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상사람들의 삶을 말하다(40)/김해 김씨 덕산댁(이양호 모)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7년 10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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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산댁 이양호 모 |
ⓒ 웅상뉴스(웅상신문) |
| 무당 노릇을 하지 않을 수 밖에 없었던 기구한 운명. 웅촌면 덕현에서 1924년 5남매 중 막내로 출생하여 21세 되던 1944년에 온양면 내광에서 1919년 출생하여 성장한 26세 되는 학성이씨 예(藝)의 20세손 이채식 총각과 결혼하였다.
결혼한 지 사흘만에 남편은 일본 가고시마에 징용을 갔다. 결혼한 후 몇 달 지난 신행 전에 시아버지가 돌아가셔 시가에 가 장례를 치르고 삼우를 지내고 친정으로 돌아와 있으니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일본에서 건너온 남편은 시가에 머물다 아내를 보기 위하여 처가로 왔다.
그 걸음으로 부부 동행하여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 도착하여 밥은 남편 일터 한방 식당에서 먹고, 잠은 여관을 얻어 잠자리를 정했다. 한국에 비해 훨씬 풍족함을 한눈에 느낄 수 있었다. 입은 의복이며 신는 신발도 고급스럽고 식당에 들어오는 채소들이 한국에서 볼 수 없는 훤칠하고 큰 것들이었다.
부럽다는 생각이 머리 속에 들어오기도 전에 사이렌이 울려 사람들이 술렁대기 시작하여 놀라 무슨 일인가 했더니 미군 공습경보 사이렌이라면서 산 속으로 대피하여야 한다고 했다. 도착한 그날부터 대피한 것이 생활화하다시피 되어 어떤 날은 하루 몇 번씩을 하고 대피가 하루 종일 없는 날은 며칠마다 한 번 정도였다.
남편은 어느 날 대피를 하다 공습 파편을 맞아 손등을 다쳐왔다. 같이 대피하던 사람은 많이 다쳤다고 하는데 그만해도 다행이었다. 남편은 건축현장에서 노동자들을 감독하는 일을 했다. 다른 사람보다 훨씬 수월한 육체노동에 시달렸지만 일본 생활이 맞지 않았는지 부부가 같이 일본서 생활한 7개월이 지난 후 남편은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발광을 했다.
같이 일본 건너 간 시숙과 시동생은 한국에 가면 당장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데 일본에 머물면 굶지는 않고 약간의 돈도 저축할 수 있다며 있자고 아무리 말려도 한국으로 건너가겠다며 일본에서 낳은 큰아들을 업고 남편과 밀선을 타고 부산항으로 왔다.
일본에서 사용했던 이불이나 각종 생활도구를 한국에 가면 돈이 될 것 같아 무겁도록 챙겨 와 팔려고 보니 아무도 사려는 이가 없어 모두 다 버리고 무일푼 빈 몸으로 갈 곳을 지향해보니 아무 곳에도 갈 곳이 없어 하는 수 없이 친정으로 향했다. 잠깐 있다 나온다는 것이 1년이란 세월 친정살이로 보냈다.
친정에 가 있는 동안 남편은 백동 누님댁에 잠깐씩 머물다가 처가에는 가끔 휑하니 왔다가고 어디로 다니는지 한참 소식이 없다가 생질서가 있는 삼랑진 우체국에 보험서기로 취직하였다 하며 셋방을 얻어 두었으니 같이 가자고 하여 남편을 따라 삼랑진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월급이라고 받아 오는 것이 방세 주고 나무 한 짐 사고 세 식구 20일 정도 먹을 양식밖에 안되었다.
생활비가 태부족이라 시장에 다니면서 푸성귀를 주워서 먹을거리도 만들고 들에 나가 나물도 캐고 별의 별걸 다 먹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진급할 수 있는 기대도 월급이 오를 희망도 없어 남편은 우체국을 그만 두고 돈벌이하러 간다면서 가버리고 소식도 없었다.
어린애를 데리고 남의 품삯을 들 수도 없고 먹을 것은 다 떨어지고 애는 울어대고 행여 남편이 올 것인가 싶어 삼랑진역에서 몇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사흘을 굶고 물만 마시고 있으니 이웃 반장이 이 사실을 관청에 알렸는지 쌀보리 3되가 지원되었다.
이 쌀보리도 얼마가지 않아서 다 먹고 이웃에서 딱한 처지를 보고 보리 단갈 등겨를 주었다. 세상에 무엇이 서럽다 해도 배고픈 서러움만큼 더 큰 서러움은 없더라. 자존심도 체면도 며칠 굶어보면 하찮은 사치품이다. 단갈 등겨로 떡을 쪄먹고 보따리에 싸 생질서한테 가 차비를 얻어 애를 업고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 서창에 내리니 신이 발에 걸리지 않아 서창에서 웅촌 뒷골 덕현까지 애를 업고 가는데 사람들이 보면 신을 신고 서 있기도 하고 걷기도 하다가 아무도 보지 않을 때는 맨발로 걸어 친정에 당도하였다. 몰골이 된 모습을 본 친정어머니는 아무 말씀 없이 담뱃대에 담배를 연달아 열 대도 넘게 피우더니 눈길도 주지 않고 먼 산만 바라보았다. 나 또한 어머니를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아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아마 그때 어머니 눈에서는 피눈물이 쏟아져 나와 눈길을 마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때 어머니 가슴 찢어진 아픔을 생각하면 팔십이 된 지금도 눈물이 난다. 친정 온지 몇 달 지나 남편이 배낭만 메고 와 친정살이 처가살이를 했다.
애도 아버지가 오고 난 후부터는 어찌나 울어대는지 외갓집만 나오면 울지 않고 외갓집에 들어가기만 하면 울어 친정아버지는 외가에서 성장할 인연이 아니다 하시며 서창 우체국 근처에 셋방을 얻고 쌀 한가마니와 살림을 차려 분가를 시켜주셨다. 남편은 일본에서 보아온 미장일을 시작했다.
눈썰미도 있고 손길이 야문 탓인지 일을 잘한다는 평도 듣고 일거리가 생겨났지만 일이 너무 힘들어 다른 일을 해야겠다며 고기 장수를 시작하더니 며칠 하다 그만두고 본격적인 미장이로 나섰다. 일도 열심히 하며, 일거리도 많아 품삯을 만만찮게 받아도 술을 너무 좋아해서인지 술값으로 다 날려버리고 집에 돈 가져오는 일은 가뭄에 콩 나는 격이었다.
친정식구들이 서창 장에 오는 걸음에 쌀이랑 반찬거리를 가져다주는 걸로 연명을 했다. 작은아들이 태어나고 남편은 개운중학교 짓는 일을 하청 받은 이수호씨와 같이 일하게 되어 얼마간의 돈도 가져오고 외홈에 그분 땅이라며 빌려주는 땅에 방 한 칸 정지 한 칸을 짓고 작은아들 낳은 지 열 달 정도 될 즈음에 이사를 했다. 뒤에 안 일이지만 이수호씨가 자기 땅이라고 빌려준 땅은 자기 땅이 아니라 차근우 땅이었다.
그분도 자기 땅으로 알고 빌려주었고 차근우도 자기 땅인 줄 안 후에도 아무 일없이 그 작은 집에서 평온하게 20년이나 살았다. 참 고마운 분들이었다. 그곳으로 옮겨 딸을 낳고 외딴집에 빨갱이들(공비) 때문에 살 수 없어 집을 그대로 두고 소정마을로 남의 집 셋방에 들어 살면서 딸을 더 낳았다.
다섯 살 난 딸이 경풍으로 세상을 떠나고 큰아들이 아홉 살 되던 해 그간 시부모님 제사를 오래 모셔오다 시숙이 자기 아들이 머슴살이 해 세경도 받아오고 하니 자기가 제사를 모시겠다며 억지로 제사를 모시고 가 시숙댁으로 애들을 데리고 제사 모시러 갔는데 멀쩡하던 큰아들이 일어나지 못해 업고 집으로 왔더니 도로 옆에 살던 호이짱 할머니가 보고 애가 가무튼(삐다)것 같으니 침을 맞아라 하며 신기 다전댁으로 가라 하기에 신기에 가 침을 맞게 했다.
침을 맞은 후 더 붓고 아파 뿔뿔 기기만 해 부산 서면 옛날 부산상고자리 미군들이 운영하는 서전 병원으로 아홉 달간을 업고 다니며 치료를 하였더니 일어나 걸어다니긴 했지만 다리를 절었다.
서전병원 의사들의 말에 의하면 치료하기가 어렵게 되고 후유증이 있는 것은 침술 치료를 잘못한 때문이라 하였다. 지금 세월 같았으면 시빗거리가 되었겠지만 말 한마디 원망도 해 본 일이 없다. 휴전이 되고 외홈집으로 살림을 옮겨 한 아들을 더 낳고 두 딸을 더 낳았다. 애를 낳을 때마다 혼자서 낳거나 용호댁(이정걸 모)이 와 도와주며 많은 고생을 했다. 셋째 아들은 천연두를 해 세상을 떠나고 막내딸이 아파 손을 비비던 중 자신도 모르게 신이 내렸는지 완전 무당들이 하는 짓을 했다.
어느 날 난생 처음 보는 옹기 장수가 집을 지나치다 들어와 신을 받아야 할 사람인데 왜 신을 받지 않느냐고 하며 신을 받으면 어려운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고 가정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말을 하며 집에 신당을 차릴 것을 권유하여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던 차에 신당을 차리고 지성을 드렸지만 막내딸이 세상을 떠나고 말아 그토록 지성을 다했음에도 어려움만 주는 신당을 모두 철거해 버리고 다시는 신을 받을 생각을 않겠다며 단념을 했다.
그러던 중 친정 오빠가 많이 아프다는 소문을 듣고 병문안을 가니 하필 그날 손을 비비는데 점쟁이가 종이를 등에 붙여 주는데 이튿날 손바닥 전체와 손가락 지문마다 도장 찍은 형상이 완연해 신을 받지 않고는 살아 갈수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며 신을 받도록 해 줄 것이니 약간의 음식 준비만 하면 된다고 하여 며칠 뒤 준비를 하고 손을 비비니 금세 신이 내려 점을 하게 되었다.
점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금시 전국적으로 소문이나 몸이 아프거나 가정에 어려움이 있는 사람에게 갖가지 처방을 가르쳐 주었는데 용하다는 소문이 꼬리를 물고 퍼져 전국 각지에서 몰려오는 손님들을 감당치 못했고 점심을 앗아(챙겨)주는 이도 없지만 밥 먹을 시간이 없어 점심을 굶어가며 점을 했다. 점 한 번 보는데 20원씩 받았는데 하루 두 주머니씩 돈이 들어왔다.
특히 정관 사람들이 더 많이 줄을 이었다. 신이 내리고 진작부터 굿을 해 줄 것을 요청해 왔지만 일체 응하지 않고 삼 년이 지난 후부터는 전문적인 굿 꾼으로 나갔다. 굿의 대가는 정한 금액도 없이 주는 대로 받았다.
요청이 너무 많아 몸도 당해낼 수가 없지만 시간이 되지 않아 다른 굿 꾼을 많이 소개해 주기도 했다. 얼마간의 돈이 모여 지금 사는 집터를 구입하였다. 남편은 52세 되던 해 교통사고를 당해 열 달쯤 병원에서 신음을 하다 퇴원하여 집에서 치료를 받았다.
지금 사는 터에 옛날 집을 지을 때 남편은 본인 힘으로 문밖을 나올 수 없는 처지임에도 전에 살던 집에서 업혀 나와 마당의자에 앉아 집 짓는 일을 감독하여 집을 완성하게 되었다. 작은아들은 군에 입대를 하여 월남전에 참전하였다.
새 집에 이사를 와 몇 개월을 살다 63세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 울산 문중산 백양사 뒷산에 시신을 모셨다. 작은아들은 월남전 참전으로 장례식에 참석치 못했지만 친구들이 장례에 많은 수고를 했다. 남편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큰아들이 결혼을 했다.
하지만 결혼한 사흘만에 병이나 3개월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맞이한 며느리도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도 정신적으로 약간 문제가 있어 처녀 때부터 그런 사람이라고 하니 친정에서는 처녀 때 멀쩡한 사람이 시집가 쇼크를 받아 건강이 좋지 못하다며 배상청구 운운해 종전에 살던 곳을 추적해 보니 초등학교 때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그때부터 정신이 부실하였음을 알아내고 며느리를 친정으로 데리고 가 얼마간의 보상을 해 주고 돌려보냈다.
그때 박봉수 대의원과 차근우가 동행하여 많은 도움을 주었다. 3남 4녀를 낳아 2남2녀를 잃고 1남 2녀가 남아 성혼하여 큰딸은 웅촌에 살고 작은딸은 울주 강동 주전에 시집가 대전에 살고 있으며, 둘째아들은 결혼하여 내외가 장남 노릇을 하고 있다. 며느리는 용당 밀양박씨 무난한 가정에서 출생하여 성장하다 한창제지가 용당에 들어오는 바람에 경작하던 농지가 들어가 보상을 받았을 때 죽전에 집과 농토를 같이 파는 사람이 있어 용당 집은 그대로 두고 죽전으로 가족 모두가 이사를 옮겨 사는 집 딸이었다. 나만 그런게 아니라 신들린 사람들은 성격이 본인 마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고 본인 마음과 신기가 합해 행동할 때가 많아 아무리 조신해 지고자 해도 잘 안 되는 것이 북채 잡은 사람들의 모습이다.
이런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기갈 센 사람이라 하고 사실 또 기갈이 세다. 나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이런 나를 아들 며느리가 이런 모습으로 본다고 느껴본 적도 없고 다른 이를 통해 들어본 일도 없다.
다른 이를 통해 우리 시어머니같이 자식 사랑 많은 분은 천지에 없다는 소리를 앉은 자리마다 한다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었다. 모든 부모들의 자식 생각하는 마음이 다른 부모가 없겠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식 때문에 상처가 너무 커 자식 일이라면 한참에 숨을 다 멈추어서라도 할 수 있다면 하려고 했다. 요즘 세월에 그런 부모마음 아는 자식 어디 있느냐고 말하는 게 지금 세상인심이지만 내심으로 어떤지 몰라도 아들, 며느리, 사위, 딸도 잘하지만 손자, 손녀들이 몸이 짙어 은신도 잘 못하는 할미에게 귀찮을 정도로 치덕거린다. 귀찮을수록 좋다.
자식 중에서도 더욱 고마운 게 며느리다. 본래 천성이 착하지만 들리는 소리마다 귀여운 소릴 들려주니 나 또한 더 잘해야지 하는 다짐을 자주하지 않을 수 없다. 좋은 일만 생각하면 좋은 일이 너무 많은 늙은이 생활을 하고 있다. 74세에 거동이 불편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몸으로 19년이 지난 아흔세 살까지 생명을 부지하였다.
하고 싶은 말 다하고 살아온 내가 보이는 것 눈에 훤하게 보이고 생각은 멀쩡해 보고 넘어가지 못하는 나를 모신다고 자식들이 얼마나 어려웠을까. 거동이 불편할 때부터 빨리 가고 싶었는데 하늘의 뜻이 동하지 않아 가족들 고생시키고 나도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냈다. 그래도 할미라고 가까이 와서 비비는 손자 손녀들 때문에 참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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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극수 시인 (현)양산문화원 이사 양산시 향토문화연구회 감사 웅상의 발자취 편집위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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