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윤현주/<<산사의 향기>> 편집장·전 부산일보 논설위원
|
|
헤르만 헤세(1877~1962)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지성과 감성이라는 존재의 상반된 두 측면이 어떻게 작동하며, 대립과 갈등을 넘어 궁극의 조화에 도달하게 되는지를 아름다운 서사로 펼쳐 보이는 작품이다.
삶의 희로애락을 두루 경험한 헤세의 자전적 소설. ‘우정의 역사’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나르치와 골드문트의 우정을 기본 골격으로, 상반된 두 주인공이 각자 방식으로 완전성을 추구해 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보여 준다.
어릴 때 어머니를 잃고 성장한 미소년 골드문트가 아버지를 따라 마울브론 수도원에 오는 장면에서 소설은 시작한다. 골드문트는 어린 시절을 잊고 나르치스처럼 훌륭한 수도사가 되기 위해 희랍어 공부와 학문 연마에 열중했다. 어느 날 친구들의 유혹으로 수도원을 빠져나가 마을 처녀들과 유희를 즐기고 온 골드문트.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던 중 선생 나르치스에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으면서 두 사람은 사제지간에서 친구 사이로 발전한다. 상반된 성격의 두 사람은 양극과 음극처럼 서로에게 끌렸다.
골드문트는 나르치스를 통해 가슴속에 집시이자 관능의 화신인 어머니의 모습을 싹틔우기 시작한다. 뛰어난 통찰력을 가진 나르치스. 그는 친구 골드문트가 평생 금욕적인 구도자의 길을 걸을 수 없는 ‘뜨거운’ 존재임을 간파한다. 자신은 명상가요 분석가지만, 골드문트는 몽상가이며 동심의 소유자. 그의 관심은 종교가 아닌 그림이나 음악의 세계임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골드문트에게 자신의 길을 가도록 유도한다.
수도원을 떠난 골드문트는 수많은 여성 편력과 방랑 생활을 하며 페스트로 고통받는 인간 군상 등 다양한 세상 경험을 하게 된다. 또 유대인 학살을 목격하고 피치 못하게 두 번의 살인을 저지른다. 골드문트는 들판을 헤매다 농부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르며 수도원의 종소리와 미사, 수업을 먼 추억으로 잊는다. 사랑에는 언어가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만약 사랑이 언어를 필요했다면 오해와 어리석음으로 가득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골드문트. 그는 천상 예술가였다.
골드문트는 총독의 애첩과 간통을 하다 총독에게 들통나 감옥에 갇히고 다음 날 교수형에 처할 신세가 됐다. 그때 수도원장이 된 나르치스가 그를 구하여 수도원으로 다시 데리고 온다. 그곳에서 그는 나르치스의 배려로 조각 활동에 매진하며 모처럼 평온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나르치스가 묻는다. “예술이 자네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었는가?” 골드문트의 대답. “그것은 무상의 극복이었어. 인간 생활의 어리석은 유희와 죽음의 무도에서 살아남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 것이지. 그것은 세대와 세계를 뛰어넘어 영속하면서 순간의 피안에다 형상과 신성이 고요한 나라를 세우는 거야.” 골드문트의 입을 빌린 헤세의 예술론처럼 읽히는 대목이다.
나르치스는 골드문트의 조각 작품을 찬양한다. “이전에는 예술이란 사색이나 학문에 비해 심각하게 받아들일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지. 정신은 영원한 것에 대한 인식을 열어주는 데 반해, 물질은 오히려 인간을 무상한 데로 끌어내린다고 말일세. 그러나 이제 인식으로 통하는 길은 수없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
플라톤적인 이원론의 세계, 즉 정신세계(이데아)와 물질세계는 구별되며 정신세계만이 가치가 있다는 기존 세계 인식론에 대한 철학적 반론이다. 서구 전통 철학과 예술의 형이상학적 가치관을 강학 비판했던 니체의 사상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골드문트의 방황은 끝나지 않았다. 수도원에서의 안락함과 집착이 자신의 자유를 옭아맨다고 여긴 그는 다시 방랑길에 나섰다. 하지만 그는 결국 수도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제 싱싱한 젊음과 넘치는 에너지는 오간 데 없고 지치고 늙고 병든 사내의 모습만 남았다. 골드문트는 나르치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하게 숨을 거둔다.
“죽음이란 크나큰 행복이라고 생각하네. 첫사랑의 충족처럼 그런 행복 말일세. 나를 받아들여 무와 순수로 인도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어머니일 거라는 생각을 아무래도 버릴 수가 없어 … ”
헤세는 이 작품을 통해 지성과 감성, 사색과 관능, 종교과 세속, 선과 악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하나로 합일될 때 세계는 조화롭고 아름다워질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나르치스와 같은 아폴론적 존재 형식과 골드문트 같은 디오니소스적 존재 형식의 조화, 그리고 로고스와 에로스의 길항과 승화, 이것은 양극단을 치닫는 현대인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과제가 아닐까.
|
 |
|
| ⓒ 웅상뉴스(웅상신문)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