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상의 역사를 말하다(27)
웅상 장이쌀 제도 변화와 토지가격의 변화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6년 07월 15일
|  | | ↑↑ 박극수 박극수 (현)양산문화원 이사 양산시 향토문화연구회 감사 웅상의 발자취 편집위원장 | ⓒ 웅상뉴스 | | 장이쌀(쌀을 빌려 사용하고 이자를 붙여 쌀로 갚는 제도)를 얻어 먹고 잔뼈가 굵어진 가난 속에 어린시절을 보낸 이들에게는 이 용어만 생각해도 끔찍하게 다가와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다.
국가 전체 산업 중 농업이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던 1960년대까지만 해도 국민전체 인구 중 농업 종사 인구가 70%정도였고 농업인구 중에서도 자급자족 할 수 있는 농가는 25%도 되지 않았다. 절반가량은 식량이 부족하여 장이쌀에 의존해 부족한 식량을 충당하고 생명을 부지했다.
고개 중 어떤 고개가 험난하다 해도 보릿고개만큼 험난한 고개는 없다. 가정마다 보릿고개가 무너진 시기는 다르긴 해도 반만년동안 이어져오며 1970년경까지 지속되었다. 지난해 추수한 곡식은 다 떨어지고 햇보리가 나올때까지 굶기를 밥먹듯 했던 시기를 이르는 말이다. 보릿고개 때가 아니더라도 찌든 가난 속에 살아야했던 농촌 사람들 대다수는 평소에도 초근목피로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연명했다. 뼈저린 슬픈 역사를 딛고 배부른 오늘을 살 수 있음을 깊이 새겨야 한다.
가난을 말하는 말 중에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말은 먹을거리가 없어 배는 고프고 산나물이나 거친 음식을 먹어 변이 굳어 용변을 볼때 항문이 찢어져 피가 나오는 처참한 모습에서 나온 말이다. 금번 이야기는 장이쌀에 의하여 잔뼈가 굵어진 필자가 체험한 장이쌀 변천과정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참고자료는 필자와 같은 마을에서 같은 해 태어나고자란 죽마고우들이 초등학교 5학년때(1960년)모임을 시작한 친화계라는 계중 장부와 명곡교동마을(아래마을)농청장부를 참고했다.
1960년 이전에는 장이쌀에 관한 제도가 어떠하였는지 문헌을 구하지 못해 1960년경부터 이야기하고자한다. 가난한 농촌주민들은 금융권에서 가계에 필요한 자금을 빌려 쓴다는 일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고 빌려쓸 일이 생기면 마을 부잣집이나 마을에 형성되어 있는 계중 자금의 쌀을 빌리거나 현금을 빌려 사용했다.
현금을 빌려 쓸 경우 이자가 월 5%였기에 년 60%가 되었고 논밭을 구입할 자금이 부족하여 빌려쓰는 경우도 있었지만 가난한 집들은 식량이 떨어져 연명을 하기 위하여 빌려 사용하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장이쌀 이자는 그해 1월~2월에 빌려가 10월 달이나 12월 달에 갚아도 이자는 1년치 이자를 물어야했고 8월달에 빌려와 10월달에 갚아도 1년치 이자를 물어야했다.
더 악랄한 제도는 보리쌀을 7~8월경 빌려먹고 그해 가을에 보리쌀양 만큼 쌀로 갚아야 했다. 명곡교동마을 농청장부에 보리쌀을 빌려먹고 그해 가을에 쌀로 반환한다는 문안이 있고 당시(1960년)보리쌀 가격은 되당(2)170환(화폐교환되기이전. 화폐교환은 원단위로 바꾸어지고 환과원은 10:1비율로 변경됨)이었고 쌀값은 보리쌀 2배 정도 였으며 여자성인 하루 품삯은 보리쌀 1되 남자성인 품삯은 쌀1되였다.
보리쌀 빌린 이자를 현금으로 환산한다면 이자가 100%되는 셈이다. 농청장부의 차용증서에 단기 4293년(서기1960년)윤 6월 10일로 되어 있다. 윤달이 있는 해라 양력이 8월경이 되었을 것이다. 10월달에 갚는다고 한다면 빌린 지 2달 만에 100%이자를 갚는것이다.
한해만에 이자를 갚지 못하면 원미와 이자를 합산해 다음해 원미가 되어 이자가 늘어나는 복리이자로 늘어난다. 필자가 중학교 2학년시절 아버지는 장이쌀 몇가마니의 빚이 있는 처지에 작은 누나가 시집을 가고나니 장이쌀 빚이 80kg들이 10가마니가 되었다.
여러 곳을 통해 빌려쓴 것이 되어 여러 사람들로부터 빚독촉 받는 것이 두려워 같은 마을 이웃에 사는 어느 부자댁에 장이쌀을 얻어 갚기로 하고 장이쌀을 빌려줄 분과 아버지는 서로 빌려주고 빌려받기로 약속했는데 빌리는 조건에 차용증서를 써주기로 하고 차주는 아버지가 되고 그 차용증서 보증인란에는 아버지 아들인 필자가 열네살때(1962년)보증인란에 날인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어느날 저녁 아버지께서는 그 댁으로 가 장이쌀 차용증서에 보증인으로 서명날인하여야 한다기에 아버지 령이라 거역도 못하고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가 보증을 했던 것이다.
어린 마음에 상처가 되었고 미성년자에게 받은 보증은 법적으로 효력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당시 필자의 집에는 논 10마지기 정도 경작을 했는데 산답논이라 100도가리가 넘는 잔도가리에 천수답이라 사흘만 비가 오지 않으면 논고랑이 거북등처럼 되어 벼가 말려 비틀렸다.
흉년이 드는 해는 총 수확량이 쌀 10가마니도 수확 못 할 때도 있었고 풍년이 들어도 쌀 20가마니를 능가하지 못했다. 부모님은 건강이 좋지 못해 항시 꼬랑꼬랑해 우리 농사를 겨우 짓는 지경이었고 다른 집에 품삯을 들 수 있는 사정이 못되어 논에서 수확되는 쌀 말고는 소득이 전혀 없었다. 아무리 작게 수확하는 소출에도 농비는 들어가야하고 남는것이 얼마나 남았겠는가. 이걸로 생활을 해결했다. 필자의 어린시절의 기분은 부모님 건강상태가 전부였다 오늘은 좀 덜 아파야 할텐데 걱정하며 학교를 다녀오거나 소를 먹이고 와도 집에 여러 사람이 웅성거리면 간이 땅에 떨어지는 것 같았다.
부모님 중 한분이 돌아가시지나 않았나 하는 불안이 들었다. 부모님들의 지병이 짙어 병원에 입원해야 할 처지임에도 입원비를 마련할 길이 없어 입원도 하지 못하고 약을 사먹고 집에서 치료를 하였지만 의료보험이 없던 때라 약값 감당하기조차 버거운 처지에 가족들 먹는 음식도 거칠고 헤어진 옷을 입고 헤어진 신발을 신어도 이마저 해결하기 급급해 빌린 장이쌀 이자를 갚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장이쌀 이자를 한 톨 갚지 못하고 5년을 경과하니 10가마니 빌려온 쌀이 76가마니를 갚아야했다. 당시 쌀 한가마니 가격은 1,600원(2L되당 가격은 400원) 갚아야 할 장이쌀을 현금으로 환산하니 1,216,000원이 되었다.
필자의 집에서 소유경작한 논 열마지기를 다 팔아도 일백만원도 체 못될것 같았다. 아버지와 의논하여 장이쌀 빌린 댁에 소유한 논을 다주고 장이쌀과 빚을 교환하자고 사정해 보기로 하고 장이쌀을 빌려준 그 어른을 찾아가 어르신 내 목숨이라도 달라면 내 목숨이라도 드리고 장이쌀에서 벗어나고 싶은 심정입니다 살려주시는 셈치고 우리 논 다 가져가시고 장이쌀 멍에를 벗겨주십시오 눈물로 사정을 해도 매몰차게 그런 마음으로 살면 빚을 갚을 수 있다 빠른시일 내 갚아라 하는 말만 일관하고 몇 시간을 사정을 해도 당신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한결같다는 말을 해 피눈물도 없는 야멸찬 분이란 원망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리 궁리를 해도 빚 갚을 길이 없어 내 목숨이라도 팔 길이 있다면 팔것인데 하는 생각과 도박을 해 갚을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그 순간에 도박이라도 해 갚을까하는 한이 70이 다된 지금까지 장난질 화투놀이도 하지 않게 만들었다.
농협중앙회 양산군지부를 찾아가 대출방법을 알아보니 우리 논 전체를 담보를 해 대출을 해도 장이쌀 금액의 절반도 되지않는다 했다.
딱한 처지인 나를 동정하는 담당직원은 농사짓는 사람들에게 담보물 없이 신용보증제도가 있긴 하지만 중앙회 대출 자격 승인받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하였다.
그날 저녁 농협중앙회장에게 필자의 가정사정과 장이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처절한 사정을 적어 편지를 보냈더니 보름가량 지나서 농협양산군지부직원이 집으로 찾아와 신용보증부 신청을 해보라고 하여 신용보증부신청을 우리 재산 두 배인 이백만원을 했는데 장이쌀 빚을 다 갚을 수 있는 장기 저리로 130만원 대출 승인이 나서 130만원 대출 받아 대출 받은 그 돈을 그대로 장이쌀 빌려준 댁으로가 장이쌀을 현금으로 환산해 갚겠다하니 하늘에서 돈이 떨어졌나 은행이라도 털었나 어디서 돈이 생겼노, 하며 놀라며 의아해 했다.
그렇게 무리하여 갚지말고 해마다 일부만 갚아나가라고 했다. 어르신 그런 말씀마세요 한해 이자만해도 우리재산 다 팔아도 모자라는 판국에 무슨 재주로 갈라 갚을 수 있겠습니까 반문하고 은행에 가 억지사정을 해 빌린 돈이기에 은행 털어 온 돈입니다. 돈으로 받아주세요 하니 좋은쌀 팔아와 갚아라 아무리 좋은 쌀을 팔아도 76가마니 쌀을 같은 쌀을 팔기도 어렵고 손수레도 하나 없는 저가 그 많은 쌀을 지게로 져 날라야하는데 사정을 좀 봐주십시오 하니 크게 인심이라도 쓰는것처럼 현금으로 갚도록해라 했다.
어르신 장이쌀을 제가 빌린 것도 아니고 중학교 2학년 학생이 아버지와 어르신이 보증인란에 도장찍어라하니 찍은 일뿐인 제가 장이쌀 빚을 다 갚습니다.
5년 전 10가마니 빌린 장이쌀이 5년이 지난 지금 76가마니를 갚아야합니다. 70가마니 값만 받고 6가마니 값은 좀 감해주십시오 하니 오히려 저를 꾸짖으시며 젊은 사람이 세상 그렇게 살면 안된다 한 톨도 감해줄 수 없다 하기에 현금으로 계산하면 얼마가 됩니까 하니 필자의 계산으로는 대출받은 돈이 좀 남아햐 하는데 쌀값을 최고로 비싼 가격으로 환산해 가지고 간 130만원을 다 주어도 삼만원이 가량 부족하여 삼만원은 감해준다 하였지만 화도 나고 자존심도 상해 나머지도 며칠 안에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하고 나온 후 이틀 지난 후 3만원을 가져가 드리니 받지 않으려 했지만 거어이 방에 던져버리고 나오며 어디두고보자 내 힘으로 당신 집보다 내가 더 풍족하게 살도록 할것이다 하는 원망인지 다짐인지 하면서 나왔다.
그런 일이 있기 이전에는 그분에게 길거리에서 만나 인사를 반갑게 했는데 그런 일이 있은 이후에는 만나 인사를 해도 반갑다는 생각이 들지 않고 지독한 분이 얼마나 잘 먹고 잘 사나 보자하는 원망이 들었다. 그 어른만이 그런것이 아니라 그 댁 가족들을 만나도 미운 마음이 생겼다.
내 나이 마흔이 넘고 그 어른도 세상을 떠나고나니 그 어른이 재산관리를 그토록 철저하게 하니 부자가 되었지 하는 생각과 그때 장이쌀을 얼마간 감해주었더라면 내 악착스러운 마음이 해이해질 수도 있었을 것인데 그 어른이 내 삶의 지표설정에 큰 힘이 되었다는 생각전환이 된 이후부터는 오히려 그 어른이 존경스럽다고 느껴졌다.
명곡 이동조합에서 농민운동을 하게 된 계기도 장이쌀에 짓눌린 가난한 농민들의 어깨를 조금이라고 가볍게 해야겠다는 일념에서였고 전국 이동농협 중 명곡이동농협이 현물 출자량이 최고 많은 조합으로 육성 할 수 있었다.
현물 출자 한 쌀을 장이대출하여 50%했던 장이쌀 이자를 30%로 하기로 했고 30%였던 이자를 20%에서 10%까지 하게 했다.
마을 년도별 장이쌀 이자는 1965년경까지 50%, 1971년경 30%, 1973년 25%, 1974년 20%, 1981년 10%였다.
장이쌀 이자가 얼마나 무섭노하면 1960년 전후에 한해쌀 값이 20%~30%상승했다. 빌려먹은 쌀의 이자 50%와 쌀값 인상금액을 합해 현금을 환산한다면 한해이자가 80%~90%가 되었다.
국민소득도 증대되고 국가정책으로 단위농협 상호금융으로 낮은 이자로 대출을 쉽게 받을 수 있는 길이 생겨 장이쌀 거래는 소멸되고 말았지만 명곡리동농협이 웅상전역의 장이쌀 이자 낮춤에 크게 기여했음이 확실하다.
1969년 명곡이동조합을 제외하고 웅상관내 8개이동 조합이 합병하여 웅상단위농협이 설립되었다. 명곡 이동 조합은 현물 출자와 그간 적립한 자본금으로 부산 서면 옛 태화 백화점 일대에 토지를 매입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당시 웅상 토지가격이나 부산 서면 토지가격이 별반 차이가 없었다. 농산물 직거래 판매장과 백화점식 구판장과 금융점포와 부산에서 공부하는 명곡마을 주민 자녀들을 위한 무료 합숙소를 건립 운영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추진중이었으며 여타 장기적 발전계획을 추진하였다.
정부의 강력한 단위조합육성정책으로 인한 이동조합 육성책은 강압적 규제로 변경되어 외부투자를 할수 없게 되고 규제를 감당하기가 어려워 명곡이동 조합도 1973년 웅상 농협과 합병을 했다. 이동조합을 존속할 수 있는 정책이 지속되었다면 명곡이동조합 규모는 현 웅상농협보다 몇 배의 큰 농협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가져진다.
웅상의 토지가격 변화된 모습을 언급하고자 한다. 명곡 친화계원들이 1983년 친화계 기금 쌀 80kg들이 21가마니를 가마당 52.000원에 처분하니 1,092,000원이 되었다. 부족금 258,000원은 필자가 협찬하여 명곡논 300평을 1,350,000원에 매입하였다(평당4,500원) 2000년 초반경 1억 2천만원(평당 400,000원)에 처분하였다. 논값이 90배 상승했다.
1990년경 회야댐 건립으로 울산시민의 식수를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댐 상륙인 회야강변 웅촌전역과 웅상일부지역이 환경보존지역으로 지정되어 해지를 위한 투쟁 경비가 5천만원 가량 소요되었다.
당시 웅상 양질의 논값이 평당 만원가량 했다. 이를 확실하게 기억하는 것은 당시 필자가 웅상농협조합장 재선에 무투표로 당선되었다. 경합자가 있게 되면 선거자금으로 사용할 계획으로 논 천평을 팔아 일천 만원을 준비하고 있었다.
조합장 선거경비가 합법화 된 것이 아닌 부분에도 당시로서는 공공연하게 사용할 수 밖에 없는것이 일반적 관례가 되어 있었다. 무투표 당선으로 선거자금을 사용하지 않아 조합원들과 지역민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기 위해 환경보존지역 해지에 적극적으로 앞장서고 해지를 위한 경비에 보탬을 주기 위해 500만원을 협찬하고 논 500평을 500만원에 구입했다.
당시 구입한 토지 인근지역에 2010년경 도로 확장으로 인한 토지 보상금이 평당 150만원에 보상되었다. 그 예를 본다면 환경보존지역 해지운동으로 소요된 경비 5천만원의 땅값은 2010년경 75억원이 된다. 지금 지역현안을 해결하기위해 75억원 소요될 긴급한 사안이 발생했다면 협찬에 의해 모금될 수 있을지 해이적 생각이 든다.
웅상라이온스클럽이 창립될 때가 1988년 12월이다. 이때 웅상면 인구는 15,000명 가량되었고 농업인구가 50%정도였으며 웅상의 좋은 논이 평당 만원정도했다. 웅상라이온스 가입 회비가 1인당 150만원 이었다.
논 150평 값을 납입하고 창립에 참여한 회원들이 54명이었다. 당시 주민들은 지금보다 훨씬 가난했고 교육수준도 낮았다. 그때보다 지금은 경제적으로 훨씬 윤택해졌고 교육수준이 높아진 지금 라이온스 가입회비로 땅값 150평 값으로 가입하라고 한다면 과연 라이온스창립이 가능할 것 같지가 않다.
배움의 혜택을 누리고 더 많이 가진 자는 그에 걸맞는 생활을 해야하는데 교육수준이 높아지고 부자들이 많아질수록 훈훈함은 각박함으로 치닫고 있다. |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6년 07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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