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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상사람들의 삶을 말하다(50)-상

정신대 적령기에 처했던 어느 엄마의 생활모습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8년 10월 16일
금번 이야기는 1920년에서 1930년경 출생한 우리 나라 여성들의 수난을 이야기 하고저 한다. 그 시대를 산 어느 한 분의 이야기이지만 같은 시대를 산분들의 삶이 대다수 동일한 삶이였기에 그분의 이야기가 그 시대 여성분들의 삶을 대변하는 모습이라 지역 어느 한분의 이야기를 하고저 한다.

심경출은 청송심씨 가문에서 일정치하인 1926년 울주군 청량면 신촌에서 1남5녀중 위로는 언니 한분과 오빠 한분을 이어 출생하여 아래로는 여동생이 세사람이었다. 가정사정은 유복할 정도는 아니였지만 무난하게 생활 할 수 있을 정도의 사정은 되었고 대대로 선비정신을 이어받은 아버지 심찬구께서는 청송심씨 집성을 이루는 울산군 대현면 야음 서남이란 마을에서 선대 때부터 살다 어떤 사정인지 몰라도 여동생이 시집와 살고 있는 신촌마을에 1920년경에 이거하게 되었다. 엄마는 울산학성공원 근처 학남마을 경주 이씨댁 따님으로 큰부자댁에서 태어나 귀하게 성장하였다.
가난한 아버지와 결혼하게 된 것은 선대부터 선비가문이란 고루한 기품을 지녀온 가풍때문이었던 것으로 안다. 엄마는 얼마나 귀하게 성장하셨는지 농사꾼 아내로 시집와 모심기 때에는 품앗이를 하지 않고는 놉을 구하기가 너무 어려움에도 농사일을 하나도 할 줄 몰라 품앗이를 하자고 하는 이도 없었고 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평생을 다하다 가셨다.
1남 5녀의 자녀를 키우면서 학교도 보내지 않고 당신이 글을 가르쳐 전 자녀들에게 초등학교 정도의 지식을 가지도록 하셨다. 항시 책읽는 일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자녀들에게도 책 읽는 습관을 길러 자녀들이 결혼 이후에도 책읽는 일에 나태하지 않게 하셨다. 경출은 태어난 성품이 온순하고 여성스럽게 태어나고 성장과정에도 온실속의 화초처럼 성장해 일정때 처녀들은 국민근로 보국대를 해야 했는데 부끄러워 보국대에 가지못해 밑에 여동생을 대신 보국대에 참여시킬 정도로 용기가 없었다.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시작해놓고 감당을 못하고 폐전의 위기가 역력해지자 광분하여 우리 국민들에게 곡물 놋밥그릇, 놋수저 소나무수액까지 의무공출 물량을 정해 받치도록 하고 징병징용 정신대로 끌고갔다. 경출은 이때 나이가 꽃망울같은 십대 중반의 나이였다.

일본인들은 갈수록 더 광분하여 갖은 수탈을 일삼고 길거리 다니는 젊은이는 노예 사냥하듯이 마구잡이로 잡아갔다. 징병징용 정신대에 끌려갈 적령기에들은 자녀를 둔 부모로서는 자식의 신변이 너무 불안하여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엄마는 자녀들의 앞날이 걱정되어 점쟁이를 찾아가 점을 보니 경출의 사주팔자는 나이 많은 상처한 사람과 결혼을 하지 않으면 명을 이어갈 수가 없다는 점괘가 나와 딸이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을까 나날이 초조한 맘으로 하루하루를 살고있는 엄마는 딸이 결혼만 하면 정신대에 끌려가는 일을 면할 수 있었기에 아무 곳에나 시집을 보내려고 애를 태우고 있는터에 웅촌면 석천마을에 사는 상처하고 두 딸이 딸린 33세 되는 사람과 연을 맺으라는 청혼이 들어와 엄마가 구하는 딸의 혼처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남자는 30세 이상이 되면 징병도 징용도 면하게 되고 점쟁이가 말하는 상처자리라 엄마는 하늘이 점지해준 인연이라는 맘으로 시집갈 당사자인 경출에게는 단 한마디 의논도 없이 부모님들의 일방적인 혼사진행으로 1943년 18세 나이로 15세가 더 많은 분과 결혼을 했다. 더 가관인것은 결혼한 남편에게는 전처가 나은 7세와 3세가 된 딸이 있었다.

시집을 오니 가족으로는 시어머니와 맏시숙부부와 시동생부부가 바로 이웃에 살았다. 그 당시는 시집온 새색시는 벙어리, 귀먹어리, 장님 삼년을 해야하는 게 철칙처럼 여겼던 세월에 주장을 모르고 상대 위주로 맹종으로 살아온 경출은 바보중에 상바보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신혼때의 모습을 이야기 하면 친정에서 농사일이라고 해본 적 없는 사람이 어떠한 일도 다해야만 했다.

모심기 품앗이 밭메기 보리베기 벼베기 걷우기 타작 너무나도 고된 일이었지만 시집온 때부터 죽는 날까지 똑같은 일과를 반복하다 세상을 하직했다. 노동일에 시달리는 일도 힘에 겨운 일이었지만 두딸을 돌보기가 너무 어려웠다. 큰딸은 엄마 잃은 슬픔과 계모라는 선입견 때문인지 맘에 문을 열지 않고 작은딸은 어려 잘 모르지만 언니 맘이 닫혀있으니 언니영향을 받았다. 농사일 때문에 딸들을 돌볼 겨를도 없고 딸과 가까이 지내려고 해도 딸들이 할머니댁에 가 살다시피해서 노동의 시달림보다 더하게 맘이 상했다. 결혼한지 서너달이 지나고 임신을 하고 결혼한지 1년이 경과한 때 아들을 낳았다. 두 딸과 원만한 관계를 가지려는 노력도 해야하고 젖먹이 아들을 업고 농사일을 해야만 했다.

큰딸은 초등학교를 입학해 학교를 다니며 학교를 파한 후 어린동생을 잘 보아주어 너무나 고마웠다. 농사수확은 마을에서도 다량의 농가에 속했지만 공출에다 빼앗겨버리고 먹을거리가 부족해 봄부터 가을까지는 쑥이나 산나물과 갖은 푸성귀를 채취해와 이를 충당해 양식을 늘렸고 겨울에는 취나물, 시레기, 무 등으로 양식을 늘렸다. 하루일과는 새벽3시에 일어나 밤10시가 넘어야 잠자리에 들수가 있었다.

결혼 전에 노동일에 시달려 본 적이 없는 몸이라 그런지 힘겨운 노동에 지친 몸이라 밤에 잠자리에 들면 온몸이 아프지 않는곳이 없어 잠이 오지 않아 뜬눈으로 지새운 날도 많았다. 새벽 3시에 일어나 밥에 넣을 갖가지 푸성귀를 다듬고 씻어놓고 4시쯤 되면 집에서 300m 떨어져 있는 마을 공동우물에서 물을 퍼 물동이에 담아 하루 작게는 10동이 넘게 많게는 20동이가 넘게 머리에 이고 날라 더무에 체워 밥도 짓고 먹는 물, 설거지물, 세수물, 소죽물과 그 이외 허드레 물로 이용했다.

다음에 해야하는 일은 보리쌀을 쌀과 바로 밥을 하게되면 보리쌀이 억세 맛도 없고 쌀과 잘 어울리지 않아 보리쌀을 한번 삶아 보리쌀을 먼저 깔고 그 위에 쌀을 얹고 그 위에 각종 양식 충당감 푸성귀등을 얹어 밥을 했다. 밥이나 음식을 익히는 땔감은 전부 나무로 불을 지펴 했기에 음식이 다 익을 때까지 자리를 비우지 않고 불 온도 조절을 음식따라 해야 함으로 나무를 음식물 온도 필요에 따라 정성을 다해 나무량을 적당하게 부엌에 넣어야 했다. 국이나 찌개나 다른 반찬도 같은 방법으로 했다. 텃밭에 호박잎이나 깻잎이나 정구지(부추) 고추 채소잎이라도 챙겨와야 찬 거리가 되었기에 밭에 가면 맨몸으로 가지않고 오줌동이나 나무 태우고 부엌에 남은 재라도 담아 이고 가서 채소밭에 뿌리고 찬거리를 거두어왔다.

시어머니는 큰댁에 계셨지만 엄마 잃은 손녀들도 안쓰럽고 일할 줄 모르는 며느리가 맘놓이지 않아 집안일 거들어 주신다고 자주 오셔 밥상을 거의 매일 차려드려야 했다.

밭솥에 밥을 퍼 그릇에 담을 때도 시어머니 밥과 남편 밥에는 가능한 푸성귀가 섞이지 않고 보리밥도 적게 들어가고 쌀밥이 많이 들어가도록 조심스럽게 밥을 퍼야했고 어른밥을 퍼고 난 다음에도 어린아이들 밥도 다르게 퍼 담고 경출이 본인 먹을 밥은 푸성귀와 보리밥일색으로 퍼담았다. 밥상도 시어머니밥상 따로 남편밥상 따로 반찬도 밥상따라 다르게 올렸다. 어려운 형편에 시장에 자주 갈 사정이 되지 못해 자주 가지 못했지만 농산물을 내다 팔기 위해 시장가는 날은 파장에 헐한 고기라도 사오는 날은 복판토막은 시어머니와 남편상에 올리고 대가리와 꼬리는 그 이외 가족들이 먹었다.

아침을 먹는둥 마는둥 하고 설거지도 대충하고 남편따라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다. 큰댁 이웃에 살림을 나아가 살긴해도 큰댁 농사일을 남편 혼자 도맡아 하고 있었다. 시숙은 선비라 그런지 아예 일할 생각은 하지 않았고 해방이 되고 부산으로 사업한다고 가버렸고 시동생은 징용에 끌려가 6개월이 지난때 형님들의 노력에 의하여 징용에서 풀려나 석천으로 돌아왔지만 좌익세력에 깊이 가담하여 무엇을 하는지 집에 있는 날이 없이 계속 어딘가 돌아다니기만 하다 어느 날 누구인지도 모르는 이들에게 포승줄에 묵여 잡혀가 두달 가량 행방이 모연하다 형님들이 힘이란 힘은 다 빌리고 소 몇 마리 값의 교제비를 들여 풀려나긴 했지만 얼마나 모진 고문에 시달렸는지 그토록 팔팔하던 시동생은 죽은 시체나 다를 바 없는 상태로 돌아왔다.
본디 일을 하지 않던 시동생이 몸이 그 상태로 되었으니 일을 할 수가 없었고 몸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기간이 2년이 넘어서야 겨우 일상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남편은 어린 시절부터 결혼 이후에도 계속 혼자서 집안 농사일 감당을 다 했다. 결혼을 하니 큰댁에 농사는 자경농 소작농을 합해 40여 마지기를 경작하고 있었고 우리 농사라고 이름 지어준 농토는 소작자경을 합해 10마지기가 되었다. 50여 마지기 농사일을 남편 혼자서 다 감당해야 했다. 남편이 일을 많이 하다보니 남편일 뒷바라지에 시간도 몸도 완전 몰입해야 했다.

이런 차제에 시동생은 겨우 힘을 차리자 말자 또 좌익 세력에 가담하여 집안일은 아예 처다 보지도 않아 남편이 아무리 달래고 말리고 왈겨도 듣지 않고 계속 좌익 활동을 해 그곳에 살다가는 동생은 말할 것도 없지만 온 가족이 빨갱이로 몰려 처단당할 것 같아 경출이 결혼한지 5년이 지난때 1948년 남편 고향인 웅상면 명곡으로 이거를 했다. 갑자기 야간 도주하다 싶이온 처지라 당장 기거할 때가 없어 명곡리966번지 웅상국민학교 사택창고를 빌려 바닥에 짚으로 엮은 거적을 펴고 생활을 했다. 그때 경출의 가족은 남편과 결혼전에 얻은 두딸과 경출이 낳은 세 살된 아들과 뱃속에는 4개월째 되는 아이가 들어있었다.

명곡을 선택하여 오게된 연은 시외가댁 학성이씨 댁이 집성을 이루고 있었고 시가댁집안이 집성을 이룬 곳이라 오게 되었다. 가까운 인척은 백동이 더 많았지만 시외삼촌께서 당신돈으로 농토를 구입해 놓고 석천논을 팔게 되면 갚아라 하시기에 명곡으로 이사온 후 1년 넘어지난때 석천논을 팔아 시 외삼촌이 대납한 논값을 갚았다. 당시 고이채 이자가 월5%였다. 정상적으로 이자까지 계산해 갚으려면 논값을 치룬 대금원금에 이자 60%이상을 가산해 갚아야 했지만 논값 원금을 가져다 드리니 대견해 하시고 고마워 하셨다. 집터는 시 외삼촌이 당신 토지를 무상으로 주시고 붙은 타인토지는 임차를 해 마련해 주시고 집을 빨리 지으라고 독촉하시며 집지을 재목은 시외가댁 산에서 벌목하여 가라하시며 시외가댁 머슴을 자주 보내어 남편의 벌목작업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시가댁의 제종방간의 형제들이 협력해 주어 많은 힘이 되었다. 산에서 나무를 베어 1년 이상은 말려야 정상적인 재목으로 사용할 수 있는데 기거할 집이 급해 마르지도 않은 생나무로 집을 지었다. 생나무는 운반과정에 엄청 무겁기도 하지만 작업하기도 어렵고 견고한 집이 될 수 없는 줄 알지만 추운 겨울이 나기전에 들어가기 위하여 급하게 짓게 된 것이다. 놉을 살 돈도 없고 남편이 가장 많은 일을 하고 시가외댁과 대소가의 도움으로 초가삼간을 지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입택을 할 계획이었지만 일기도 불순한 날이 많고 일이 계획대로 되지 않아 기둥을 세우고 지붕만 이우고 벽체도 조성하지 않고 구들장도 채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임신한 애기의 산통이 시작되어 벽에는 거적을 두르고 방바닥에도 거적을 깔고 1949년 1월 5일(음력 1948년 11월 17일)급하게 입택하여 석천에서 임신하여 온 아들을 그날 낳았다.

그날 태어난 아들은 성년이 된 후에 자신이 짚 거적 위에서 출생한 사실을 알고 예수님은 마굿간에서 태어나셨는데 그게 무엇이 부끄러운 일이냐 하며 거적 위에 태어난 사실을 당당하게 말하는게 고마웠다. 새로운 집으로 이사오고 두 달이 지난 후 벽도 없이 거적으로 가리운 노천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곳에서 추위때문인지 갓 태어난 아들과 네 살난 아들은 병이나 둘다 사경을 헤메다 네 살난 아들은 하늘나라로 가고 갓 태어난 아들은 겨우 생명을 부지하긴 했으나 살아날 기미가 전혀 없었는데 병원에 가지도 않고 죽으면 죽고 살라면 살아라는 식으로 버려두었는데도 살아 지금까지도 살아 있다. 세월이 지나면 일이 줄어 들 것이라는 기대를 했는데 시집온 지가 6년 세월이 지나도 해야할 일은 더 밀려오기만 했다.

농사일을 마치고 저녁을 지어 가족들에게 올리고 설거지를 하고나면 저녁에 해야할 일들이 산더미 처럼 쌓였다. 빨래도 해야하고 빨래 다듬질도 해야하고 겨울솜옷은 빨래할 때마다 새로 바느질을 해야하고 헤어진 양말과 옷가지들을 기워야 하고 길쌈은 시집온 후로 한해도 빠지는 일없이 해야했다.<다음호에 계속>
↑↑ 박극수
시인
(현)양산문화원 부원장
양산시 향토문화연구회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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