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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웅상뉴스(웅상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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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개한 매화가 봄소식을 알렸건만 산사의 풀잎 위에 내린 하얀 서리가 초겨울 같다. 오늘은 사리암 주차장에서 운문사 솔바람길을 지나 청도 쪽으로 가기로 한다. 페달을 돌리자 냉기가 스친다. 핸들 바를 잡은 손이 얼 듯 아릿하다. 산길 주변의 크고 작은 나무와 마른 풀들이 편안한 느낌을 준다. 겨울을 지난 누런 풀 위로 붉은 진달래가 간간이 보인다.
좁은 도로를 따라 데크 길이 이어지다 사라진다. 자전거에서 내려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걷기로 한다. 단단한 나뭇가지를 뚫고 연둣빛 새잎이 점점이 돋아나는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마음에도 새로운 의지가 새싹처럼 돋아날 것 같다. 겨울을 이겨낸 푸른 소나무들이 싱그럽게 느껴진다.
승가대학이자 스님들의 도량인 운문사를 지난다. TV에서 수십 명의 수행승이 법당에 앉아 수행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 가운데 수도승이 되기 위해 과학자의 꿈을 접고 이국으로 떠나온 비구니 스님도 있었다. 그 스님에게 한 기자가 인터뷰를 청했다. 기자는 스님에게 어려운 수행자의 길을 걷게 된 연유를 물었다. 스님은 한동안 침묵했다. 그 침묵에는 어떤 의미가 담겼을까? 스님은 생명공학 박사였지만, 이국인으로서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이기 위해 익숙한 문화와 결별하고 낯선 세계를 받아들였다. 이제 촉망받은 과학자가 아니라 끝없이 자신을 비우고 한자로 된 경전을 접하며 견성의 길로 들어섰다. 스님은 이른 새벽부터 하루를 마감하고 잠들 때까지 아니 꿈속에서조차 정진을 거듭하지 않았을까? 외국인인 스님에게 수행자의 길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렵사리 입을 연 스님은 현대인들의 생활이 과거보다 많이 편리해졌는데도 여전히 외롭고 다른 사람과 소통하기 힘든 이유는 외부의 요인 때문만은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 또한 이 이렇게 가는 길이 쉽지 않은 것은 자신이 외국인이라서 어려운 경전들과 다른 문화 때문은 아니라고 했다. 그렇게 말할 때, 스님은 얼굴을 조금 붉혔다. 그것은 외부의 요인보다 인간을 지배하는 외롭고 힘든 감정과의 갈등이지 않을까. 튼실한 둥치와 함께 초록 그늘을 드리운 솔바람길이 보인다. 키 큰 소나무들이 제각각 위로 쭉쭉 뻗어 있다. 하늘로 뻗은 소나무에서 맑은 기운이 느껴진다. 오랜 세월 하늘을 이고 모든 것을 비워 푸르른 나무가 된 것만 같다. 소나무는 뿌리로부터 맑은 물을 퍼 올려 쉬지 않고 초록의 꽃을 피워낸다. 우람한 소나무가 끝없는 자성의 길로 들어서서 올곧은 길을 가는 수도승처럼 느껴진다. 투박하고 튼실한 소나무 둥치를 쓰다듬어 본다. 등을 나무에 기대서서 눈을 감는다. 내 등뼈가 마치 나무와 한 몸이 된 듯하다.
대다수의 사람은 성장하면서 받은 깊은 상처로 인해 세상을 방어하며 살고 있다. 나는 어렸을 때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다친 기억 때문에 자전거를 타면 넘어진다는 그림 속에 갇혀 있었다. 성장하여 나이가 들 때까지 자전거만 타면 넘어지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때의 감정과 상처가 어른이 되어서까지 나를 지배했다.
계곡으로 흐르는 물소리가 마음의 문을 두드린다. 흐르는 물소리에 가만히 자신을 맡긴다. 천천히 자전거를 몰아간다. 반원을 그리며 돌아나가자 신선한 바람이 영혼을 두드리며 쓸어내린다. 어린 시절부터 시달려온 불안이 서서히 바람에 흩어진다. 솔바람에 나를 방어하는 두려움이 어느새 사라지고 있다. 좁은 도로변 들녘으로 삐죽삐죽 돋아나는 연둣빛 새순이 눈부시다. 길옆에 선 산수유가 노랗게 꽃을 피운다. 바람이 지나가며 온몸에 충만한 기쁨을 전해준다. 다시 계곡을 따라 천천히 길을 돌아 내려간다. 솔바람 향기를 맡으며 물소리에 귀 기울이자 머릿속이 온통 시원해진다. 고요한 내면에 봄꽃 같은 기운이 자전거 바퀴를 따라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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