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상의 역사를 말하다(33)-2부
머슴들여 농사짓는 시대가 끝날 즈음 마을 부자들의 모습 대다수 부지런하고 절약하고 대체로 악착스러웠다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7년 01월 24일
 |  | | ↑↑ 박극수 시인 | ⓒ 웅상뉴스(웅상신문) | 중기댁이란 댁호를 가진 박종수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처절하게 가난한 생활을 어린시절에 했다. 백동에서 어린시절을 보내고 열 살 쯤 되던 해 유복하던 종조부댁이 가세가 기울어 웅촌석천으로 이거해 갈 때 어머니를 모시고 따라 이전 해가 그곳에서 20여년간 살다 해방이 되고 극우극좌로 정국이 극도로 혼란할 때 종숙부모님들이 고향 명곡으로 이거할 때 같이 오게 되어 처남 김종수가 경영하던 물레방앗간을 인수받아 운영해 많은 농토를 소유했다.
웅촌면에 거주할 시 면민 체육대회에 나아가 모래가마니 오래들고 있기에 항시 일등을 했고 동갑내기인 당숙 박일호는 씨름대회에 일등을 하고 아홉살이 더 많은 당숙 봉학은 무거운 짐지고 오래가기에 일등을 했다.
선대로부터 체력은 잘 http://www.biao.org.uk/piaget.html
http://www.biao.org.uk/jaeger-le-coultre.html 물려받은 집안이다. 자신이 어릴때부터 너무 일을 많이 해 자녀들에게도 아무런 일을 시키지말고 키워야지하는 한을 가진 그는 자식들을 호강스럽게 키웠다. 큰아들 영배는 현재 나이가 67세다. 태어나 이날까지 농촌에 살면서 단 하루도 농사일을 해본적이 없고 단 하루도 남의 품팔이한 경험이 없다.
무슨 연유인지 사업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백석지기 농토를 다 팔아먹고 부채정리를 다 하지못해 보증인들에게도 많은 부담을 주었다.
필자가 농협조합장에 당선되어 재정보증을 앉을 사람을 찾아야 할 때였다. 지금은 보증보험회사에서 보증을 하면 되지만 그때는 조합장 보증은 인적보증으로 일정금액 이상의 재산세를 납부하는 사람이 하도록 되어 있었다.
보증인으로서 자격을 갖춘 사람은 웅상에서 몇 사람에 불과했다. 가까운 친인척을 찾아가 보증요청을 했는데 일언지하에 거절을 당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절박감이었다. 선거를 치룰 때보다 보증걱정이 더 되어 조합장 취임을 포기해버릴까 하고 있는데 필자의 제종형님인 박종수께서 집을 찾아와 가까운 집안형님인 박봉수와 의논해 두분이 재정보증을 해주기로 하고 필요한 서류를 두 분이 농협을 찾아가 다 제출해주고 왔다고 했다. 눈물이 쏟아질 정도로 고마웠다. 두 분이 아니었다면 조합장에 당선되고도 조합장에 취임을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후 몇 년이 지난 후 영배가 필자를 찾아와 은행대출 보증을 요청하기에 그때 영배의 재정상태는 아버지 재산이 모두가 바닥이 들어날 정도였다는 사실을 잘 알아 “조카야 빚으로 빚을 감당해 가려고 하지 말고 내려버리고 청산해버려라. 그렇게하면 재산 반 정도는 유지할 수 있다”고 아무리 말려도 “아재요 이번 기회만 넘기면 완전 회복할 수 있다”며 사정하기에 이 보증을 서면 내가 망하는 일은 명확한 사실이란 걸 알면서 제종형님(박종수)이 조합장 취임시 재정보증해 준 은혜 때문에 꼭 재기해라 당부하며 해준 보증이 예상대로 채무이행을 못해 당시 필자의 재산이란 재산은 모조리 압류가 되어 경매로 넘어가게 되었다.
필자는 감당이 안되고 가족보기에도 민망하고 평생 보증 올무에 묶여 시달림 당하며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고 죽으려고도 했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이런 차에 김대중 정권이 실행한 농가부채 탕감대책으로 이자는 탕감받고 원리금을 저리로 10년 거치 10년 분할 상환이 되어 연기했다. 추가로 다시 연기되어 돈가치도 떨어지고 물가는 상승되어 그때 큰 돈액수는 오랜 세월이 지나니 떨어진 화폐가치 때문에 별 어려움 없이 보증 채무를 다 감당했다. 필자만이 보증피해를 준 것이 아니다.
필자가 아는 피해자는 명곡 이동일, 박순범, 조평, 최성조 등이 논 몇마지기 값을 물어 준 걸로 알고 영배 여동생 남숙이 신랑 윤성찬은 삼신교통버스기사로 봉직하면서 퇴직시까지 매월 봉급절반을 보증채무 이행으로 몰수당했다. 보증채무 변제를 해준 사람들은 영배를 원망하지 않으니 참 고마운 사람들이다.
그러나 영배는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보증채무를 변제해 준 이들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조차 없다. 모두 이상하다고들 한다. 미안한 걸 모르는지 너무 미안해 할 말이 없는 것인지 시효 소멸로 자신에게 법적 책임을 전가할 시기가 지났는데 이런 말을 재론하면 변제 의무가 발생할까 우려 때문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다고들 한다.
발방댁이란 댁호를 가진 박종호의 아버지 관동댁(박시원 1899-1959)은 웅촌 검단에서 기왓공장을 운영했다. 61세때 더운 여름날 구이소에서 목욕을 하다 익사 사고로 돌아가시고 박종호는 (1921-1970)50세에 자는 잠결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부인 발방댁(영월임필례)은 46세에 남편을 잃고 머슴을 데리고 대농을 부려 가야했다.
본래 악착스러운 기질이 있는 분이 남편없이 시어머니를 모시고 어린 자식 데리고 많은 농사를 지우려하니 더 악착스러운 모습으로 변했다. 사채놀이도 하고 장이쌀 놀이도 하며 이자도 한푼 깎아 주는 일도 없이 장이쌀 돌려받을 시 쌀이 조금이라도 맘에 들지 않으면 가차없이 다른 쌀로 바꾸어 오게 했다.
현재 아흔두살 연세로 요양병원에 입원하여 생활하면서도 가계 경영의 주도권 행사를 한다. 그의 아들 칠수는 국민은행 지점장을 역임했고 석수는 현대그룹에 영수는 농협에 중견 간부로 근무중이다.
명기댁이란 댁호를 가진 김구댁은 서창장에 무명광목 삼베 모시 비단 등 배장수를 했다. 서창장날이면 리어카에 물건을 가득 싣고 아침 일찍 부부간에 몰고 가서 전을 펴 장사를 하다 해가 저물어 어두워지면 펴놓은 전을 다시 거두어 리어카에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서창 장날에는 장에가 팔고 평일에도 집에 물건을 사러오면 팔았다. 배장수를 몇십년간 해 많은 농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김구는 정상적인 교육을 받은 기간이 짧은 걸로 아는데 다방면으로 많은 상식을 가지고 있었고 다른 사람과 담소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배장수는 성실하게 하였지만 집안일에는 마당 한 번 쓸어주는 일 없고 소죽 끓이는 아궁이에 불 한 번 부엌 넣어주는 일 없었고 심지어 사랑채에 거처하면서 큰 채에 있는 가족들에게 자기 거처하는 방에 전기불도 끄라고 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키도 작은 분이 가족들에게 군주 노릇을 했다.
회잠댁이란 호를 가진 이두수는 앞각단에 살다 아래마을 도로 변으로 옮겨 살았다. 앞각단에 살떄는 머슴을 들여 농사를 짓다 농사가 많이 줄어 머슴을 들이지 않고 농사를 지었다. 그의 아버지 이석진은 일본강점기때 측량기사를 해 국유지나 소유자가 불분명한 토지를 헐값이나 무상으로 취득하여 멀고 가까운 곳에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두수는 당시 같은 세대 중에서는 최고의 학력자로 농사일도 봉급생활도 단 한 번 하지 않고 아버지가 물려준 곳곳에 있는 토지를 팔아 술도 사먹고 한가로운 생활을 했으나 술을 너무 좋아해 병을 얻어 48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앞각단에 살 때는 마을에서 가장 좋은 집에 살다 아래 마을로 왔어도 마을에서 가장 좋은 목조집을 지어 살았다. 집 뒤 소유농지는 경지정리지구에 편입되었으나 마을 주민 중 모씨의 도움으로 경지정리지구에서 벗어나 주거지역이 되어 이곳에 아들 수반이는 건물을 건립하여 많은 세를 받아들이고 있다.
수반의 할아버지가 취득한 토지를 상속받아 여러곳곳에 많이 남아 이를 이용해 여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 수반이는 예비역 대령 출신으로 예편하여 건강이 많이 좋지 않다. 지금은 많이 회복되었고 그의 동생 동진이는 세계적인 기능인이며 기업경영을 원만하게 하고 있다.
석천이란 댁호를 가진 학성이씨 이갑남 여사께서는 울산 야음 청송심씨들이 집성을 이루고 있는 가문에 출입하여 남편을 일찍 여의고 시동생이 주진 도석광산 개발 경영권을 가지고 운영할 때 명곡에 정착하게 되었다.
시어머니 고산댁을 모시고 고부간 두 미망인이 한집에 살았다. 두 명의 딸은 부산에서 살고 시동생아들 심헌식을 양아들로 입양하여 초등학교 입학할 때 즘에 데리고 와서 같이 생활하다 중학교 진학부터는 타지에서 공부했다.
농사는 많지 않았지만 양질의 농토로 수리안전답을 경작했다. 상세경을 받는 머슴을 들이지 않고 세경을 작게 받는 어린 머슴을 들여 농사를 지었다. 이때 머슴살이를 한 주진 안용준은 어린시절 이 댁에 몇 년 동안 머슴살이를 하면서 너무 착하고 성실해 많은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머슴살이를 그만두고 부산 항구 근처 선박에 관련된 용구점에 들어가 점원 생활을 하다 점포주인이 점포를 경영할 사정이 되지못해 점포를 인수받아 경영을 해 큰 부자가 되었다. 안용준의 현재 나이는 73세 정도로 알고 있다. 지금도 성실하게 일하며 가까운 인척들과 친구들간에 애정을 쏟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있다.
화산댁이란 댁호를 가진 이규락댁은 농지개혁 이전에는 300석지기 대농이었다. 농지개혁으로 외지에 있는 농지는 강매되고 명곡에 소유한 농지만 경작하게 되었다. 이규락 옹은 지금 생존해 계시면 97세의 연세로 알고 있다.
서울 경기중학교(당시 5년제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 이후에도 유학공부를 많이 해 웅상에서는 최고 가는 유학자였다. 가정사를 웅상신문(본지)에 몇차례 이야기한 적이 있어 이야기 꺼리가 너무 많지만 모두 생략하고 한가지만 소개하지면 그댁의 인심이 너무 후덕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당시 마을 부자들의 모습들의 공통점은 대다수 부지런하고 절약하고 대체로 악착스러운 모습들이다. 당시나 지금이나 못사는 사람이 더 많은 세상이고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부자에 대한 정서는 긍정적인 면보다 부정적인 면이 많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소망은 부자가 되고 싶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못살아 무시당하는 것보다 욕을 들어도 잘사는 것이 났다는 편견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7년 0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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