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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여행은 행운에서 시작됐다. 참여한 이벤트에 1등으로 당첨돼 숙박권을 받았기 때문이다. 남해에 있는 한 북스테이였다. 책을 좋아하기에 사진만 봐도 근사해 보였다. 이런 곳에 하루를 머물 수 있다는 생각에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는지 모른다.
여행 당일. 실로 그곳으로 간다는 게 믿기지 않으면서도 가슴은 마구 설렜다. 날은 흐렸다. 평소 같았으면 흐린 날에 속상할 법도 한데, 이날 계획은 숙소 입실 시간에 맞춰 들어가서 최대한 오래오래 머무는 것이라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런 마음으로 2시간여를 달려 남해에 도착했다. 다소 늦어진 점심을 먹었다. 남해가 멸치 쌈밥이 유명하기도 하고 엄마가 무척이나 좋아하시는 음식이라 이걸로 정했다. 어중간한 크기의 멸치를 지져놓은 이 음식을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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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나 에세이 글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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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멸치를 통으로 먹자니 좀 징그럽고 그렇다고 일일이 뼈를 바르자니 상그럽기 그지없는 탓이다. 여행이 부리는 마법 때문인지 이마저도 대수롭지 않았다. 더군다나 너무나도 맛깔나게 드시는 엄마를 보고 있으니 나도 덩달아 맛있게 느껴졌다. 많다 싶었는데, 남김없이 다 먹었다.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몇 가지 사고 다시 나오지 않을 결심에 저녁으로 먹을 전복죽까지 포장하여 숙소로 향했다.
도착해서 숙소를 그저 바라봤을 뿐인데, 그동안 쌓인 몸의 피로가 다 풀리는 듯했다. 마치 고단했던 나의 삶에 대해 보상을 받는 듯해서 순간 울컥했다. 그저 바다와 산을 바라보고 있는 집일뿐인데도, 풍경과의 조화 때문인지 몹시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게, 마치 꿈의 나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단정하게 정성껏 가꿔진 정원을 둘러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를 꼼꼼하게 들여다보며 감각적인 인테리어에 놀라고 그러면서 곳곳에서 느껴지는 다정한 배려와 세심한 손길에 감동했다. 현실에서 느끼는 꿈같은 순간이 이런 것임을 새삼 오랜만에 느꼈다.
두근대는 가슴에 진정제가 필요했다. 숙소에 다기가 준비돼 있어 차를 우렸다.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차를 한 모금씩 음미하며 천천히 마셨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러고 나서 각자 시간을 보냈다. 엄마는 소파에 앉아 커다란 창문 앞에 펼쳐진 정원을 감상하시고 나는 책상에 앉아 책을 읽었다. 언니는 책장에 꽂힌 수많은 책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구경했다. 저녁 시간에 다시 모여 전복죽으로 식사하고 어둑어둑해진 시간에는 불멍을 했다. 생각지도 못한 이벤트였다.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를 들으며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봤다. 모든 잡념과 시름을 저 불로 태워버리고 싶은 듯이.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욕조에 미리 받은 물에 몸을 담갔다.
10시 반이 넘어선 시간. 며칠 전부터 여행을 설레며 기다리신 엄마도 피곤하신지 이내 주무시고 오전부터 운전하느라 지친 작은 언니도 어느샌가 잠들었다. 나 홀로 남겨진 그 시간. 단지 얼마만이라도 오롯이 홀로 있다는 걸 감각하고 싶었다. 고요한 적막 속에서 방명록에 글도 남기고 독서 모임에 써가야 할 글도 조금 썼다. 고스란히 풀벌레 소리만 들려오는 황홀한 밤이었다. 도시에선 절대 맛볼 수 없는 고요함이었다.
다음 날 아침. 솔직하게 상쾌하진 않았다. 단이 있는 침실과 턱이 있는 거실. 또다시 단이 있는 화장실. 새벽에 2번 정도 화장실에 가시는 엄마가 걱정되어 함께 가드리느라 푹 자지는 못했다. 그래도 좋았다. 단단히 여행이 부리는 마법에 걸렸다. 아침 풍경을 눈에 담고 싶어 밖으로 나가 가볍게 걷고 멍도 때렸다. 그러고 들어와 아침을 차렸다. 전날 마시지 못한 커피를 드립으로 내려서 빵과 과일과 함께 먹었다. 머문 자리를 정리하고 준비된 삼각대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날이 더없이 화창했다. <독일 마을>로 향했다. 엄마와 언니는 두 번째이고 나는 처음이다. 한번은 가보고 싶던 곳을 찾았다. 평일 그것도 월요일 오전인데도, 여행 다니기 좋은 날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았다. 남해는 어디를 가도 바다를 품고 있었다. <독일마을>에서도 숙소에서 보던 바다와 다른 드넓은 바다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남해파독박물관’을 관람했다. 파독인들이 그 시절 겪은 삶의 애환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느낄 수 있었다. 산책하듯 마을을 둘러보고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었으면 걸어야 한다는 게 정론. 다음으로 향했던 곳은 <보리암>이다. 이곳 역시 언젠가는 꼭 한번 가보고 싶었다. 엄마와 함께. 소원을 이루게 되나 싶으면서도 걱정이 앞섰다. 언제부턴가 엄마는 조금만 경사가 져도 걷는데 숨차하셨기 때문이다. <보리암>이 경관이 좋은 만큼 꽤 높은 곳에 있다는 걸 언뜻 알고 있었던지라 과연 엄마가 오르실 수 있을까 싶었다.
엄마도 다시 그곳을 가고 싶은 바람이 있는지 가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으셨다. 20여 년 전 아프지 않았을 때 3번이나 간 곳을 당신도 다시 꼭 가고 싶으신 듯했다. 엄마는 느리게 천천히 쉬엄쉬엄 오르고 또 오르셨다. 혹여 포기하실까 봐 내 마음이 다 조마조마했다. 그렇게 올라 정상인가 싶었는데, 다시 한참을 내려가야 하는 계단을 보고 그만 좌절하고야 말았다.
엄마는 못 가겠다고 하셨지만 내려가기만 하면 되는데 관둘 순 없었다. 다시 오르는 것도 문제긴 했지만 일단 한 계단씩 내려가 보자고 다독여드렸다. 충분히 쉬고 다시 한 계단씩 천천히 오르시면 되니까. 힘들게 내려가 마침내 도착했다. 얼른 앉을 곳을 찾아 앉혀 드렸다. 엄마가 해내셨다는 감격에 눈앞의 풍광은 뒷전이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엄마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몹시도 아팠다. 그렇지만 엄마의 의지 있는 모습이 참으로 경탄스러웠다. 적당히 쉬고 걱정이 컸던 계단을 올라 다시 왔던 길로 무사히 잘 내려왔다. 감사했다.
남해 여행은 커피 한 잔으로 마무리 지었다. 숙소와 비슷한 분위기의 카페를 찾았는데, 무엇보다 사장님이 너무 좋으셨다. 아무런 연고지도 없는 남해에 와서 카페를 시작했다고 하셨다. 짧은 대화 속에서 정이 느껴졌다. 다정한 조언도 건네면서 떠나올 때 우리를 따스하게 배웅도 해주셨다.
선물 받은 하루 덕에 별빛 같은 추억을 만들었다. 기억 속에서 오래도록 반짝반짝 빛날 것 같다. 이번 여행은 나도 좋았지만, 엄마가 더 좋으셨던 모양이다. 연신 다시 가자고 말씀하신다. 남해에 오래 머물기를 바라면서 힘들게 오른 <보리암>도 또 가고 싶으시단다. 다시금 추억의 별빛이 탄생하길 바라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