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상사람들의 삶을 말하다(49)-하
아끼는 것이 최고 미덕이었던 시절 삶의모습
웅상뉴스 기자 / jun28258@gmail.com 입력 : 2018년 09월 27일
연모도 아닌 연모로 장난감을 만들었다. 장난감 주재료가 나무가 많았는데 지금은 버려진 판자나 각목이 너무 흔해 지천에 깔려 있지만 그때는 나무토막하나 구하기도 어려워 산에가 큰 나무를 베어와 다듬어 판자를 만들고 각목을 만들었다.
연장도 시원찮고 서툰 연장다루는 솜씨로 다치기도 많이 했다. 필자도 그때 장난감 만들다 다친 자국의 흉터가 아직까지 손가락 여러곳에 선명하게 있다. 그 시절 어린 시절을 보낸 분들은 모두 작은 움막집이라도 스스로 건립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 어린시절 장난감 만들었던 경험이 기술이 되었던 것이다.
교과서로 사용한 책은 선배들이 사용하던 찢어진 곳도 많은 헌책에 연필은 몽땅연필 필통을 구입할 사정이 못되어 시멘트 포장했던 포장지 종이로 봉투를 만들어 연필과 지우개를 넣어 다녔다. 가방은 부유한 집 자녀 몇사람만 들고 다녔고 보따리에 책과 공책 필통을 같이 싸고 도시락까지 함께 사 김치국물이 쏟아저 책과 공책에 물이 들기도 했다. 초등학교 때 남학생이 여름에 입고 다니는 의복은 팬티 런닝 뿐이라 보건(체육)시간에 힘겨루기라도 하면 팬티가 찢어지는 일이 많아 여학생들 보는 앞에서 남학생은 부끄러운 모습당하기가 예사로 있었다.
이런 어려운 환경 가운데 의인은 있었다. 이 시대 이지역에 살고 있는 분들의 기억속에 가장 훌륭한 분으로 각인 된 분은 개운중학교 설립자 임상수 선생님이시다. 1900년 이후 웅상에서 자기 사유재산을 지역에 가장많이 회사한 분이다. 나라 없던 시절 1911년 울산범서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범서에서 지내다 웅상으로 이거했다.
일본유학중 일본군에 강제징집되어 대동아 전쟁에 끌려가 살아남기가 어려운 처지에서 구사일생으로 생명을 부지하고 고국땅에 돌아와 서창에서 대형 도정공장을 설립해 많은 돈을 벌어 해방이 됨과 동시에 일본인들의 소유인 적산 부지였던 소주 공단이 조성되어있는 우불등(소주, 주남경계일원)일대와 웅상출장소와 문화체육센터가 있는 주진 진등 일대 토지를 불하받아 엄청난 땅부자가 되었다. 1950년 전후경 나라 사정은 혼란에 처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6.25 전쟁이 발발하여 정부는 전쟁을 감당하느라 기존 학교운영에도 힘겨운 판에 신설학교 건립은 사치에 불과했다. 나라가 어려울수록 더 절실한 것은 교육이라는 일념으로 현 출장소가 있는 자리에 사비를 출현하여 뜻있는 지역 인사들과 협력해 개운중학교를 설립해 학생을 모집해 수업을 하다 현개운중학교 위치로 옮겨와 학교를 건립했다.
학교 부지도 시설도 모두 사비로 충당했다. 국가 사정이나 지역민들의 개인 사정이 여의치 못해 협력을 구할 수가 없었다. 학교 재정을 감당하기 위해 우불등 일대 토지와 주진진등 일대 토지 (현)개운중학교 주변 일대토지를 모두 학교재단재산으로 기부했다.
교육부분만이 아니라 지역전반적인 부분에 많은 헌신을 했다. 웅상체육 발전을 위해 우불등 논 2,000여평을 웅상체육회에 기부했다. 건강과 여러 가지 사정으로 학교 운영할 사정이 못되어 학교재단을 채기엽 이사장에게 물려주었다. 학교를 물려받은 채기엽 이사장은 학교운영을 위해 엄청많은 학교재단 토지를 처분했다. 재단재산을 처분할 때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고 법적 절차에도 하자없이 이행하였다는 것은 믿지만 그 많은 부지중 일부라도 남겨두었다면 세계적 일류대학을 설립해도 충분하게 될 정도의 재력이 될 것이라는 아쉬움이 가져진다.
당시 개운중학교가 설립되지 않았다면 당시 지역에 살았던 지금 60대 이상 사람들은 거의 모두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였을 것이다. 중학교나마 간신히 공부해 고등학교 대학교도 진학할 수 있는 길도 열렸다. 임상수 선생님은 말년에 생활이 옹색한 환경에서 일생을 다하시고 지금은 부산영락공원 한 모퉁이 초라한 묘역에서 영면하고 계신다.
서창 5일 시장은 조선 현종10년(1669년)울산 부사 류지립이 창건했으면 시장부지를 매입하지 않고 빈공터 골목을 시장으로 활용하다 일정때인 1930년경 70~80평의 부지를 매입하여 장옥도 설치하였으나 골목시장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949년경 서창에 거주한 김희조(김수곤의 조)와 최길학이 면장을 설득해 부지를 추가 매입하고 김학청이 200평, 정경주(정송모 부)500평, 김희조(김수곤 조)461평을 기부해 오늘날의 서창시장의 토대가 되었다. 덕계5일 시장은 1964년 덕계리에 거주하며 덕계양조장을 경영하였던 김수경이 자기 토지 500여평을 기부하여 시장을 개장하게 되었다. 지금도 장이 3일, 8일 정한 일정에 빠짐없이 성시를 이루고 있다.
덕계시장부지는 양산시에서 매각처분하고 시장은 도로를 점유하여 개장되고 있는 실정이다. 기부받은 시장 부지에는 토지를 매입한 사람이 대형 건물을 건축하였다. 시장부지를 양산시에서 매각할 당시 매수자와 수의 계약에 의하여 매매되었다. 양자간에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시장 부지를 처분한 것은 정말 지탄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아무리 철없는 어린 아이도 이런 발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장부지를 기부한 분이 공익을 위하여 영원토록 사용하라는 염원에서 기부한 토지를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휴지조각 버리는 마음으로 처분한 처사에 흥분하지 않는 시민이 있다면 애향심이 아예 없거나 의식이 없는 시민이다. 구석진 곳에 쌓아두어 빨리 처분하지 못해 고민하는 쓰레기 처분하는 마음으로 처분하였다 함은 아무리 이해를 할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뜻을 가진 시민들이 모두 안타까워하고 시장부지를 기부한 김수경님의 가족들도 너무 안타까워한다.
서창 초등학교 설립은 해방 이듭해인 1946년 설립인가를 받았다. 해방을 맞이 하긴 했지만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들어 국가를 경영할 주체도 없는 실정의 나라사정이라 지역민들의 열화같은 교육열기로 지은 건물이지만 너무 짧은 기간에 급하게 건립한 건물이라 허술하게 지어저 1950년 2월 25일 교사(건물)사용불능으로 교지를 개운중학교에 양도하고 현 서창초등학교 소재지로 이동했다. 당시 학교 육성희, 김희조(김수곤 조)회장이 자신의 토지500평을 기부하고 윤일규(윤정원 부)54평 박경덕(박성근 부)65평 정경주(정송모 부) 218평의 부지를 기부해 학교설립에 기여했다. 지역민들은 노임을 받지 않고 많은 날의 노동력을 협찬하여 학교 설립과 운영이 가능하도록 헌신하였다. 구전이나 기록은 없지만 웅상초등학교 설립이나 덕계 초등학교 설립도 지역민들의 협력에 의하여 설립되었음이 틀립없는 사실일 것이다.
1970년경까지는 춘궁기인 보릿고개 때가 되면 우리지역민 30%이상은 끼니 거리가 떨어져 기아선상에서 헤메어야 했다. 마을마다 몇 사람들의 부자를 제외하고 나면 비싼 장이쌀을 빌려 연명하거나 가계운영을 해갔다. 마을의 부자들은 흉년이 들거나 끼니거리가 떨어진 가난한 이웃들에게 재산증식의 기회와 대상으로 삼았다. 7~8월경 쌀 한가마니를 빌려주면 그해 11월이나 12월경 이자50%가산하여 쌀 한가마니 반을 받았다. 장이쌀을 빌린가정이 사정이 못되어 당년에 갚지 못하면 쌀 한가마니 반이 원미가 되어 50%이자를 더해 갚아야 하는 철저한 복리식 이자계산방법이었다.
가난한 농가에서는 여름에 비료 구입할 돈이 없어 부자들이 싼가격으로 많은 비료를 구입해 가난한 농가에서 비료를 빌려 쓰고 그해 가을에 구입한 가격의 2배 가격을 받았다. 이보다 더한 가격을 받은 이도 있다. 자녀혼사나 자녀 학비 마련을 위하여 여러 가마니 장이쌀을 빌려 당년에 갚지 못하면 너무 비싼 이자를 감당못해 헐값에 농토를 빼앗기기가 예사로 있었다.
부자들이 이처럼 몰지각하고 몰인정하게 재산을 증식해가는게 일반적이었지만 후덕하고 인정이 넘치는 부자도 있었다. 주진에 거주한 김해 김씨댁의 김동진은 지역민들이 굻어 죽는 주민이 여러 명 발생한 시기인 1960년대에 해마다 여름철에 매년 쌀 80kg들이 20가마니 정도를 웅상면 사무소에 기부하여 굶어죽는 주민이 없도록 하라고 당부하였다. 지금 쌀20가마니는 별것이 아니라 생각할 수 있다. 당시 쌀 20가마니는 웅상 상답논 800평 정도를 구입할 수 있는 금액이다.
지금 웅상토지 800평 값을 현금으로 환산한다면 평당 100만원 짜리는 8억원이 되고, 평당 200만원짜리는 16억원이다. 임진왜란때 관군들이 다 도망가고 의병이 지역을 지킨 고장이다. 아무리 삭막한 인정속에서도 훈훈한 정을 풍기는 분들이 계셨기에 우리 지역이 명맥을 이어 오늘에 이르렀고 앞으로도 면면히 이어갈 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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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극수 시인 (현)양산문화원 부원장 양산시 향토문화연구회 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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