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상의 역사를 말하다(33)-1부
머슴들여 농사짓는 시대가 끝날 즈음 마을 부자들의 모습 재산관리 철저한 부자, 반면 사업보증으로 빚지는 부자층 나눠져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7년 01월 02일
잘 살면 욕 얻어먹고 못 살면 멸시당한다. 너무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이야기지만 우리 현실에 딱 들어맞는 이야기다.
금번 이야기는 당시 웅상 부자들의 모습이다. 명곡마을 부자들 이야기가 곧 웅상 전역의 이야기다. 필자의 마을에 1960년경에서 1970년경 머슴을 들여 농지면적을 많이 경작한 흔히들 마을 부자라는 분들의 삶의 모습을 돌아보니 집집마다 개성이 뚜렷하고 남다른 면이 있었다. 한 가정 한 가정 간단하게 소개한다. 소개는 거주했던 앞각단 뒷각단 양지각단 아랫마을 순으로 한다.
앞각단에는 대동댁이란 댁호를 가진 박수용댁의 그의 아버님 박기업의 별명은 소똥망태할배다. 평생 먼길 나들이 할때 이외는 언제 어느 때고 소똥 망태를 메고 소똥 개똥을 담아 집에 모아 퇴비로 사용했다.
박수용은 어딜 나갔다 오던 빈손으로 집에 들어오는 예는 한순간도 없었다. 나무토막, 새끼토막, 지푸라기 한웅큼이라도 들고 들어오는 생활을 일생 했다. 두레논 멜 때나 협업농사 작업을 할 때 밥시간에 술이나 떡, 과일 같은 후식용으로 준비한 음식을 일반가정에서는 밥과 별도로 주는데 이집에서는 항시 밥과 후식용 음식을 한꺼번에 주었다. 이렇게하면 음식도 훨씬 작게 들고 배를 부르게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철저하게 행했다. 먹는 음식마저 귀하던 때라 먹는 것까지도 아끼며 조금이라도 절약해야겠다는 지혜로 행한 것이다.
아들 도진이와 장수는 대학교수를 하고 도근이는 현대중공업 중견사원으로 재직했다. 개산댁이란 댁호를 가진 김덕열 댁에 네 형제가 태어나 마을에서 가정을 이루어 일생을 다한 분들인데 세상을 떠난 순서는 거꾸로 막내인 덕열부터 시작해 맏형이 제일 나중에 떠났다.
성격의 강성대로 떠났고 사는 경과도 의욕적이고 강한 사람이 잘 살았고 유순한 사람은 오래살고 가난했다. 필자의 집에서 경작하는 논과 이웃해 김덕열댁이 경작했는데 얼마나 악착스럽게 물을 대는지 우리집 논은 다 말라 논바닥이 거북등처럼 골이나 벼가 뒤틀려도 그 댁 논은 마르지 않았다.
머슴을 두고 있던 집안이었는데 큰딸 원선이가 중학교를 졸업하자 진학을 시키지 않고 그해부터 머슴자리에 원선이를 머슴대용으로 일을 시켰다. 다른 자식들에게도 일을 많이 시켰지만 유독 원선이는 머슴처럼 일을 시켰다. 큰아들 재룡이는 방직회사 중견 간부로 근무한 것으로 알고 있으며 재철이는 농협중앙회 중역간부로 근무하고 있다.
뒷각단에 거주하다 아래마을 이주한 남산댁이라 댁호를 가진 이준걸 댁은 오래동안 머슴을 들이다 가세가 기울어 머슴을 들이지 않았다. 선비풍으로 풍기는 그분은 우불단 단장을 지낸 분으로 어디엔가 위세를 풍기는 감을 주는 자세였다. 머슴들을 대하는 자세가 하대하는 감으로 대했다는 감을 필자만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니라 다른 분들도 공감했다.
큰 아들 채형이는 원양어선 어로장으로 세계어로 사상 드문 최고의 실적을 올려 재력가가 되었다. 채익이는 울산남구의회의원, 경남도의원, 남구청장, 울산항만공사사장을 역임하고 현 2선 국회의원으로 재직중이다.
양촌댁이란 댁호를 가진 한철갑은 농사면적은 많았으나 수리불안전답을 많이 경작했다. 한철갑은 자수성가하여 가세를 일으켜 당대에는 여유롭게 생활하며 지역유림에도 적극 참여했다.
아들 한치열은 공무원생활을 하다 농협생활을 하다 경제개념이 희박했는지 복이 없었는지 가세가 기울고 건강이 좋지 않아 고생을 하다 세상을 떠났다. 한치열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이르러 한치열의 아들 상수는 인제대학교수로 생활을 하면서 재산 상속권포기와 부채 상속포기를 한 것으로 안다.
용당댁이란 댁호를 가진 정두완댁은 차남으로 형님은 일본에서 교포생활 하다 일본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정문수를 모시고 있어 형님이 경제적 도움을 많이 주었다. 당시 일본과 한국의 경제적 차이가 많을 때라 얼마 되지 않은 일본돈으로도 한국에서는 많은 농토를 구입할 수 있었다. 그렇게 형님도움으로 많은 농토를 구입해 많은 농사를 지었다.
본인이 피빠지게 번 재산이 아니라 그런지 욕심이 많았었는지 도박장에 출입도 자주하고 힘도 세고 성격도 우락부락해 도박장에가서 젊은 사람들과의 기 싸움에도 지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도 용돈이 여유로워서인지 서창색시댁(옛,룸싸롱)에 자주 출입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정두완의 아들 진용이는 모 회사 중역으로 근무하다 자영업을 하고 있다.
근동댁 서진우댁은 양지각단에 살다 이채익이 출생한 생가댁을 구입해 뒷각단으로 이전해와 살았다. 서진우는 왜소한 체구에 먹는 음식량도 소량이면서도 힘은 당찬 분이었다. 매곡에서 출생하여 어린 시절을 보내고 살기가 어려워 웅촌 석천마을에도 살았다 근동댁과 필자의 집안은 연이 깊은 집안이다.
필자의 조모님과 아버지 형제분들이 백동에서 석천으로 이전해가서 살 때 석천 마을 이웃에서 거주했고 그곳에서 두 가정이 비슷한 시기에 명곡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두 집 할머니도 같은 해에 출생해서 백수 가까운 연세에 세상을 떠나셨고 큰 아들 서극수와 필자는 성은 달라도 이름이 같고 초등학교 중학교 9년동안 한 교실에서 공부를 했다. 서진우는 목수생활을 하면서 많은 농토를 구입했다. 머슴을 들여 농사를 지을 사정이었지만 서진우도 당찬 분이고 그의 아들도 당찬 아버지와 엄청난 힘을 가진 외가를 닮아 그런지 작은 체구에도 힘이 세어 큰 아들 극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진학을 포기하고 그해부터 마을 머슴들과 두레논메기를 하고 마을상일꾼들과 모든 농사일 품앗이도 했다. 극수동생 관수는 마을에서 가장 무거운 짐을 지고 나르는 장사였다.
거남댁이란 댁호를 가진 이석순댁은 선대부터 유복한 가정이었다. 이석순은 민주당 정권시절 민선면장에 당선되었다. 5.16군사혁명으로 본의 아니게 임기를 만료하지 못하고 전국의 모든 선거직은 국회마저 해산되고 지방의회 모두 중도 하차를 해야 하는 비운을 맞이했다.
경작하는 농사면적은 많은 면적은 아니었지만 경작하는 토지들이 우량농지들이라 농사짓기에 다른집 머슴보다 수월했다. 그의 아버지 양호댁 용중은 가뭄이 올 시기에 물대러 오면 누구도 감당 못할 정도로 악발이었다.
양지각단 온산댁이란 댁호를 가진 박건중은 리동농협 조합장을 역임했다. 당시 농가에서는 예금 통장이 없는 가정이 80%정도였다. 은행에서 대출받는 제도가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절대 다수 농가들은 부자들로부터 현금 고리채를 빌려쓰거나 현물(장이쌀)고리채를 사용하며 간신히 가정을 꾸려가는 집이 많은 때라 고리채에 허덕이는 농가를 위해 해마다 저금리인 영농자금을 연초에 빌려주고 연말에 원리금을 회수했다. 배정된 영농자금은 작은 금액이라 목마른 사람에게 입술에 풀칠만 하는 격이었다.
마을마다 사전에 책정된 농사자금을 마을주민들이 조금씩 배분해 대출받았다. 해마다 필요자금이 절대 모자라는 금액이었지만 농촌에 특별한 재해와 이변이 있는 해는 자금이 여유롭게 배정된 때는 금액이 다 소화되지 않은 때가 있을 시 남은 금액을 대출받아 농지를 구입해 많은 농지를 소유할 수 있었다.
대다수 가정은 머슴식사 때 가족과 같은 밥상에서 식사를 했다. 그런데 이 댁은 머슴식사상은 머슴이 거처하는 사랑방에서 혼자 들게 했다. 큰딸 복년이가 사업을 하다 실패하여 많은 농지를 처분하게 되어 어려운 지경에 처했으나 아들 경수가 사업을 잘해 많은 돈을 벌었다. 아래마을 대일댁이란 댁호를 가진 박정건은 성격이 활달하고 거칠어 일본헌병이란 별명을 가졌다. 가족들에게도 군주노릇을 했고 머슴들에게도 엄했다. 농토면적도 많았고 우량 농지를 소유해 항시 마을에서 최고 세경을 받는 일 잘하는 머슴을 들였다. 소장수를 하였고 농우를 여러마리 사육하며 이로 인하여 재산증식의 수단으로 활용했다.
새벽에 자전거를 타고 논을 나가 도로변에서 1977년 64세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갑자기 세상을 떠났지만 이미 떠날줄 알았는지 생전에 재산관리를 자식들에게 자기뜻대로 분배하여 재산으로 인한 분쟁은 일체 없었다.
장남 치수는 24세의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가정을 부흥시켜야겠다는 의욕에서인지 농사일은 소홀하고 술집 등을 경영하다 몇년이 못가 받은 많은 유산을 다 날려버렸다. 치수 고모님 한분은 태어날때부터 앉은뱅이로 태어나 방안에서 생활하며 팔순중반까지 사셨다.
방안에서 가정사를 다 관여하고 치수가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자 오빠 박정건이 노후걱정으로 등기해준 벌들논 천여평도 치수에게 팔아 사업자금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거주하는 집까지 타인에게 넘어가는 지경이 되자 치수동생들이 협력하여 집을 붙들어 살고 있다.
이천댁이란 댁호를 가진 김한곤댁은 독일 병정이란 별호를 가진 분이다. 일을 너무 악착스럽게 해 불려진 별명이다. 본인은 공부는 못했지만 자식들에게는 공부를 많이 시켰다. 큰 아들 상순은 학교교장을 역임하고 상오는 농협중앙회 중견직원으로 근무했고 상일은 부산 동아대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한지가 얼마 안 된 시기에 세상을 떠났다. 매곡댁이란 댁호를 가진 김종수는 생긴 모습도 차가운 모습이고 생활도 차갑게 했다. 활짝 웃는 모습도 본 기억이 없다. 목수생활을 했고 새마을사업으로 초가집을 슬레이트지붕이나 기와지붕으로 교체할 시 기술자로 많은 노임을 받고 많은 일을 했다. 물레방앗간도 하고 현금과 현물(쌀)로 이자놀이를 해 많은 농토를 구입했다.
재산관리를 철저하게 했고 대여이자도 한푼 에누리 없이 철저하게 받았다. 자기 가정만 잘 이끌어 간 것이 아니라 처남 서진우는 목수일을 가르치고 매부 박종수는 경영하던 물레방앗간을 경영하도록 하여 두 가정도 백석지기 부자로 만들었다.
그의 어머니 충국댁은 성격이 활발하고 욕설은 잘해도 성격이 훈훈하고 여유롭고 넉넉하였다. 김종수는 깡마른 분이 찬물단지 같은 분이었다. 그의 아들 철호는 개운중학교 교감을 역임했다. |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7년 01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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