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상의 역사를 말하다(24)/천성산
박극수 (현)양산문화원 이사 양산시 향토문화연구회 감사 웅상의 발자취 편집위원장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6년 0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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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군지(1986)에는 원적산으로 기록돼 있으며 일명 천성산 또는 소금강산이라고도 한다. 지보(1878)에는 취서산 한 줄기가 뻗어 내린 곳에 통도사가 있고 큰 줄기가 평지에 내려 협곡을 이루고 순지가 됐다가 다시 솟구쳐 원적이 돼 동으로는 기장, 울산을 끼고 서로는 양산 중간이 되고 남으로 뻗어내려 금정산이 됐다. 원효가 수도한 곳으로 원효산이라고도 하며 원효가 창건했다는 원효암지와 미타암이 있으며 수도중인 원효를 찾아 요석공주가 산막에 머물러 산막이 되고 원효가 중국중남산 운제사의 위난을 보고 해동원효 척판구중(海東元曉 擲板救衆)이란 판자를 날려 1천명의 스님을 구출했다는 둥 설화가 무성한 명산이다.
천성산에 일명 불지수라는 금수가 있는데 바위굴 속에 있으며 아무리 가물어도 그 물의 양이 변하지 않으며 수면에 금색이 뜨는데 그 물을 먹으면 습진에 약효가 있다고 한다.
천성산 금수는 법수원 위에 한 곳에 있고 웅상에서 능선 넘어 양산시 하북면 용연리 성불암 뒷 바위에 한 곳 있고 또 한곳은 정족산 능선의 금봉암 뒤 바위굴에 있다. 성불암 금수와 금봉암 금수는 암몰숫물이라고 하는데 여름철에는 한숨에 달려 암물숫물을 먹어야 그 해의 더위를 타지 않는다고 전해온다. 한편 천성산은 양산8경의 하나로 웅상지역에서는 해마다 철쭉이 만발하는시기인 5월경 철쭉제를 지내고 있다. 또한 천성산은 내륙에서 가장 먼저 첫 해를 볼 수 있는 곳으로 해마다 1월 1일 양산시민들이 정상에 모여 건강과 안전을 기원하고 있다.
해발 922m의 천성산은 예로부터 깊은 계곡과 폭포가 많고 경치가 빼어나 소금강산이라 불리었으며 원효대사가 당나라에서 건너온 1천명의 스님에게 화엄경을 설법해 성인이 되었다하여 천성산(千聖山)이란 지명이 유래되었다하는 불교 성지이다.
봄이면 진달래와 철쭉꽃이 만산홍을 이루고 특히 우리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화엄늪과 밀밭늪에 희귀한 꽃과 식물이(끈끈이주걱 등)곤충들의 생태가 잘 보존되어 있어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생태계의 보고이며 천성산 산나물은 예부터 임금님 수라상에 진상할 정도로 그 맛이 일품이며 가을이면 억새가 온 산을 뒤덮어 환상의 등산 코스로 각광받고 있다.
철쭉이 만발하는 시기인 5월경 지내는 철쭉제는 양산 천성산 철쭉회가 주관하며 천성산 정상을 붉게 물들이는 철쭉을 주제로 산상음악회, 산신제 등의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지역을 대표하는 축제임에도 관련예산이나 시민 호응도가 부족해 지역 관광자원으로 육성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 이러한 현실을 타파해야 한다는 여론이 확산되어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웅상지역 축제 특성화 연구용역 예산을 양산시로부터 확보해 웅상지역에 걸맞는 축제 개발을 위해 노력해오다 이에 따라 2015년부터 회야제를 개최하여 회야제 행사 중 철쭉제도 한 부분을 이룬다.
회야제는 개최한 역사가 일천하여 아직 문화제로서 면모를 갖추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양산에는 별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고 생활권이 다른 천성산 동편 웅상쪽과 천성산 서편쪽에 있는 별개 문화를 중시하며 삽랑문화 행사와 회야제를 별개 실시하도록 하는 전통을 수립했다는 것은 역사적인 일을 했고 계속 다듬고 가꾸어 문화제다운 문화행사로 가꾸어가야 한다.
천성산은 내륙에서 가장먼저 새해 첫해를 볼 수 있는 곳으로 해마다 1월 1일이면 양산시민들이 정상에 모여 소망을 기원하고 있다. 천성산 정상부에 주둔하던 군부대가 이전하자 정상부 산림을 복원하는 생태공원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동면 개곡에서 울주군 삼동면 조일리까지 천성산 전구간 중 평산동 장흥 저수지 상단부분 약간 구간을 제외하고는 경부선 고속전철선로가 지하에 건립되어 있다. 지하 터널 공사로 인한 생태계 변화를 우려한 지율스님의 공사 저지단식투쟁과 환경단체의 합세로 법정투쟁까지 벌여 장기간 공사 정지 가처분 신청까지 내려지고 정부에서는 구간 변경까지 검토하다 끝내 당초 계획대로 마무리 했다.
장기간 공사 중단으로 인한 추가 경비가 엄청나게 소요되고 공사는 지연되었다. 생명을 걸고 투쟁한 지율스님도 합세한 환경단체도 국가 장래를 위한 애국 충정의 발로에 의한 것이고 강행한 정부 역시 같은 맥락이었지만 잘잘못의 판단은 역사가 판단할 일이다.
깍아자른 듯 기암절벽 절경위에 있는 미타암은 646년(선덕여왕15)원효대사가 창건한 89암자 가운데 하나이다. 920년(경명왕4)에 지공대사가 중창한 후 1376년(우왕2)에 중창했다. 구한말 우리나라의 선사상을 부흥시킨 경허의 제자 혜명(1861-1937)이 했으며 현재 그의 비석이 남아있다.
미타암은 천년동굴에 인공을 가해 조성한 석굴사원이다. 현존하는 시설로는 대웅전 산신각 요사채 등이 있으며 보물 제 998호로 지정된 석조 아미타여래입상이 모셔져있다. 미타암은 천년 동굴이지만 인공을 가한 흔적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8세기 통일신라 시대에 성행하던 석굴사원 조성의 한 단면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또한 미타암에 모셔진 석조아미타여래입상은 신라 아미타신앙의 전개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자료다.
미타암은 천성산 8부 능선 인근에 위치해 웅상지역 전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며 부처님의 영험함을 믿는 수많은 불교신도들이 등산객과 함께 찾는 곳이다. 미타암에서 울리는 새벽인경(오전4시)종소리는 웅상전역과 웅촌검단지역과 정관, 임곡, 두명, 월평 구석구석까지 울려 부처님의 가피(은혜)가 넘처나길 간절한 기원이 담긴 소리인 듯 들리던 소리가 도시화로 인해 종소리는 소멸되어 들리지 않는다.
교육의 장이 되어 천명의 성인이 배출되었다는 전설을 지닌 천성산의 정기 받아 계속 성인이 배출될 인재 양성의 장이 될 영산대학교가 건학 이념을 원융무애(圓融無礙)라는 불교정신에 따라 개교되었고 웅상고등학교, 웅상중학교, 웅상여자중학교, 천성 초등학교, 신명초등학교, 평산초등학교, 백동초등학교가 설립되었다. 평산동에 소재한 신명초등학교 서쪽 방향에는 지적장애우들과 아픔을 같이 나누는 가온이 자리하고 있다. 이북 원산에서 출생하여 성장한 변영걸님이 주진 흥등에 토지를 매입하여 경농목장을 경영하면서 웅상지역의 가난한 가정의 자녀들의 교육비에 보탬을 주기 위하여 사재를 출연하여 1970년경부터 2000년경까지 경농장학회를 운영해왔다. 장학금 수혜자들은 지금 혈기왕성하게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세대들이다.
경농목장 자리에는 변영걸님의 아드님 변원탄 원장이 질병중에 가장 다스리기 난감한 마음병으로 고생하는 이들과 알콜중독 자들을 치료하기 위한 양산병원을 설립하여 전국에서 규묘면에서나 시설면에서나 의술이 가장 뛰어났다는 평을 받는 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개운중학교 설립자 임상수 교장선생님의 사유재산이었던 주남 소주일대 우불등을 개운중학교를 설립함과 동시에 학교 재단에 기부하여 운영되어오다 채기엽 이사장이 취임하여 학교 자산인 엄청 많은 우불등 일대 토지를 처분하여 효성그룹에서 인수받아 효성목장으로 운영하다 일부는 소주공단 조성시 보상을 받고 공단으로 조성되었고 아직도 많은 토지가 남아 효성식물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소주 공단에 들어선 공장들은 국가와 지역경제에 이바지 하고 있다.
개운중학교에서는 우불등 이외 재단의 많은 토지도 매각 처분하였다. 학교 재산을 처분할 때는 처분해야 할 이유가 있었겠지만 재단에 기부한 임상수 선생님의 거룩한 뜻을 기리지 못한 것이 아쉽다. 지금껏 학교에서 우불등 재산을 소유했다면 전국에서 최고규모의 종합대학을 설립해도 부족함이 없을 재단이었을 것이다.
천성산의 작은 자락인 우불산은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영남의 명산중 명산으로 알려져 있다. 과일나무에 비하면 가장 충실하고 알찬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가지와 같은 자리에 위치한 산이라 우불산의 산세를 보면 웅상지역에서 일본을 전복할 만한 인물이 배출된다는 설로 인해 일본인들에게 엄청 수난을 당한 산이기도 하다.
우불산은 삼호동산 2-3번지 일원에 있다. 서창동에서 북쪽으로 1km쯤에 있는 산인데 높이는 해발 209m밖에 안되는 야산이다. 삼한시대에 이곳의 지명이 우화(于火)였는데 우화의 화(火)자의 뜻이 불과 같으므로 불이라는 말을 한자로 표기해 우불(于弗),우화(于火), 우풍(于風)은 모두 같은 지명이다. 우불산은 삼한시대 초기부터 지금까지 불려오고 있는 매우 유서깊고 영험이 있는 신명한 산이라 할 수 있다.
산꼭대기에 포곡식 석축산성이 쌓아졌고 지금도 그 흔적이 길게 남아 있다. 그 모양이 마치 조개껍질 모양으로 정상을 빙 둘러 쳐져 있다. 그러나 이곳의 석축에 대한 기록이 없어 언제 쌓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략 삼한시대 초기로 보고 있다. 그 이유는 우불산에서 서북쪽에 인접해 있는 울주군 검단리 일원이 삼한시대에는 우시산국이라는 부족국가의 도읍지로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 우불산에 성을 쌓아 우시산국을 보호하는 수도성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우불산성이 우시산국과 역사를 같이 했다고 볼 수 있다.
우불산성의 면적은 4만 3천 315㎡이고 둘레는 769.82m, 폭은 2-3m흔적이 남아있는 성의 높이는 3m이다. 성돌은 활석이 대부분이고 성물은 남아있는 모습이 훼손되어 알 수 없고 남북 모서리에 망루와 치성이 함께 축조돼 있었다는 흔적을 볼수 있다. 남쪽망루에 서서 보면 기장군 정관면 지경고개까지 시야로 다 관측할 수 있고 북쪽 망루에 서서 보면 웅촌면 대복까지 다보인다.
우불산성을 2005년 10월 13일 경상남도 기념물 259호로 지정했다. 방치돼 있던 우불산성이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기까지 웅상라이온스클럽과 영산대학교 향토문화연구회, 양산시향토문화연구회가 앞장서 노력했다. 이에 따라 2006년 우불산성 복원 정비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웅상장단기 발전 계획에 2020년까지 복원하는 것으로 계획돼 있다. 양산시에서는 허울 좋게 퍼스트 웅상이란 기치를 걸고 있다. 퍼스트 웅상 확립에는 웅상 정체성 확립이 최우선되어야 함에도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노력은 너무 소극적인 것 같다.
한편 우불산성과 우불신사 삼호고분군이 있는 우불산은 1959년 서창광산(남섭채광)허가로 30여년간 광산으로 개발되다 1994년 납석 고갈로 폐쇄되었다. 이후 우불산 능선이 폭탄을 맞은 것처럼 방치돼 오다 2000년대부터 우불산 보존회원들과 지역주민들의 노력으로 2008년 양산시 산림조합비 2억원을 확보해 복구공사를 실시한 바 있다. 복구 공사에도 불구하고 우불산은 여전히 조림사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며 지역주민들은 우불산성과 우불신사 삼호 고분군을 연계해 우불산을 역사공원화 해야 한다는 의지를 밝히고 잇고 우불산성은 웅상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이므로 조기에 꼭 복원되어야하며 유지관리에도 정성을 기울여 가야될 절대적 과제이다.
삼호 고분군은 우불산 서남쪽 기슭인 주남동 산 91번지 외 7필지에 있다 군의 면적은 8만 3천 559㎡이고 2005년 10월 13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 260호로 지정됐다. 고분군일대의 표고는 해발100-128m로 비교적 완만한 경사를 형성하고 있다.
고분의 형태는 소형 횡혈식 석곽묘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곳저곳에 도굴에 의한 훼손상태가 그대로 노출되고 있다. 최근 사설 묘지 조성을 위한 도로가 개설되면서 고분이 일부 파괴된 곳도 보인다. 대표적인 고분 크기는 직경이 5-4m내외이고 높이는 2m내외로 작은 무덤 형태를 하고 있다.
도굴된 고분의 안을 살펴보면 외곽에 석축을 쌓고 그 안쪽에 목곽과 부장품을 놓아둔 수혈식 석곽묘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수집된 유물은 모두 신라의 토기로 보이며 연대는 5.6세기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003년도에 지표 조사시에 발굴된 유물로는 옆구리에 구멍이 나 있는 유공경대가 있었고 목이 약간 긴 장경호 항아리와 단경호외 대호 및 옹관편이 있었는데 대개 6세기 이전 양식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불신사는 우불산신을 모시는 곳으로 경남 양산시 당촌길 70(경남 양산시 용당동 1134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1991년 12월 23일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 187호로 지정됐다.
이 신사는 신라 종묘사직과 명산대천에 제소를 선정할 때 우화산으로 소사에 선정됐다. 우화산을 삼한시대 성읍국가로 웅촌면 검단리 일원에서 성장한 우시산국이 신라 탈해왕(57-80)때에 병합돼 우화현이 됐는데 즉 우화현의 주산이 우화산이다. 우화산을 우시산국의 옛 우시산이 되고 우불산은 우화의 춘자이니 같은 산이다.
본 신사의 제사를 신라에서 고려 조선을 거쳐 한 말까지 지방관인 울산 수령이 나라에서 내리는 향과 축문을 받아 매년 춘추(2월, 8월)하정일에 지역의 방호와 국태밀안의 향사를 지내왔으며 가뭄이 극심하면 기우제를 재내는 곳이기도 했다.
1644년(인조52)에 사당과 재사 임야기정 사답 5두락을 하사받아 관리해 왔으며 전하는 말에 의하면 조선태조 헌강대왕의 본성지이기도 하다. 임진왜란때 왜병이 우불산성을 공격하다가 의병들에게 크게 타격을 입고 왜구들의 시체가 산을 이루어 왜시등이란 지명이 생겨났다. 산성을 지키던 300-400명의 의병들이 벌떼처럼 밀려오는 왜구와 싸우는 순간 의병들이 쏘는 화살을 백발백중하여 우불산신이 신풍을 일으켜 기적을 이루는 전공을 거두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아무리 높은 고관대작이라도 신사앞을 지날때는 반드시 예를 갖추고 지나가야지 그렇지 않으면 화를 당했다는 민담이 전해지고 있다.
1910년 일제강점기를 맞아 종전의 국가제의는 중단되고 신사의 재산마저 국유로 이관 됐으며 주인없는 신사는 낡아 허물어져 빈터만 남았다. 웅촌과 웅상의 유림을 중심으로 한 유지들은 천년 세월을 하루같이 지역의 안녕과 국태민안의 염원을 기도해 오던 영산이 방치되는 것을 그대로 볼 수 없어 성금을 모금해 항일 독립운동이 무르익어가던 1918년 옛터에 정면 1칸 측면1칸의 맞배지붕 신사를 착공해 이듬해 1919년 가을에 준공했다. 그 후 1943년, 1957년,
1974년 증축 및 보수를 하고 우불신사보존회가 발족돼 공식명칭을 사용했다. 지금은 웅상지역의 유림이 주축이 된 우불신사 보존회에서 종전의 춘추년 그회의 제사를 2000년부터 연1회 음력8월 하정일을 기해 양산시에 보조금으로 민속형태의 제의행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천성산에 담긴 이야기거리가 너무 많아 차후 이야기하고자 한다.
금번이야기는 필자가 쓴 웅상의 발자취를 참고하고 전설과 기억을 더듬어 적은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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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6년 0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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