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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를 산 사람들의 모습

산성엄씨, 엄복선씨의 일생

박극수
(현)양산문화원 이사
양산시 향토문화연구회 감사
웅상의 발자취 편집위원장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6년 06월 27일
ⓒ 웅상뉴스
그동안 필자가 모아온 주변인들의 삶을 소개해 왔다. 소개한 분들의 삶이 특별한 삶이 아니라 평범하게 살아온 모습이라 본인이나 가족들에게 양해를 구한 분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분들도 있다. 진실을 기록하기 위하여 좋은 부분과 알리고 싶지 않은 부분까지 기록했다.

성인(聖人)의 삶에도 가치관따라 부정적 부분을 지적하는 이가 있다. 최고의 성서로 알려진 성경이나 불경과 논어 구절에도 가치관따라 부정적 부분을 지적하여 책으로 펴낸 이도 있다. 아무리 좋은 업적을 남긴 사람도 비판꺼리가 있고 오류를 남긴 사람도 칭찬꺼리가 있다.

조선말에 출생하여 한 세기를 이 고장에서 살다 가신 몇 분들을 선정하여 삶의 모습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몇 분들의 삶을 소개함은 소개된 분들의 삶을 소개하고자함이 아니라 시대를 산 선조들의 삶이 대동소이 했기에 같은 시대를 살아온 삶을 소개한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같은 시대를 살고있는 세대간에도 이해되지 않는 세대간의 갈등이 있다. 반 세기를 달리하는 세월만 흘러가도 구전으로도 전해지기 어려운 소중한 삶의 모습이 소멸될 것 같아 격변하는 역사의 순간을 소중한 자료로 남기고자 한다.

삶의 목적이 자신의 행복 추구가 아니라 가족들의 생존을 지키기 위한 벌버둥의 일환이다. 그 흔적을 기록한다. 본인이나 가족들에게 누가 되는 점이 있었다며 양해를 구한다. 더 많은 분들의 삶을 소개하고 싶지만 지면이 허락되지 않아 허락하는대로 소개할까 한다.

실제 삶의 모습을 진실하게 남기는 것이 진실한 역사를 기록하는 일이다. 필자가 혼자 기록하기에는 한계가 있기에 시민들의 협조를 구하고자 한다. 원고를 주셔도 좋고 원고를 작성하지 않고 메모 또는 구두로서 의견만 주셔도 감사할 일이다. 역사를 기록한다는 자부심과 사명감으로 많은 시민의 협조를 구한다.

산성엄씨 엄복선의 삶의 모습

울주군 온산읍 산성리 영월 엄씨댁 3남 2녀중 네 번째로 1925년에 출생하여 2007년에 사망. 남편 이달언은 울주군 온산읍 덕신리 경주이씨댁 8남 1녀 중 3번째로 1917년 출생하여 1970년 사망.

열일곱살난 해에 남편과 결혼하여 결혼한 즉시 부부동반하여 1942년경 일본으로 건너가 살다 첫 아들을 낳아 잃어버리고 일본인들의 학대와 멸시에 견딜 수가 없어 한국으로 돌아오려고 안달을 하던 차에 해방을 맞아 밀선을 타고 당도한 곳이 부산영도라 그곳에서 셋방을 얻어 첫딸을 낳고 살았다.

1950년경 명곡 돌기댁(웅상초등학교 뒤편)에 세들어 살았고 7호국도변 명곡농협 소유였던 집에 세들어살다 회야천변 청송댁으로 전전하다 필자의 제종형님댁 아래채에 1960년경 세들어 살게 되었다.

세들어 사는 집과 필자의 집은 명곡리 945번지 동일지번으로 울도 담도 헐어버리고 한집같이 오가며 사는 집이다. 삶의 모습을 자세하게 지켜볼 수 있었고 엄복선 여사로부터 생전에 들었던 기억을 더듬어 글로 적는다.

명곡 945번지에 세들어 올 당시 가족은 내외분과 2남 2녀의 자녀를 두고 좁디좁은 단칸방에서 6명의 가족이 먹고자고 생활했다. 남편은 허벅지에 고름이 계속 나는 병을 앓아 노동에 종사할 수 없게 된지 10년이 넘었고 하루 일과는 집에 누워 있는 일과 간신히 이웃에 가 화투놀이 뿐이었다.

본래 도박을 즐겨하던 분인데 화투에 도가 트일 정도로 화투를 마음대로 가르고 상대의 눈을 속일 수 있을 정도로 능수능란한 재주꾼이었다. 화투 만지는 솜씨가 마술사와 같았다. 새 화투를 사와 몇 번만 만지면 화투전면을 보지 않고도 감각으로 알 수 있다고 했다

혼자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 혼자서 화투장을 가지고 노는 날이 많았다. 어떤 날은 화투 몇 모를 사와 몇 번 만지다 말고 계속 새 화투를 만지고 했다. 당신이 경험한 일이라 그런지 누구에게나 절대 도박은 하지 말라고 하였다.

도박 좋아하는 사람은 도박으로 망한다며, 화투장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분도 지난 날 도박장에서 며칠 밤을 새우는 날이 많았고 많은 돈을 딴 때도 많았지만 낭비로 탕진해 버리고 남은 것은 성실하게 날품팔이 하는 모습이 우습게 보이고 한 판만 잘하면 팔자 고친다는 헛된 생각에 사로잡혀 남 보기에 사람 같잖아 보이고 자기자신도 자신에게 회의를 느끼게 되며 정신도 병들고 육체도 병든 자가 된다고 도박질은 하지말라고 누구에게나 말렸다.

남편은 성격이 본디 온순하고 짜증을 잘 부리지 않은 성품이었는데 몸이 불편해지니 아내에게 짜증도 자주내고 까탈스럽게 굴었다. 그러나 자녀들에게는 큰 소리도 짜증도 내지 않는 모습은 예나 그때나 똑같았다.

병든 남편과 어린자녀들을 굶길 수는 없고 삼시세끼 때우는 일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혼자서 뼈가 부서지도록 노동에 임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해도 끼니 해결하기가 버거웠다. 그 당시 성인 여자 하루 품삯은 보리쌀 한 되였다. 큰딸이 웅상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에 있는 한복집에 취직하여 밥도 얻어먹고 기술도 배우고 약간의 월급도 받아 입 하나 덜게 되고 가계에 약간이 도움을 주어 큰 힘이 되어주었다.

모심기철에는 마을 모심기가 시작되고 끝나는 날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40일에서 50일정도 모심기 품팔이를 했다. 모심기 못자리깡에 모찌러 가는 시간은 새벽 5시경부터 시작하여 모심기를 오후 8시까지 심는 날이 예사로 있었다.

농사일이 본래 다 중노동이기도 하지만 모심기 역시 고되기가 만만찮은 작업이다. 못줄마다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서 전심전력을 다해야 하는 작업이다.

지금은 모심기가 이앙기에 다 의존하지만 요즘 젊은이들이 시집와 내딸이고 남의 집 딸이고 그때 모심는 것처럼 고된 일을 한나절만 시킨다면 감당하지 못하고 도망가 버릴 것이다. 물논에서 하루종일 엎드려 모를 심다보면 허리는 끊어질 듯이 아프고 피로는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다.

여름이면 밭메기, 논메기 가을철에는 벼베기, 벼걷우기, 타작일을 품팔이하고 남편 병원시중까지 들어야했다. 남편을 병원에 입원도 시켜 보았지만 병은 차도가 없고 병원비만 작살이 났다. 병원비를 감당할 힘도 되지 못하고 집에서 약을 구해 치료를 했다.

치료에 도움이 되는 약이라는 말만 들으면 아무리 구하기 어려운 곳이라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구해와 약으로 이용했다. 가족 입치레 하기도 버거운 차에 자녀들이 학교에 들어가 학교 공납금과 책값, 공책 값도 만만찮아 사전에 품삯을 받아쓰고 일은 뒤에 해주었다.

마을에 농사를 좀 짓는 가정치고 신세를 지지 않은 집이 없었다. 품삯으로 받아오는 것이 대체로 쌀이 아니면 보리쌀이었다. 현금은 간혹 받았다. 집집마다 인심을 가늠하는 기준은 쌀, 보리쌀 되박주는 모습이라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어떤 집은 후하게 꾹꾹 눌러 한 줌이라도 더 주고 싶어 하는 집이 있는가 하면 어떤 집은 쌀 한 톨이라도 덜 주고 싶어 벌벌 떨며 주는 집도 있었다. 되박 주는 모습을 집집마다 다 이야기 할 수 있지만 몇 집 인심만 이야기 할까 한다.

이석순(웅기댁 박주현의 모), 임칠순(국회의원 서형수 장모)이 이분들은 한줌이라도 더 주지 못해 안달이고 잡곡이나 푸성기라도 있으며 그저 주었다. 남편, 자녀를 보살피느라 얼마나 힘이 드냐고 위로의 말도 꼭 해주었다.

그런가하면 우리 마을에서 농사를 많이 짓는 집 중 어느 집은 끼니꺼리가 떨어져 딱한 사정이니 보리쌀 몇 되만 주면 나중에 품삯으로 갚겠다며 달라고 사정하여 빌려온 보리쌀 2되를 물에 씻으니 다 떠내려가고 남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뒤에 그 집 시어머니를 통해 안 사실이지만 그 집에서는 썩어서 사람은 먹지 않고 소죽에 넣어주는 보리쌀을 먹으라고 준 것이다. 배고픈 서러움보다 그런 취급을 당하는 모습이 너무 처량했다.

1965년경 주진 범살미에 있는 도석 광산에 취직을 했다. 일이 고되고 월급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날마다 일거리가 있다는 사실에 얼마나 안심이 되었는지 모른다. 농사일 품팔이 할 때는 일이 아무리 고되어도 일이 있는 날은 마음이 편했지만 일이 없는 날은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

작은 월급이었지만 받아오는 즉시 월급 봉투를 몽땅 남편에게 맡기고 자녀들 학용품 값이나 쌀 팔아먹는 돈까지 남편으로부터 받아 사용하였다. 남편의 몸은 병들어 거동도 간신히 하는 지경이었지만 정신은 멀쩡해 가계운영을 알차게 운영해주었다. 혹 자녀들이 아버지를 소홀하게 여길까 하는 우려에서 가계운영을 맡긴 것인데 그래서 그런지 자녀들이 아버지를 존경하는 모습이 참 고마웠다.

약이란 약은 다 구해 치료했지만 남편의 병은 차도가 없고 조금씩 더 깊어가기만 했다. 그런데 남편 병에 특효약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의 시신을 삶아 먹이면 나을 수 있다
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을 듣고 연고지 없는 최근에 선 묘지를 찾기 위하여 온갖 곳을 찾아다니다 외홈 걸인 마을에 사는 분이 며칠 전에 돌아가셔 걸인을 묻는 공동묘지에 묻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묘지를 확인한 후 연고지를 물으니 생전에 가족과 전혀 연락이 없었고 장례식에도 가족은 한 사람도 오지 않았다기에 확인한 그날 저녁 간단한 제사를 지낼 주과 포를 마련하고 연장을 들고 혼자 묘지로 향했다.

그날은 그믐날이라 청명한 날이라해도 캄캄할텐데 날씨가 흐리고 이슬비까지 내려 어둡기가 칠흙같았다. 지금이야 그 길에 경운기 정도는 다닐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지만 그때는 밝은 낮에도 겨우 다닐 수 있는 1km넘는 논두렁길을 더듬거리며 묘지에 당도해야 했다.

묘지에 제사를 모시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를 연발 되뇌이며 묘지를 파기 시작했다. 불쌍한 분이라고 장사를 치룬 마을 분들이 얼마나 정성껏 묻었는지 세시간 넘게 파니 시체가 나왔다. 관에 시신을 모신 것이 아니라 거적을 둘러 모셨다. 거적을 풀고 시체부분 중 다리를 떼어내려고 하니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낫으로 찍고 쪼고 흔들고 온갖 짓을 다해 간신히 떼어내 자루에 담고 묘지상태를 대충 원상태로 해놓고 다리를 들고 집으로 가지고 와 하루 종일 솥에 끓여 아내가 먼저 조금 마시고 남편에게 여러차례 나누어 먹게 했다.

남편에게는 돼지 뼈 고운 것이라 거짓말 했지만 남편은 알면서도 자기병을 고치겠다는 욕심에서 먹는 것이 아니라 아내의 정성에 감격하며 먹어준 것이다. 남편이 참 고마운 것은 그때만 그렇게 먹은 것이 아니라 똥물을 받아주어도, 어떤 먹기 역겨운 것도 아내 정성을 아끼는 마음에서 아무 불평 없이 먹었다.

고은 다리뼈를 정성껏 분종이로 곱게곱게 여러 겹으로 포장하여 파온지 이틀이 지난 날 밤에 혼자 가 묘를 파 시체에 붙여 묻어주고 묘지상태를 원상태로 해주고 제사를 모시고 왔다. 그날 밤에는 비가 제법 세차게 내렸지만 다리를 주신 그분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에서인지 속속들이 옷이 다 젖도록 작업을 하고, 계절이 초가을이었음에도 추위도 느끼지 못했고 차갑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고 무섭거나 고되다는 느낌도 없었다.

그 이후에도 좋다는 약은 다 구해 치료했지만 병은 더 짙어 가기만 했다. 하루는 광산 일을 끝내고 먼 산에 가 구하기 어려운 약초를 무겁도록 베어 이고 오니 남편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날 저녁 53세의 나이로(1970년) 남편은 세상을 하직했다.

이웃분들의 도움으로 마을 공동묘지에 매장을 했다. 그러한 와중에도 자녀들은 건강하고 착하게 잘 자라주었고 학업성적도 좋았다. 큰딸은 시집을 가 가정을 이루고 한복집을 차려 손수 한복을 정성껏 지어 손맵시가 맵다는 소문이 자자해 날로 손님이 늘어간다고 했다. 작은 딸은 직장에 나아가 가정에 보탬을 주었다. 평생 입치레 급급하다 약간의 저축도 해가며 살았다.

작은 움막 같은 집이라도 마련할 돈이 저축되어 집을 구할까하는 차에 막내아들이 친구와 산탄공기총을 가지고 놀다 친구가 실탄이 들어있는 줄 모르고 방아쇠를 당겨 복부에 맞아 사경을 헤매게 되어 부산대동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병원으로 이동 중에 의식이 불명되어 병원 입원을 하고도 하루가 지난 후에 희미하게 의식이 돌아왔다. 그 순간이 길이가 몇십 년이 되는 것 같았다.

엑스레이 촬영을 하니 총알 몇 십 발이 위와 창자와 여러 곳에 박혀 제거 수술을 했다. 의사 말에 의하면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갔다면 이 세상 사람이 되지 못했을 것이라 했다. 수술을 끝낸지 며칠 후 엄청 고통이 심해 진단을 하니 혈액 속에 실탄이 몇 발 들어가 혈액과 같이 흐르고 있다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혈액속의 실탄을 제거하는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다행이 제거가 되어 완치를 하고 퇴원했다.

의료보험이 생기지 않을 때라 치료비 치루기가 난감했는데 큰딸과 작은딸이 보태고 고의성 없이 친구와 놀다 실수로 발생된 일이라 실수한 친구를 탓해 본 적 없고 치료비를 감당하라고 요구한 적도 없는데 친구 부모님이 치료비 일부를 감당해 치료비는 걱정없이 치루었다.

큰 아들은 대학 입시를 앞둔 고등학교 3학년때이고 막내는 고등학교 입학할 시기였다. 큰 아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로 진출하여 가계를 도우겠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공부할 시기를 놓치면 다시 하기가 쉽지 않다. 집을 마련하는 일은 뒤로 미루면된다. 지금껏 집 없이도 오순도순 잘 살아왔다. 지금처럼 살자”하며 큰 아들 마음을 돌려 대학진학을 하게 만들었다.

육십 넘어까지 다니던 힘든 광산일을 감당하기 어려워 광산일을 그만둘까 하던 차에 광산이 폐광되어 다니고 싶어도 다닐 수 없는 처지가 되어 광산일을 그만두고 한복집 경영으로 가사 일을 돌볼 겨를이 없는 큰 딸의 가사일을 도우며 살았다. 큰 사위는 병으로 세상을 하직하고 큰딸은 자녀에게 짝을 지어주고 성실한 신앙생활을 하며 잘 지내고 있다. 작은딸은 착하고 건실한 남편을 만나 무난한 가정을 이루었고 아들 둘은 자영업을 하며 알뜰하게 살아가고 있다.

부부는 결혼한 이후 ‘우리집’ 지붕 밑에서 단 하룻밤도 잠들어 본적 없이 좁은 셋방살이 신세로 평생을 해왔지만 상대를 원망해 본적 없이 항시 미안해하고 고마워하며 살았던 추억이 아름답다. 자녀들이 셋방에서 자라서인지 결혼하는 즉시 자기 집을 마련하여 손자손녀들에게 남의 집에서 자고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너무 고맙고 대견하다.

2007년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했다. 명동 공동묘지에 모신 남편도 파묘를 해 같이 화장하여 시가 선산 밑(울주군 온산읍 덕산리)에 뼛가루를 뿌렸다.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6년 06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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