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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상의 역사를 말하다(25)/ 농청장원놀이 기능 보유자 이유락

실제 체험한 삶을 노래, 선조들의 피눈물로 점철된 생활 모습 재현
박극수
(현)양산문화원 이사
양산시 향토문화연구회 감사
웅상의 발자취 편집위원장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6년 05월 16일
ⓒ 웅상뉴스
1950년 후반 경 명곡마을에서 라디오를 가장 먼저 구입한 두 가정 이야기를 한다

이유락 씨는 1920년 1월 13일 생으로 아버지는 석용, 어머니는 경주 이씨 사이에서 2남 1녀중 두 번째로 태어났다.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고 같은 또래 친구들은 학교에 갈 때 월사금 50전(쌀 4.5되)낼 사정이 되지 못해 학교를 가지 못하고 아버지로부터 한글과 한문을 틈틈이 배우며 가사 일을 도왔다.

그가 10살 되던 해 어머니는 2남 1녀를 두고 동생을 낳던 중 동생과 같이 세상을 떠났다. 그때 형은 열세 살이고 그는 열 살, 여동생은 다섯 살, 아버지는 마흔 살이었다. 어머니를 잃은 동생은 의지할 곳을 잃고 그만 졸졸 따라 다니기에 그도 어린 나이였지만 동생이 얼마나 측은했던지 모른다.

열세 살 때 머슴살이를 시작했다. 머슴 사는 집의 아들은 유락보다 다섯 살 아래인데 웅상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나날이 학교가고 싶은 마음은 더 했지만 자신의 처지에 당치도 않은 생각이라고 얼마나 자신을 탓했는지 모른다.

그해 머슴 한 해 세경으로 쌀 20되를 받았다. 아버지가 그 이듬해는 유락을 집에 있게 하고 형에게 머슴살이를 하라고 했지만 형은 기어이 머슴살이를 하지 않겠다하며 만주로 떠났다. 그때 나라 사정은 일본통치하에 1926년 4월 마지막 왕 순종이 승하하여 국상을 치루었고 6월 10일 만세사건이 터지고 10월에 총독부 청사가 세워지고 전국각지에서 항일운동이 물결치던 때라 백성들의 삶은 피폐할 때로 피폐했다.

머슴살이를 하면서도 배워야겠다는 의욕을 버리지 못하고 웅상초등학교에서 하는 야학에 등록을 했다. 야학은 당시 웅상초등학교 교사들이 수당을 받지 않고 봉사하는 것이었다. 야학에 다닌 기간은 3년이었지만 머슴살이하는 처지에 농사철에는 아예 야학에 갈 생각도 할 수 없고 농사철이 아닌 때는 주인의 눈치를 살피며 학교 가는 날보다 학교 못 가는 날이 더 많았다. 이런 가운데에서 선생님들이 얼마나 열정으로 가르쳤는지 그때 배운 것들이 일생을 살아가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모른다.

아버지는 새어머니를 두 분이나 맞이했지만 오는 분마다 그들 남매에게 마음을 주지 못하고 그들 남매도 그 분이 싫어 아버지에게 같이 살지 못하겠다고 하니 두 분 이다 얼마 되지 않아 가버렸다. 팔십 중반이 되어도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보다 사십에 혼자 되어 육십여섯까지 외롭게 홀몸으로 사시다 가신 아버지가 더 가슴 아팠다. 어머니 돌아가시기 한 달 전 주남 경주이씨 외조부님이 돌아가시고 외조모님은 얼마나 살기가 어려웠던지 어린 외삼촌을 데리고 서창 전씨댁으로 개가를 하였다.

외삼촌은 개가한 댁에 마음이 붙지 않았는지 그의 집에 자주와 머물곤 했다. 외조모님은 당신 살기도 어려우면서 딸이 죽고 엄마 잃은 외손자들이 얼마나 불쌍했는지 개가한 전씨댁의 논을 그의 집에 소작을 하게 도움을 주었다. 외조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그 소작마저 떨어지고 말았다.

열아홉 살에는 2년간 이준걸(국회의원인 이채익의 부)댁에 머슴살이를 하고 그 해부터 마을 최고 세경 쌀 네 가마를(1940년)받았다. 부산에서 우마차 운수사업을 하던 친척이 세경을 좀 더 주겠다하여 자기집에 와 있기를 권해 우마차 짐 나르는 일을 2년간 했다.

세경은 더 받았지만 농촌보다 주변 환경이 아무리 절약하려고 해도 절약이 되지 않아 남는 게 없었다. 철도청 마차 짐 운반부로 취직을 하여 자취를 시작했다. 그때 고향에서 한해에 태어난 박철수 친구가 목수 일을 하기 위해 찾아왔다. 한방에서 생활을 하던 중 친구와 같이 1943년 일본 북해도 석탄광산에 징용으로 끌려갔다.

일은 고되고 밥량은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희멀건 죽을 조개비(조개껍질)에 한 그릇을 퍼주어 그걸 먹고 배가 고파 견딜 수 없어 쉬는 시간이나 틈나는 시간마다 쑥이나 나물을 뜯어 삶아 소금을 넣어 먹기도 하고 풀을 잘못 뜯어와 부기(퉁퉁부어 오르는 현상)가 나기도 예사였다.

한방에서 자고 멀쩡하게 일하러 갔던 사람이 사고로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다시는 얼굴 볼 수 없는 일이 빈번하게 생겼다. 자신도 어느 때 그런 처지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 속에 살면서도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나 죽으면 편하지 하는 생각이 들고 죽음에 대한 불안은 없었다. 하는 일은 다이너마이트 폭파 작업 구멍 뚫는 일이었다.

기계를 매고 일을 하다 감전에 의하여 몇 번이나 의식을 잃고 가스에 질식되어 들것에 몇 번이나 실려나와도 죽지 않았던 것은 너무 천한 생명이라 저승에서도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라 그랬던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겨울철에는 눈이 얼마나 많이 오던지 다다미방에 옳잖은 이불을 덮고 자니 그 추위로 살을 찢는 것 같았다. 여름철에는 모기와 벼룩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아 벼룩이 사람을 들고 가려고 했다. 1년 반 동안 징용살이를 하며 노임을 받았지만 숙식비를 제공하고 나면 남는 것은 쥐꼬리만 했고 골병만 남는것 같았다.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훨씬 낫겠다는 생각을 하고 탈출하기로 마음먹었다.

탈출하다 잡히면 징용 온 사람들이 지켜보는 광장에서 무참하게 맞아죽고 도망가다 들키어 잡히지 않고 계속 도망치면 총에 맞아 죽었다. 죽을 각오로 하고 사전에 어디로 갈 것인지를 보아두고 장대줄 비가 오는 날을 택해 탄광 울타리 철조망을 끊고 도망을 나와 밀선을 타고 부산에 왔다. 탈출 과정의 이야기만 해도 두꺼운 책이 될 것이다. 만주 생활을 하다 돌아온 형님은 고향에 농토를 좀 마련하고 부산 부두에서 하역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는 형님 소개로 부산 부두에서 하역작업부로 취직을 했다. 보통 100kg 넘는 무게의 짐을 하루 종일 어깨에 메고 나르는 일을 3개월 정도했다. 일은 고되었지만 배는 고프지 않아 좋았다. 일본 징용생활에 비하면 장난에 불과했다. 일본인들은 광분하며 우리나라 젊은 청춘남녀들을 길거리에서나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마구잡이로 잡아 징용이나 징병이나 정신대로 끌고 갔다.

유락도 일터에서 일하다 잡혀가 일본가는 징용수송 배를 타기 위하여 부두에 줄을 서 있는데 형님이 그의 손을 잡고 무조건 화장실로 끌고 들어가 대변보는 공간으로 들어가 숨어라 하기에 똥구덩이 속에 들어가 세 시간 넘게 숨어있다가 형님이 나오라하여 손을 내밀어 형님 손을 잡고 나오니 형님이 가지고 온 포대 안에 들어가 짐이 되어 형님친구가 끄는 우마차 짐속에 실려 나왔다. 이때부터 직장에 가지도 못하고 두 달 가량 숨어 살다보니 해방이 되어 징용도 면하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

해방이 되고 한국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생명에 위협을 느껴 관리하던 재산을 버리고 일본으로 갔다. 형님과 유락에게 짐 나르는 일은 자주 시켰던 부두보세 창고에 들어가 형님은 창 너머 물건을 넘겨주고 유락은 밖에서 물건을 쌓았는데 쌓는 즉시 다른 사람이 모두 가져가 버리고 형님이 창고에서 나올 때는 빈손이 되었다. 고향으로 돌아와 이준걸(국회의원 이채익부)댁에 머슴살이 3년을 더했다.

해마다 동지가 지나면 보름쯤 집에 가 집안일을 도우는 기간 동안 형님은 소남 광주안씨 댁 16세 된 안묘연 규수와 결혼을 했다. 예쁘고 참한 형수는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온 것 같았고 하늘에 달과 별을 집안에 들여 놓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여동생도 일찍 시집가고 여자라고 없던 집에 여자가 들어가니 좋을 수밖에 없었다. 형수가 너무 좋아 졸졸 따라 다니며 부엌에 땔 나무가 거칠지나 않을까 조바심이 되어 수월하게 이용할 수 있는 땔감을 새벽부터 어두울 때까지 하루 세 번씩이나 해 날랐다.

목수 일을 배우기 위해 목수 뒤를 몇 년이나 따라다니며 일을 했다. 타고난 소질이 없었는지 목수일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26세에 매곡달성 서씨 댁 처녀와 결혼을 하여 2년 생활을 했지만 인연이 아니었는지 파혼을 하고 29세에 전라도 순천에 살다 빚 독촉을 견디지 못하고 집과 살림을 고스란히 두고 가족들 몸만 빠져나와 지향 없이 오다가 머문 곳이 명곡 마을이었다.

진주강씨 댁 처녀와 결혼하여 일생을 같이했다. 가진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고 부족한 사람과 만나 고생만 죽도록 하면서도 아무런 불평 없이 자식들 착하게 키워 다 성혼시키고 나를 봉양 잘해준 아내에게 미안하고 고마울 따름이다.

생각할수록 아내는 착하고 예쁘다. 형님 댁에서 부산전포동에 집터를 구해놓고 자재 일부를 구하고도 사정이 못되어 집을 짓지 못하고 있을 때 아내가 안달을 하며 우리가 형님 댁에 가 집을 지어 주자고 극성을 부려 연장을 챙겨 아내와 같이 가 한 달 가량 작업을 해 형님가족이 잠잘 수 있는 작은집을 지어주고 얼마나 행복해 했는지 모른다.

어느 여름 방학 때 장질조카가 집에 왔을 때 끼니 꺼리가 떨어져 아내는 하루 종일 굶어가면서 웃는 낯으로 조카에게 밥을 해 먹이고 아무 일 없는 양 했던 모습이며 이토록 어려운 지경에 유락은 라디오가 갖고 싶어 병이 날 지경이라 마을에서 상세경 받는 사람의 반 년치 세경 값을 빚을 내어 라디오를 구입해올 때 1958년경 아내의 속마음은 찢어질 것 같았을 것인데 내색 한 번 하지 않고 “병나는 것 보다 낫지 잘했어요” 했다.

그 당시 마을에 라디오가 있는 집은 아래 마을 마을 약방댁 최학용댁 한 집 뿐이었다. 노래를 좋아하는 유락은 노래를 너무 듣고 싶고 배우고 싶어 환장할 것 같아 미친 짓을 했던 것이다. 아내만 남다른 것이 아니라 자신도 돌아보니 역시 별난 사람이었다. 하는 짓들이 너무 엉뚱한 짓을 하며 살았다.

사라호 태풍이 휘몰아쳐(1959년 9월 16일~17일, 음력 8월 14일~15일)도로가 끊어져 차량이 통행하지 못해 형님댁에 차례를 모시러 가는 길을 포기하고 추석 앞날 밤을 맞이하니 마음이 편치 못해 천둥이 치고 억수같이 비는 내리고 뿌리 깊은 큰 나무도 뿌리째 뽑혀 넘어지는 태풍을 맞으며 집을 나서(그때는 시계 있는 집이 극히 드물어 시간을 알 수 없음)밤새 걷고 그 이튿날 오전 10시 가량 될 쯤 큰댁 전포동에 당도하니 형님가족은 차례상을 차려놓고 유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차례를 모시자고 다른 가족들이 다 독촉을 해도 형수만은 우리 시동생이 오지 않을 리 없다하며 고집을 부려 기다렸던 것이다. 전화가 없을 때라 연락할 방법이 없었는데 서로 마음이 통해 느낌으로 알았던 모양이다. 차례상 멧밥을 짓기 위해 등에 지고 간 쌀은 비에 젖어 떡살이 되었다. 유락의 이런 모습이 훈계가 되었는지 조카와 아들들이 전국각지에 흩어져 살면서도 제삿날은 전 가족이 한자리에 다 모인다.

우리 지역에서 유래된 농청장원놀이가 우리 마을에서 계승되어 경상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었던 것은 한 맺힌 민초들의 삶의 모습을 재현한 작품이 출연하는 모든 이들이 실제 체험한 삶이고 가슴의 응어리를 풀어헤치는 모습들이었기 때문이다.

규정상 몇 사람으로 한정된 기능보유자 중 한사람으로 지정되어 영광이기도 하지만 송구스러운 일이다. 창립시 같이 기능보유자로 지정된 사람은 행수 박철수, 소리꾼 김필연, 영각수 정상덕이다.

유락이 지정된 것은 타고난 목청 탓도 있지만 이보다 평소 소리를 즐겨 자주 부를 때도 한으로 애간장을 끓어 올리며 소리를 해왔고 농청장원놀이 연습 때나 공연 때도 어려운 가정에서 배우지 못하고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 헤어진 옷도 기워줄 이 없이 머슴살이 하면서 물 대러 들판에서 밤을 새우며 엄마를 그리며 달빛에서 옷을 기운 일, 머슴살이 서러움, 징용살이 때 당한 잔혹한 매질과 배고픔의 뼈저린 모습, 으스러지는 몸으로 나날이 불볕 더위에 논골에서 땀흘리던 순간 순간을 떠올리면서 피눈물을 토해내는 소리를 했기 때문이다.

그는 “후배들이 이런 애간장 끓는 작품을 공연 못할까 걱정이다. 자자손손 계승되길 바라는데 모든 기교면에서나 감각 면에서는 젊은이들이 구식 세대를 훨씬 능가하지만 배고픔을 모르고 뼈아픈 고생을 모른 그들이 선조들의 피눈물로 점철된 생활 모습을 재현 못할까 우려된다.

소리나 모든 공연시 목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고 겉모습으로 정리된 모습이 아닌 가슴 밑바닥에서 우러나오는 소리와 모습을 보여주기 바란다”며 “살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아내 못지않게 고생한 형수님, 우리집에 시집와 홀로된 시아버지 모시고 가난한 가정 이끌어 가신 노고를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미안하고 고맙다. 산다고 바빠 용돈도 한번 드리지 못했다.

자식들이 푼푼이 준 돈 50만원을 형수에게 용돈하라고 드렸다. 기어이 받지 않으려고 사양해도 억지로 드리고 왔다. 기분이 너무 좋다. 앞으로 자주 찾아 뵈옵고 용돈도 자주 드려야지”하고 다짐하기도 했다. 형수에게 용돈을 드리고 온지 한 달 쯤 지나 이유락은 형수에게 용돈을 더 드리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떠났다.

지금까지 이야기를 농청장원놀이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지정 신청시(2016년 10월)기능 보유자들의 살아온 모습의 소개 글을 필자가 썼다. 그때 쓴 글과 주인공이 생존시 들은 이야기를 기억을 더듬어 적은 이야기다.

이유락과 같은 마을에 살면서 이유락이 라디오를 구입할 시 당시 유일하게 한집 라디오가 있었던 이북 흥남에서 6.25동란 전 월남하여 살았던 김금순씨를 이야기 하고자한다.

-이북 흥남에서 월남한 김금순-

시댁이 경주 최씨라는 것 말고 아는 것이 없다. 들은 바에 의하면 시조부 때까지만 해도 족보를 소지해오면서 낙동강변에 살고 있었는데, 홍수로 인하여 가옥과 가재도구 일체 모두 유실되고 생명만 간신히 살았다한다. 이때 족보도 유실되었다한다. 시조부 이상 몇 대인지 몰라도 몇 대째 외동이었다고 하며 시증조부께서는 경북 성주 하빈에서 관원 생활을 하다 만취하여 심야에 귀가 도중 다리에서 실족하여 익사체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가장을 갑자기 잃고 생활이 어려워 시증조모는 객주집을 하시고 시조부께서는 머슴살이를 했다. 손이 귀한 것이 한이 된 시증조모님은 손이 번성할 수 있는 명당이라고 지관이 귀뜸해준 남의 선산에 몰래 시증조주의 유골을 이장하고 선산 소유자의 이장 강요가 심해지자 가족을 데리고 약간의 세간을 챙겨 야간 도주를 하였다. 무작정 낙동강가를 걸어오다 머문 곳이 김해 대동이라 한다.

1989년 5월경 시동생, 사촌 시동생 조카들 여러 사람들이 몇 대의 승용차를 타고 시증조부의 산소를 찾기 위하여 하빈으로 갔다. 마을 연세 높으신 어른들을 찾아가 전해들은 이야기를 하니 마을에서도 꼭같이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는 묘지가 있다며 그분의 산소를 찾아가니 산세가 여자의 아랫배 부분에 해당하는 형국에 흔적만 남은 산소를 찾을 수가 있었다.

김해대동에서 시조부는 머슴살이를 하며 주인이나 마을 사람들로부터 성실하다는 평을 받았다. 산소를 잘 택한 탓인지 시조부께서 3남 1녀를 보았다. 막내 시삼촌은 정신이 맑지 못해 결혼도 못하고 행불되었다고 했다.

시아버지 최봉룡께서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양산에 있는 양곡상에 취업하여 주인의 신임을 받아 해방이 되어 주인은 일본으로 가면서 가게를 물러주고 갔다. 사업이 날로 번성하여 시조부 장례식 때 상여가 장지에 도착했는데 조문객의 행렬은 빈소에서 멀리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시조부 산소는 양산 춘추원 부근 공동묘지 중턱에 모셨다. 양산-물금간 도로 인터체인지에 편입되어 화장하고 파묘를 했다. 시조부의 산소 비문에는 엉뚱하게 박호순의 묘라는 비석이 서있었다. 산소에 세울 비석을 술 취한 까막눈의 인부가 실수로 바꿔 세워서 그렇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을 진작부터 알면서 반백년을 그대로 지속했다. 참 무관심한 행위였다. 시아버지께서는 빚보증을 잘못 서 하루아침에 그 많던 재산을 날려버리고 빈손이 되어 중풍에 걸려 잘 걷지도 못하다가 양산에서 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가는 도중 버스가 굴러 세상을 떠났다. 어린 시절 부잣집 자식으로 자라 고생이라 모르던 시어머니는 하루아침에 참담한 처지로 바뀐 세상을 살아가기에 감당하기가 너무 힘에 겨웠을 것이다.

남편은 총각시절 이 어려운 가운데 서울대학교를 재학했고 재학 중 학생운동을 하다 주동자로 몰려 취조 중 얼마나 많은 고문을 당했는지 심장이 확장되어 평생을 지고 고통 받으며 살았다. 국가 혼란기에 군위생병장으로 입대하여 제대를 했다. 넷째 시누이는 서창금융조합 이사로 재직하던 손영걸과 결혼하여 서창에서 사는 인연으로 시어머니는 남편과 시동생을 데리고 서창으로 오게 되었다.

부산 부평동에서 인쇄업을 했던 둘째 시누이도 서창으로 왔다. 첫째 시누이가 결혼할 당시만 해도 집안 형편이 좋았던지 선대 때부터 엄청난 부자인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지영진의 형인 지영대와 결혼했다. 시누이 딸 지정수의 남편 박봉식은 전 서울대학교총장으로 재임했고 외국어대학총장, 금강대학총장을 역임했다.

남편은 학창시절 당한 고문으로 병원을 자주 찾게 되고 그 병원에 근무했던 김금순 간호사와 연을 맺어 결혼하게 되었다. 김금순은 이북 흥남 부근 정미소를 경영했던 부모님 슬하에 2남 4녀 6남매 중 위로 오빠 두 사람, 언니 두 사람, 아래로 여동생이 하나인 다섯 번째로 태어났다. 오빠들은 일본유학을 다녀올 정도로 인텔리였다.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부르조아로 몰려 오빠, 올케, 언니들은 6.25동란 전에 서울에 와 살았다. 전쟁이 발발해도 쉽게 끝날 줄 알고 곧 만날 것을 약속하고 인천에서 헤어져서는 지금까지 생사도 알 수 없다.

서창에서 1년 가량 살다 주진진등으로 옮겨 2년 가량 생활하다 1955년 명곡으로 와 정착하게 되었다. 남편은 위생병으로 근무한 경험과 김금순은 간호사로 근무한 경험을 살려 병이 나도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이웃 분들을 돌보며 약간의 약값 정도를 받고 생계를 이어갔다.

남편은 웬만한 의사보다 진료를 더 잘했다. 의학 서적을 많이 탐독하고 어려운 이웃들에게 인간애를 베풀고자 했다. 남편은 효심이 얼마나 강했던지 한밤중에라도 시어머니 방이 차가우면 내일 아침 밥 끓일 땔감밖에 없어도 그 땔감으로 시어머니 방을 데워주었다. 남편에게 내일 아침 해 먹을 땔감은 어쩌냐 하면 내일 아침은 내일 아침 방법이 생긴다하며 당신은 가만있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고문 상처로 남편은 고생만하다 4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 자녀들은 첫째 아들 15세, 둘째 아들 13세, 막내 딸이 10세였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세 자녀를 키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말로 표현할 길이 없을 정도였다. 남편이 간 후 시어머니도 7년 후 세상을 하직했다. 시어머니는 전주이씨 왕족이라는 대단한 자부심을 가진 부잣집에서 곱게 성장해 결혼할 당시 부잣집으로 시집와 가세가 기울어 고생이라고 모르던 분이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슬하에 9남매를 낳아 두 아이는 열 살 미만에 보내고 3남 4녀 중 남편은 차남이었음에도 어머니를 평생 모셨다. 남편 형제분들은 다 돌아가셨다. 남편은 생존시 많은 글을 집필했다. 글의 내용을 잘 모르지만 집필한 엄청 많은 분량의 원고를 남겼는데 그 원고가 행여 자식들에게 누가 될까 남편이 떠난 후 한장 남김없이 소각해버렸다. 자녀 2남 1녀는 각자 가정을 이루어 부산에 살고있고 김금순은 혼자서 명곡에 살고 있다.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6년 05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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