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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상의 역사를 말하다(36)-1부

결혼문화와 장례문화의 변천
당시 결혼비용은 80kg들이 쌀 다섯가마니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7년 04월 11일
↑↑ 박극수
시인
(현)양산문화원 이사
양산시 향토문화연구회 감사
웅상의 발자취 편집위원장
ⓒ 웅상뉴스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는 순간 중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 태어나는 순간 결혼하는 순간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이다. 집안에 큰일이라 하면 혼사를 치르는 일과 장례를 치르는 일을 말한다.

태어나는 순간과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은 본인의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선택되지만 결혼은 본인의 의사가 충분하게 반영되고 부모님이나 가족들의 의견도 반영되는 수가 많다.

어떤이들은 결혼해야겠다는 갈망을 가지고 가족들도 같은 욕망으로 노력함에도 배필을 만나지 못하는 사례를 주변에서 너무나도 쉽게 볼 수 있다. 웅상에서 현재 필자가 아는 50대된 처녀 총각도 여러명이 있고 40대는 만만찮은 인원이다.

이런 입장에 처해 있는 사람중에는 독신으로 살아가겠다는 의지가 확고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고 배필을 자기 처지보다 훨씬 나은 처지에 있는 사람을 선택하려고 하다 배필을 만나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결혼비용을 감당하기가 버거워 엄두를 내지 못하다 결혼시기를 늦추게 된 사람들도 많다. 특히 남자측에서는 부부가 살아갈 집을 구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더 용기를 내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필자는 형제자매 8남매와 자녀들의 결혼에 따른 모든 절차를 주관했고 할머니 부모님 장례 절차를 주관했다.

그 시대에는 대다수 가난했지만 유독 어려운 처지에서 감당했기에 필자가 경험한 결혼과 장례절차의 변화를 이야기해도 꺼리가 되어 이야기 한다. 큰 누나는 1938년생이다. 일정치하때 출생하여 해방되고 다음해인 1946년 초등학교 입학하여 1952년 그때 누나나이 열다섯살 때 큰아버지 댁에 식모살이를 갔다 큰아버지댁에 가게된 동기는 식구들이 입치레 하기가 너무 버거워 누나의 입이라도 들기 위하여 간 것이다.

그 시절에는 모든 어린이들이 명절이 가까워지면 설레임으로 한달 전쯤부터 몇밤이 남았다고 달력에 표시를 해가며 손꼽아 기다렸다 좋은 옷 입고 맛좋은 음식을 먹는다는 기대 때문이었지만 나는 이때가 되면 큰누나가 집에 다니러 오기 때문에 누나를 볼 수 있다는 설레임 때문이었다. 누나가 집에 오면 첫마디가 수야 배 안고팠나 라는 질문이었다. 나는 그때 어려 누나의 한 맺힌 걱정을 알 수 없었지만 누나가 집을 떠날 때는 초봄이었는데 집에 곡식이라고 있는 전부가 벼 네가마 뿐이었다고 한다. 보리날 시기도 멀었고 벼수확기는 한참 멀어 가족들이 굶지나 않는지 하는 걱정 때문에 큰댁에서 먹는 밥상이 푸짐해도 하얀 쌀밥에 고기반찬을 먹을 때도 집안식구들 생각 때문에 항시 마음의 허기에 허덕이어야만 했다고 한다.

ⓒ 웅상뉴스
큰댁에 식모살이를 하면서 인건비는 받지 않고 밥만 먹여주고 있다 결혼비용 일체와 혼처도 큰아버지가 책임지시기로 아버지와 약속하신 걸로 안다. 경비일체를 사용하시고 축의금도 큰아버지가 받으셨기에 아버지도 내막을 알 수 없는데 어린애가 알 턱이 없다. 그때 누나의 나이는 24세였고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지금으로부터 56년전인 1961년이었다. 작은 누나는 우리 가정형편이 어려운 탓도 있었지만 할머니께서 시푼년(하찮은) 가시나 공부시켜 뭐하노 하시는 할머니 고집을 아버지께서 꺽지 못해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했다.

공부를 못했다는 열등의식 때문인지 농사일이나 가사 일을 힘센 남자보다 억척스럽게 많이 하고 더 잘했다. 힘도 얼마나 센지 면민체육대회 줄당기기 선수로 해마다 출전했다.

결혼은 1963년 23세 때 했다. 결혼비용은 80kg들이 쌀 다섯 가마니로 한 것으로 안다. 그때 나는 중학교 2학년때라 소상하게 알 수 없지만 장이 쌀 다섯 가마니 값으로 치른 것으로 알게 된 것은 아버지게서 결혼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이웃 어느 부자댁에서 장이쌀을 빌렸는데 그댁에서는 아버지가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우려 때문인지 장이쌀을 얻는 차용증서에 아버지는 차주가 되고 나를 연대보증인으로 세우길 요청했던 모양이었다.
작은 누나 시집가기로 날을 받고 난 어느날 저녁 아버지께서 나에게 이웃 부자댁에 장이쌀을 빌리는데 보증인이 되어야 한다며 가자고 했다. 아버지 말씀을 거역할 수도 없고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가 된 모습으로 보증을 서기 위하여 아버지 따라 그댁에 가서 그댁 어른과 아버지의 대화내용이 장이쌀 열 가마니를 빌려 다섯 가마니는 다른 집에 있는 장이쌀 빚을 갚고 다섯 가마니는 작은 누나 결혼비용으로 사용할 것이라 했다.

당시 쌀 다섯 가마니 값은 논 한 마지기를 구입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대화내용을 들은바 대로 쌀 다섯 가마니로 결혼비용으로 사용한 것으로 안다. 그때 빌린 쌀 열 가마니는 5년이 지난뒤 갚으니 쌀 76가마니가 되었다. 이때 한해 이자는 50%였고 해마다 이자와 원미를 합산하여 차년도에 원미가 되고 이에 이자가 가산되었다.

부모님들은 건강이 좋지 않아 당신들 몸 챙기기도 버거운 처지라 부모님들이 장이쌀을 갚을것이라는 기대는 할수도 없고 그때 필자의 집재산이라고는 산답논 열마지기 정도가 있었고 초가삼칸집이 있긴해도 대지는 다른 사람의 소유 토지라 해마다 세를 주고 있었고 지상위 초가삼간 뿐이었다.

당시 쌀76가마니 값은 우리 논 열마지기와 집딱가리를 팔아도 부족한 금액이었다. 아무리 연구하고 고민해도 장이쌀을 감당할 길이 없어 농협은행에 논을 담보하고 돈을 빌리려 하였으나 빌린다 해도 장이쌀 절반도 갚을수가 없는 금액만 대출받을 수 있다고 하여 사정 사정하여 신용보증대출을 받아 쌀을 팔아 장이쌀을 갚았다.

본 장이쌀에 관한 이야기는 웅상신문 토지가격 변화와 장이쌀 역사에 실은 바 있다. 이때부터 필자는 완전한 빚쟁이 신세로 젊은 청춘을 보내며 단 하룻밤도 빚걱정으로 편하게 잠들어 본 날이 없다. 이 이야기를 부모님과 가족들에게 단 한번도 해본 일이 없었다. 이야기를 해봐도 아무런 힘도 되지 못하고 걱정꺼리만 드리는 꼴이 되기 때문이었다.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7년 04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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