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의 역사] 박지영은 무안군수를 역임하시다 파당을 이루어 백성들의 삶의 모습이 날로 피폐해져 가는 모습에는 안중에 두지 않고 권력 다툼만 하는 관리들 모습에 환멸을 느껴 관직을 사임하고 1550여 년 경 울산군 서면 명동(현재 양산시 명동)에 입향하여 친인척들의 자녀와 인근 주민들의 자녀 훈육에 전념하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590년 별세하셨다.
학동들에게 문무를 겸비한 선비로 양육함에 목적을 두고 교육에 임하셨다. 아무리 뛰어난 학문을 습득해도 선비다운 행동을 실천하지 못하면 학문은 악덕의 흉기가 된다는 말씀을 늘상하시며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아셨는지 국가가 위기에 처할 순간이 곧 올것이라는 주장을 하시며
제자들과 친족들에게 국가가 위기에 처하면 모든 사적인 생활은 뒤로하고 구국전선에 나아가는 길이 백성의 도리이며 배운자들은 이에 앞장서 모범을 보이는게 선비의 당연한 도리라면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계속 쇠뇌 시키고 전쟁에 필요한 무기를 제작도 많이하시고 구입도 하셨다. 무기 보관 관리도 철저하게 하셨고 무기 사용방법 훈련도 열심히 지도하셨다.
돌아가신 2년이 지난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지를 받들어 전친인척은 혼연일체가 되어 혈기 있는 남자 청년들은 전쟁 일선에 의병으로 출병하고 노약자와 아녀자들은 전쟁 뒷바라지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이를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은 임진왜란에 공을 세운 울산 임진왜란 선무원종 공신에 추대되어 울산 충의사에 배향된 박지영의 친족분들은
아들 박홍남(훈련원봉사) 이산군수를 역임하신 형님 박지변의 아들 박홍춘(기장현감, 언양현감, 서면장) 종손자 박계숙(1605년 함경도 파견 근무 시 기록한 부북일기는 울산시 유형문화재 14호로 지정) 무안군수를 역임하신 조카 박홍권의 아들 박계종(선전관, 판관) 종질 박경은(보성군수, 팔도병사를 역임하신 박이명의 아버지) 사위 김응방(울산 김해김씨 입향조, 훈련원판관) 생질 이겸수(학성이씨 서면파 입향조, 기장현감, 정주판관) 종생질 장희춘(1607년 일본 통신사 종사관으로 수행하면서 7개월간의 행보일기 성재실기 기록) 등 여러 친족들이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켰다.
명동마을은 현 외홈 볼링장에서 화성아파트까지 큰 마을로 형성되어 있었다. 마을이 얼마나 풍족하고 인심이 좋았는지 흉년이 들면 영남일원의 배고픈 분들이 때를 지어 걸인마을을 이루어 명동마을에서 밥을 얻어먹으며 생명을 지탱했다고 한다. 박지영의 5대손 박창수께서는 네분의 아드님을 두셨는데 첫째 아드님과 둘째 아드님은 1800년경 백동으로 이거하시고 셋째, 넷째 아드님은 명동에 계시면서 그 후손들이 지역을 지키고 있다.
백동으로 이거해 가신 분들은 사재로 중등교육기관인 정사를 건립하여 친척들의 자녀와 인근 백성들의 자녀들의 학문교육장이 되었다. 서원이나 향교는 부모님의 신분이 양반이 아니면 교육을 받을 수 없었으나 백동정사는 학동의 부모님 신분의 귀천 없이 노비 자녀까지도 배움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정사훈장은 박지영의 8대손 박상옥, 9대손 박수묵, 박한묵, 10대손 박시형이 지도하셨다. 훈장분들께서는 모두 과거에 응시해 높은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학문적 능력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응시하지 않았다. 과거에 응시한 분은 박수묵이셨다. 단 한번 10대 후반에 영남지방에서 시행하는 초시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으나 그 이후 과거에 응시할 생각도 한 적 없이 고후한 선비정신을 지키며 오직 후진 양성에 일생을 다하셨다.
훈장으로 헌신한 분들의 돌아가시고 모든 장례 절차는 정사에서 교육받은 제자들이 수행하고 비문도 비석도 제자들이 제작 할 정도로 존경받은 스승분들이셨다. 정사 유지는 100여년 넘게 유지해 오다 국가 의무교육 제도가 시행되고 신교육장인 학교가 설립되어 1900년 초반경까지 운영하고 폐지되었다. 웅상지역 마을마다 서당이 생겨난 것도 백동정사에서 가르침을 받은 선비들이 스승의 정신을 계승하고 보답하고저 함이었다.
근대 웅상이 많은 변화를 가져오는 과정에 가장 많은 영향력을 발휘한 분들도 박지영의 후손들이라 자신 있게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