 갈려면 울산까지 버스를 타고 당월가는 버스를 갈아타야 했는데 당월가는 버스는 하루에도 3-4회 운행하는데 버스 시간이 정해진 시간이 없어 80여리 길을 걸어 오고 간 때가 많아 가기가 어려웠고 경주이씨 외가는 가까워 이웃가는 기분으로 걸어 자주 왕래했다. 어린시절 누나들이 주남 외가댁에 가자고 하면 내가 먼저 나서 설레발이를 치고 신바람으로 외가를 다녀오고 했다. 나는 친가의 선대 어른들도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도 인척들도 자랑스러워 친가도 너무 좋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만 두곳의 외가도 친가 못지 않게 자랑스럽다고 생각하고 있다.
주남 외가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학성이씨댁에 출입한 제종누님댁이 계셨다. 누님은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될 정도의 인사성과 예의가 바른 누님이시라 누님은 평소 인격대로 반갑게 대해주시고 모든 식구들이 하나같이 반갑게 맞아주셨다. 다음으로 주남마을 중간쯤에는 외당숙부님은 경찰직을 역임했다는 이유로 공비들에 의해 무참하게 희생당하시고 외당숙모님은 나의 외제종동생 외동아들과 같이 큰 저택에 살고계셨다. 외당숙모님도 너무 반갑게 대해주셨다. 외당숙모님 친정은 명곡 학성이씨댁 따님으로 아버지 외가댁 가까운 친척이시라 아버지를 대하실 때 오빠라고 부르시고 우리를 대할 때 친정식구처럼 대해 주셨다.
주남 안터 외가댁에 들어서면 울산박씨 외할머니는 맨발로 뛰어 나오셔 누나들과 나를 안아주시고 등과 엉덩이를 두드려 주셨다. 우리에게 유달리 반갑게 대해 주셨던 것은 먼저 가신 따님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내가 중년이 된 후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외가댁에는 언제 어느때 가도 큰방 앞 마루에는 한말 이상 들어가는 옹기그릇인 큰버지기에 농주(막걸리)가 가득 채워져 있고 그 위에 박바가지가 띄워져 있다. 옆에는 안주 찬거리 있고 그 옆에는 술찌끼미가 가득하게 담겨 있었다.
이토록 많은 술을 마련해 둔 것은 외가댁 어른들이 술을 즐겨하시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배를 예사로 굶는 사람이 많은시절 술은 먹고 싶고 술을 담걸 사정이 못되는 가난한 이웃분들이 맘껏 마시고 가라는 배려이고 술찌끼미 역시 밥거리가 없어 굶는 이웃분들의 자존심을 생각해 짐승먹인다는 핑계로 가져가 죽이라고 끓여 먹고 명줄이라도 이어가라는 후덕한 인심의 실천이었다. 외가댁 입구에는 큰 회나무가 한그루가 있었고 대문은 아예 없었다. 입구를 들어서면 오른쪽 헛간에는 디딜 방앗간이 있었다. 동편으로 향한 큰체 옆 북쪽 방향에는 우물이 있었다. 우물 옆에는 담장이 처져있었지만 담장 일부를 헐어 누구나 맘껏 출입이 가능하도록 해두었다. 술이 먹고 싶은 사람은 언제 어느때 어느 방향으로 들어와 맘대로 마시고 가라는 분위기 조성이었다. 내가 지금껏 보아온 일반 가정집에 술을 가장 많이 빚은 댁은 우리 외가댁으로 알고 있다.
옛날에는 우물이 있는 집이 한마을에도 몇집이 안될 때 멀리 물길러 가지 말고 우물이 없는 이웃분들은 외가댁에서 물길러 가라는 배려이며 디딜 방앗간도 마을 전체 몇군데 밖에 없었다. 디딜 방앗간도 맘껏이 이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청송심씨 외가댁은 선대부터 외할아버지까지 울산군 대현면 야음 청송심씨 집성촌에서 태어나시고 성장하셔 어떤 연유인지 신촌에 정착하신걸로 안다. 외할머니는 울산 학성공원 도산성 자락 마을 경주이씨 집성촌 유복한 가정에서 귀하게 자라 공부도 많이 하시고 책도 많이 읽은 당대 여성으로서는 보기 드문 지성인이셨다. 시집오실 때 노비까지 거느리고 오셔 시집오신지 얼마까지 외할머니 시중을 드시다 친정으로 돌려보냈다 한다. 외할아버지께서는 선비의 후예이시고 당신도 선비이시지만 가세가 기울어 가난한 농부가 되어 몸에 익숙하지도 않은 서툰 농사일을 감당하시면 살아가셨다 한다. 그때 농촌에는 품앗이를 하지 않으면 농사 일손을 구하기가 어려운 시절에 외할머니는 농사일을 할줄도 물랐고 해볼려고 엄두도 내어 본일 없이 일생을 살다 가셨다. 특히 모심기 계절에는 부엌에 사용하는 부지게이도 움직인다는 계절에도 평생 모 한포기 심어볼 엄두도 내어보지 않고 일생 살다 가신 분이다. 이런 외할머니를 외할아버지는 한마디 원망도 하지 않으시고 당신 혼자 농사일을 다 감당하셨다 한다. 이런 품성은 고매한 선비 사상을 가지신 분이 아니시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인격의 실천이다.
외할아버지의 철학을 볼 수 있는 면은 나의 외사촌형이시며 외할아버지 장손의 이름을 심우생(沈愚生)이라 지어셨다. 이름 그대로 한자 의미를 해석하면 아주 깊게 낮은 자세로 양보하며 살아 가라는 의미로 해석되는 이름이다. 장손 이름을 지어신 모습만 보아도 겸양의 선비정신을 가지신 분이란걸 알 수 있다. 외할머니께서는 1남5녀의 자녀를 두셨다. 가정사정이 어려워 서당과 학교 문전에도 보내지 못하고 당신이 자녀를 가르쳐 초등학교 교과서를 마음대로 읽고 쓰도록 하셨고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를 맘대로 할 수 있도록 자녀교육에 열정을 다하신 분이다. 엄마 형제 자매분들의 모습은 엄마 모습을 통해 읽을 수 있다. 우리 엄마는 요조숙녀이시며 현모양처이셨다. 항시 조용하시고 있는 듯 없는 듯 하시며 가족을 위해 예사로 뜬눈으로 지세는 날들이 부지기수로 많은 분이셨다. 외숙부님, 이모님들도 부모님의 영향으로 엄마 같은 품성을 지니신 분들이다.
나의 두 외가댁에는 신체부분이 불편한 분이 계셨다. 경주이씨 외가댁에는 외사촌 형님이 어린시절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가 불편해저 많이 절며 생활을 하셨고 청송심씨 외가댁에는 외숙부님이 20대 초반에 마을에서 힘겨누기를 하다 다쳐 침을 맞았는데 침을 놓은 의원이 독사에 물린 분에게 놓은 침을 소독을 하지 않고 외숙부님에게 침을 사용해 이로 인하여 외숙부님 한쪽다리 허벅지 부분까지 절단하여 목발을 이용하며 살아가셨다. 엄마는 평생 거친 욕설 한마디 하지 않으시고 살아가셔 우리 형제들도 욕설을 잘 하지 않지만 어쩌다 친구들과 놀다 절름발이 병신이란 말을 하면 노발대발 하셨다. 이는 당신 피붙이 중에 몸이 불편한 분이 계셔 맘에 상처가 되어 그런 것일 것이다.
경주이씨 외가댁 형님은 몸이 불편해 학교 통학이 어려워 정규학교 교육을 받지 못하고 마을 서당에서 오랫동안 교육을 받으셨다. 내가 아는 바로는 마을에서 붓글씨도 제일 잘 쓰시고 한문도 가장 많이 아는 분으로 알고 있다. 마을에 붓글씨 쓸일이 생기면 도맡아 하셨다. 외가댁 어른들은 평소에 일을 열심히 하시다 서창장날만 되면 모두 서창장에 나가신다. 생산한 농산물을 팔기 위하여 가시고 구입 할 물건들을 구입도 하지만 서창장에 가면 평소 보지 못하던 보고 싶은 분들을 만난다는 설레임으로 가신다. 특히 외사촌 형님은 불편한 몸으로 장날마다 빠지는 날 없이 걸어 장에 가 친인척들을 만나 선지국이라도 같이 나누고 막걸리 한사발도 대접하는 재미로 가신다 하셨다. 얼마나 구수하고 고향 정기가 어린 모습이시다. 형님과 서창장날 자주 만나 점심 식사도 많이 했다.
외사촌 형님은 경주이씨 우리엄마 자기의 고모님 제삿날을 한번도 잊이 않고 제사장에 보태라며 정성의 금액을 담은 봉투와 성심을 다해 형님의 자필로 쓴 축지방을 정갈하게 포장하여 전해주시며 동생도 축지방을 잘 쓸수 있지만 나의 맘을 전달하니 받아라 하며 전해주셨다.
청송심씨 엄마의 제삿날도 단 한 번 잊은적 없이 고모님 제사 잘 모시라 하시며 경주이씨 엄마에게 하시는 모습과 똑같은 정성을 전달해 주신 분이다. 옛날 세상에도 찾아보기 어려운 모습이었지만 지금의 이야기는 전설의 고향쯤으로 들리는 모습이라 정말 감동을 주신 분이다.
청송심씨댁 외숙부님은 한쪽 다리로 목발을 이용하여 생활하시면서 애처롭고 가슴아픈 모습으로 다리를 바라보면 네가 내 다리를 보니 맘이 아픈 모양인데 정작 당신은 아무렇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어떤이는 태어날 때 앉은뱅이로 태어나 평생을 살아가는 이도 있는데 나는 멀쩡한 두 다리로 어린시절 맘껏 뛰놀며 자랐고 철이 들기 시작한 20초반에 다쳐 남들 다 가는 징병 징용도 면제되고 그 덕분에 좋은 아내 만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하셨다. 외숙모님은 헌신적이시고 몸도 건강하시고 민첩하시며 활기넘치게 매사에 임하신 분이다. 마을분들이 종동댁이라는 택호를 두고 오토바이란 별명으로 호칭했다. 외할머니께서 못하신 품앗이도 하셨다. 외숙부님은 한쪽 다리 이외는 모든 신체부분이 다 멀쩡하니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 하시며 감사가 넘치는 생활을 일관하신 분이다.
팔순이 넘어 귀가 절벽이 되어 다른 분들과 의사소통이 어려운 상태가 되셔도 어떤이는 태어날 때부터 벙어리로 태어나 평생 말도 한마디 못하고 듣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는데 지금까지 잘 듣고 살아온 것도 얼마나 고마운 일이 아닌가 하셨다. 팔순이 넘어 트랙타를 구입해 연세 많은 어른이 불편한 몸으로 손수 트랙타를 운전하여 대가 없이 일손이 없는 마을 분들의 농토를 자진하여 다 갈아 주신분이다.
팔순 중반을 넘어서 전혀 앞을 볼 수 없는 지경이 되셔도 어떤이는 태어날 때부터 두 눈을 감은 상태로 태어나 평생을 사는 사람도 있는데 지금까지 세상 잘 보며 잘 살았다 얼만나 고마운 일이 아닌가 하셨다. 외가댁에 인사차 방문할 때마다 당신은 참 좋은 복을 타고 나신 분이라는 말씀을 연속하셨다. 좋은 부모님 만나고 좋은 형제자매 만나고 좋은 아내 만나고 좋은 자식들 두고 좋은 조카들과 친인척 두고 좋은 이웃분들 만나 좋은 세상 참 행복되게 잘 살았다는 일관된 말씀을 하신 분이다.
아흔을 다 채우지 못하시고 아흔 가까운 날 팔십아홉 연세에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세상을 하직하셨다. 외숙모님께서는 아흔 연세까지 손수 재배한 농작물을 시장에 팔러 다니시다 자식들의 간곡한 만류에 지금은 노인유치원에 다니시며 98세의 연세에 건강한 생활을 임하고 계신다.
나의 두 외가댁에 가면 제일 먼저 묻는 안부가 경주이씨 외가에 가면 청송심씨 외가댁 안부를 묻고 청송심씨 외가댁에 가면 경주이씨 외가댁 안부를 물으시며 자주 찾아뵈옵고 인사드려라 하시는 당부 말씀에 네 라는 답변을 철석같이 하고도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뵈옵지 못했다. 두 외가를 가질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된 사정은 자랑스럽지는 않지만 두 외가댁을 가진 나로서는 자랑스러운 가문이 나의 외가댁이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 자랑스럽다.
쓸 내용이 너무 많지만 지면 관계로 생략하게 됨이 너무 아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