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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상의 역사를 말하다(23) 대운산

6.25사변 때에는 공비들 일개 중대 병력 주둔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6년 04월 08일
대운산은 동으로는 기장군 장안읍 울주군 온양읍이, 남으로는 정관면이, 북으로는 웅촌면이, 웅상의 매곡동, 명곡동, 삼호동, 용당동이 접해 있고 최고봉의 높이는 742m이다

대운산이란 지명은 동국여지승람과 오래된 울산읍지에 모두 불광산(拂光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언제부터 대운산으로 불려졌는지 알 수 없다. 지명은 다르지만 모두 광경한 산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산정상에 서면 서쪽으로는 천성산과 정족산이 가까이 보이고 그 너머 영축산, 운문산, 가지산 등을 볼 수 있고 북쪽으로는 울산광역시 문수산, 남쪽으로는 달음산, 금정산이 보이며 동쪽으로는 동해바다가 발밑에 있는 듯 보이며 날씨가 좋은날은 대마도까지 보인다.

대운산은 웅상지역에 동해 바다에서 불어오는 해풍을 막아주는 방풍역할을 하고 있다. 대운산에서 발원된 물은 매곡저수지, 명곡 시명골저수지, 남낙저수지, 소매골저수지, 삼용저수지, 탑골저수지 등 작고 큰 저수지에 담수되어 농업용수와 식수 및 생활용수를 제공해주고 오염되지 않은 하늘이 내린 천연 빛깔을 담은 물은 수려한 주변의 산림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어 절경의 동양화를 보는 듯 하며 저수지에 넘쳐난 물은 천성산에서 발원된 물과 합류하여 회야강을 이루어 웅상중심부를 횡단해 울산시민의 식수원인 회야댐으로 들어가 다시 동해바다로 들어간다.

대운산의 봉우리는 내봉(안봉, 내봉지), 학봉(학바지), 굴봉(굴바지), 세봉이라 말하는 이가 많으나 반야봉(달봉), 대우봉을 보태어 오봉이라 말하는 이도 있다. 불광산이라 불리는 산이름은 부처님과 관련하여 불러진 이름이라 많은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우시산국 도읍을 웅촌면 검단리에 있었다고 비정하는 이들이 많으나 한편으로 온양읍 대운산 성지를 보고 왕도터라고도 한다. 대운산에는 크고 작은 많은 고분군이 있다. 온양읍 외광리와 삼광리에도 많은 고분군이 있고 귀종한 유물이 출토된 예도 있다. 웅상 명동 고분군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곳곳에는 제련터와 도요지가 많이 산재해 있고 매곡투구봉과 용당 배일봉에 성터 흔적이 있다. 대운산 자락에는 고대 때부터 곳곳에 마을을 이루어 부족국가의 행태를 이루며 산업활동도 활발했다는 사실을 조명해 주는 자료들이다.

내봉은 안쪽에 있다하여 안봉 또는 내봉지, 내봉재, 매봉지로 불러왔다. 매봉재로 불리게 된 것은 매가 일본 대마도에서 멸치를 잡아먹고 내봉재까지 날아온 매를 잡아 훈련시켜 사냥용으로 이용했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학봉은 학이 승천하는 형국의 형세를 이룬 산이라 하여 학봉이라 하였다한다. 굴봉은 대운산 봉우리중 가장 높은 봉우리이며 굴이 있는 봉우리라 하여 굴봉이라 하였다하며 범이 살았다하여 범굴이라고도 한다. 이 굴에서 무당들이 굿을 자주하여 굿당이라 하는 이도 있다. 지금도 굿당으로 자주 이용되고 있다. 반야봉은 반달처럼 생긴 봉우리라하여 반달봉이라고도 한다. 철쭉이 군락을 이루어 2001년 5월 20일 온양읍 산악회에서 울주군청과 울주군의회 후원으로 제 1회 철쭉제 행사를 가진 이후 매년 이곳에서 철쭉제 행사를 한다. 매년 철쭉군락이 확장되어가고 있다.

대우봉이라는 한 봉우리가 더 있다. 어떠한 유래에서 불러지게 된 것인지 전해오는 말이 없다. 대운산은 조선 초까지 전체가 국가가 관리했던 봉산으로 추정된다. 봉산은 나라의 관리하에 두어 입산을 제한하며 봉산도감을 두어 관리해온 산이다.

용당 탑골저수지 상류의 대운휴양림도 국유지이고 인근 산지는 용당마을 공동재산으로 관리해오다 1972년 용당마을 전기시설을 들이기 위하여 매각해 그 대금으로 전기시설을 들였고 서창큰 골 일대도 동유림이었고 매곡시명골에도 서창마을 동유림이 많았고 소남마을 동유림도 많았고 명곡마을 일부 주민들의 공동소유재산과 웅상초등학교 소유 및 국유지가 많다.

어떠한 과정으로 국유재산으로 남아있거나 마을 공동소유재산이 되었거나 개인소유 재산이 되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국가재정충당을 위하여 산지에 세금을 부과하고 이 세금을 납부한 사람들에게 소유토록 한 것 같다.

시명골 산중 명곡마을 주민 중 일부주민들만 소유주가 된 것은 산에 부과된 세금을 부담한 사람들만 소유주가 되었을 것이다. 그 산을 처분하여 처분금액이 해당자들이 분배하였지만 정부에서는 마을 공동소유하여 마을 전체주민들이 공동관리하고 땔감도 하고 나물 채취 등 마을 전체주민들의 생활터전을 삼고 생계수단으로 정해놓은 산을 일부 사람들이 차지한 것으로 추정된다. 인근 마을이나 타 지역 마을에도 유사한 경우에 분쟁의 소지가 되어 법적투쟁까지 한 사례가 많다. 어찌보면 가진 자와 기득권자의 횡포인지 모른다.

온양 장안 쪽에도 마을 공동재산으로 관리되고 있거나 국유지로 남아있는 산이 많다. 부처님과 관련한 산의 이름과 같이 골짜기 골짜기 작고 큰 절이 많이 있고 현재는 절이 없지만 마을마다 불당골 절터골이라는 지명을 가진 곳이 많다. 이런 지명을 가진 곳은 옛날 절이 있었던 곳의 지명이다. 많은 절들이 산재해 있지만 큰 절 몇 곳만 소개하면 기장군 장안읍 장안리598번지에는 신라문무왕13년(673년)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는 장안사가 있다. 창건 당시는 쌍계사라고 하였다. 애장왕10년(809년)장안사로 개명하였다 한다. 부산광역시 지정기념물 37호로 지정되어있다. 장안사에 소재한 문화재만 소개해도 본 지면을 다 채워도 부족한 이야기가 많다.

척판암은 장안사와 같은 시기에 창건했다 한다. 장안읍 장안리 587번지에 역시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하며 당나라 종남산 태화사에 천명대중이 장마로 인하여 산사태로 매몰된 것을 원효대사가 천명 대중을 구한다라고 쓴 현판을 던져 천명의 생명을 구했다라는 전설이 전해오는 사찰이다. 그것을 전설따라 절 이름으로 척판암이라 정하였다.

대원암은 온양읍 운화리 1312번지에 신라 후기에 창건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창건주는 고봉선사라고 한다. 대운산 서쪽 웅상에도 절이 많다. 웅상읍 명동산 1번지 시명사는 1900년경 동래 정씨 정덕호 부인 경주 최씨 정호화 보살께서 창건하였다.

정호화 보살은 천석군 댁의 며느리는 부족함없는 집안이었지만 세 딸을 낳고 아들을 낳지 못해 아들 선호사상이 철저했던 시절이라 시가에서는 노골적인 구박을 했다. 귀천이 무엇인지 분별이 안되고 부귀영화도 한점 구름 같음을 깨닫고 명곡 시명골에 시명사를 창건하였다.
칠성각앞에 모신 약사여래불은 정호화보살이 대웅전을 건립하고 있던 중 꿈속에 백발노인이 “내가 바위밑에 누워 있다. 나를 일으켜 다오.”하며 현몽하여 그 이튿날 지금 약사여래불을 모신 자리 밑을 파보니 땅속에 묻혀있었다 한다.

약사여래불은 신라말 고려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시명사는 천년 고찰터였음이 증명된다. 약사불을 모신 앞에 큰 전나무는 박완수 조부님 박시용이 심었다한다. 이 절터에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닭도 없이 닭우는 소리가 한번씩 들렸다고해서 시명산이라고 불렀다한다. 절 건립 초창기까지 신도들의 말에 의하면 닭우는 소리를 들었다하는 이들이 있고 아무도 없는 대웅전 앞에서 저절로 목탁 소리가 들렸다 한다.

약사여래불은 제작 연대로 보아 문화재로 지정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관리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매곡리에 있는 천불사는 1970년경 도봉스님이 바랑하나 짊어지고 지팡이 하나 들고와 감나무 밑에 천막을 치고 기도를 시작해 엄청난 불교성지를 이루었으며 양로원과 납골당을 지어 운영하고 있다.

대운산 굴봉과 학봉 사이 대운산성 위 장군터에는 고령 김씨 선령 산소가 있다. 고령김씨 문중원로들이 경북에 사는 앉은뱅이 지관을 불러 선령 산소를 보이니 이 산소를 보니 후손들이 큰 화를 면하기 어렵다고 예언을 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문중어른들은 화가 나서 앉은뱅이 지관을 산속에 버리고 호랑이에게 물려 죽으라고 하며 하산했다고 한다. 당시 은화리에 살고 있던 학성 이씨가 지관을 업고 웅촌면 석천(돌내)까지 모셔다 주었다고 한다. 고마움을 느낀 지관은 석천에 학성이씨 터전을 잡아주고 자손대대로 벼슬이 끊어지지 않고 학문도 능통하게 이어질 것이라 예언했다한다.

고령 김 씨들의 집성을 이루어 살던 지금의 온양초등학교 자리 마을에 어느 날 쥐가 전부 산으로 올라가므로 스님 한 분이 나타나 큰 홍수가 날 것이라 예언했다. 또 어떤 과객이 지나가면서 “저 버드나무는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 가겠다”고 예언을 했다. 정조21년 1797년(정사년)7월 23일 홍수가 나 대운산 저수지가 붕괴되어 고령김씨 공수파 집성촌에 물이 차자 사람들은 버드나무에 올라가 물난리를 피하려고 했으나 버드나무는 물에 견디지 못하고 뿌리 채로 뽑혀 떠내려가 모두 물 죽음을 당했다.

고령김씨 종손은 서당에 글을 배우러 갔기 때문에 난리를 피할 수 있었다 하는 이도 있고 외가에 다니러 갔기 때문이 난리를 피할 수 있었다고도 한다.

내광 출신 박채복의 말에 의하면 자기 조부님이 말씀하시기를 자기 선대 어른들이 살던 집에 고령김씨 물난리를 당하던 날 호랑이가 산에서 억수로 내리는 비를 피해 내려와 축담에서 방문에 기대어 비를 피해 누워 잤다고 한다. 호랑이 털이 문살사이로 들어와 방안에 들어왔다고 한다. 비가 그치고 날이 밝아 호랑이는 떠났다고 했다. 호랑이는 가축에게도 사람에게도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다.

선대 어른들이 산에 가면 호랑이를 자주 만나도 아무 사람도 호랑이에게 피해를 본 사람은 없었다. 박채복도 1980년 경 대운산에서 호랑이를 보았다고했다. “6.25사변 이후 우리나라에는 호랑이가 멸종되었다는 학계의 발표가 있었는데”하니까 “내가 거짓말을 한다는 말인가”정색하며 같이 본 사람이 있는데 물어보러가자며 닦달을 했다. 중광 사람들 중에도 호랑이를 보았다는 사람이 여러 명 있었다.

울주군과 양산군의 경계지점인 용당고개에는 온양읍 내광까지는 2차선이 1985년경 되어 있었으나 양산군 웅상읍 용당지역에는 1995년경까지 개설되지 않아 박채복은 대운산자락 온양읍 동상 출신인 오세민(당시 경제기획원 예산국장)을 만나 용당고개 도로개설을 요청하였던 바 단번에 도로개설을 책임지고 해줄 터이니 우리아저씨 김태호(오세민댁은 김태호 외가댁)가 국회의원 출마할 것인데 도움줘야 한다는 부탁을 하기에 도움을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김태호 후보자를 적극 도와주었고 도로개설을 부탁한지 6개월 만에 도로가 개설되었다.

후일 오세민은 부산시정무부사장을 역임했다. 오세민은 필자의 작은 어머니 친정조카라 부산시정무 부사장 재임시 사촌형(관수)와 같이 웅상출신으로 부산시청에 근무하는 어떤 사람 때문에 찾아가 신세를 진 일이 있다. 너무 겸손하고 친절하여 인상 깊이 기억에 남아있다.

어떤 자원보다 인적자원이 으뜸 자원이라는 주장을 자주하고 있었지만 지역에 인재를 키워야 한다는 사실이 더욱 절실하게 느껴졌다. 정치적 역량도 인적자원의 확보가 우선되어야 할 일이다.
대운산에는 6.25사변 때에는 공비들 일개중대 병력이 주둔했다고 한다. 북한에서 식량 및 전쟁 물자공급이 쉽지 않아 현지에서 조달해야 함으로 공비들은 산속마을에 사는 주민들에게 피해를 주었다. 웅상에서는 매곡전골마을과 명곡외홈마을 온양에는 내광마을, 상대마을, 주민들을 한사람 남김없이 이웃마을이나 친척집 등에 피신을 시켰고 가축도 같이 피신을 시켰다. 전골마을에는 그 이후에도 사람이 살지 않게 되었고 외홈, 내광, 상대마을에는 주민들이 돌아와 살게 되었다.

내광마을에는 공비들에게 납치되어 대운산 공비아지트에 불러가 같이 생활하다 탈출한 중학생이 두 사람이 있었다. 이분들이 공비들에 납치된 전력으로 피해를 볼까 당사자들도 공비들과 있었던 이야기를 피하고 이웃들도 묻지 않았다 했다. 본의 아니게 밤중에 자다 총칼을 든 공비들에게 불려 나와 납치된 것이다. 이런 사람이나 총칼을 들고 위협하는 공비들에게 쌀 한 바가지, 된장 한 그릇 준 것이 보도연맹대상자가 되어 학살된 양민들이 대운산 자락에 살던 사람들도 많았고 전국적으로도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죄없이 학살된 것만으로도 억울한데 희생된 분들의 가족이나 가까운 인척들은 연좌제란 제도를 만들어 공공기관에 취직도 못하는 피해를 보았다. 면사무소, 지서, 학교, 급사마저도 하지 못했다. 위정자들이 나라를 다스리지 못해 일어난 변을 힘없는 국민에게 책임전가를 하고 무거운짐을 다 뒤집어 씌었다. 국민들은 6.25동란이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지 누굴 위해 전쟁을 하는지 조차 모르고 총알받이가 되어 죽어갔다. 남한에 살면 국군이 되고 이북에 살면 인민군이 되었고 길거리에 가다 인민군에 잡혀가면 인민군이 되고 국군에 잡혀가면 국군이 되었다.

당시 국민의 학력 수준은 80%가 까막눈이라 자기 이름도 쓰지 못하는 국민이 이념은 무엇이며 민주주의는 공산주의는 무엇을 하는지 알 리가 없다. 경각에 달린 생명을 부지하는 것만이 가장 시급한 문제였다. 공비도 경찰도 주민의 보호대상이 아니라 공포대상이었다.

휴전 협정이 이루어지고도 대운산에는 공비들이 남아 이들을 소탕한다고 백골부대가 장기간 주둔하면서 대운산 자락에 사는 주민들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가족 먹을 양식이 없어 초근목피로 연명을 하고 장이 쌀도 빌릴 때가 없는 주민들에게 병사들의 숙식제공을 해야 했다. 당번이 정해진 집은 가족들이 먹는 초근목피를 제공할 수도 없고 얼마나 난간한 일이었을까 필자의 집에도 당번이 되면 우리가족은 죽과 시락밥을 먹으면서 엄마는 병사들에게 밥을 해주었다.

국민의 피를 짜는 처절한 생활을 하는 가운데 호의호식하는 정치가들은 정권탐욕에만 혈안이 되었다. 좌익도 우익도 바닥의 국민은 어느 집단이 정의의 집단이고 어느 집단이 불의의 집단인지 알리도 없고 관심도 없었는데 정치하는 자들이 패거리를 만들어 그 피해를 국민들이 당했다. 위정자들은 남북 대치상황을 정권 유지차원으로 이용했고 지금도 이용하고 있다.
그래도 대운산은 우리 생명을 부지하게 해주었다. 양지바른 산기슭에 움터를 마련하고 비탈이 덜한 곳에는 전답을 일구어 경작했고 산속에 품고 있던 물을 골짜기 골짜기 흘러 보내 식수와 농업용수로 사용할 수 있었고 식량이 떨어져 초근목피꺼리도 이곳에서 구했다.

나물을 뜯어먹기도 하고 열매를 따 먹기도 팔기도 하고 약초를 캐어 약으로 사용하고 팔기도 하고 밥을 해먹고 소죽을 끓이고 온돌방을 데우는 땔감도 구하고 움막 같은 집을 짓는 재료, 울타리 재료도 그곳에서 다 구했다. 태어난 곳도 돌아갈 곳도 오직 그곳 뿐이었다.

필자와 동갑내기 친구인 서창에 사는 이덕환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10살 때(1957년)부터 어머니를 따라 대운산에 가 나무를 해서 날랐다. 일요일이나 방학 때가 되면 날마다 해야 하는 일이 나무를 해서 나르는 것이다. 지게는 열 살짜리 어린 몸에 맞는 지게가 없어 나무를 끈을 매어 끈을 어깨에 메고 나무를 등어리에(짐빠)얹어 날랐다. 얼마나 무겁고 어깨도 아프고 등어리도 아픈 고역이었으면 아무리 추운 겨울날도 땀이 벅벅이 되었다했다. 무겁게 지고 온 둥구리는 도끼로 쪼개어 나누단을 묶어 나무장수에게 팔았다. 그때 웅상에서 나무장수를 크게 한 사람은 서창 김흥진의 아버지 김상준과 덕계 서수원 아버지 서태준이었다.

덕환이 무겁게 3번 정도 해온 나무는 단을 묶으면 2단 정도가 되었다. 그때 장작한단에 20환 50전(화폐교환 되기 이전 화폐단위가 환이었음. 원으로 바꾸어진 것은 1962년경이며 10환은 1원의 비율로 되었다)에 팔았다. 힘센 장정이 무겁게 지고 오면 장작 6~7단이 되었다.

농촌에 사는 모든 주민들은 땔감은 산에서 해온 나무뿐이라 가까운 산에는 나무를 다 베어내 나무가 없어 울주군 온양읍 상대마을 뒤산까지 가서 해오고 기장군 장안읍 장안사 뒤산 까지 해 날랐다. 빈 몸으로 오고가도 만만찮은 거리를 제자리에서 겨우 지고 일어날 정도로 무겁게 한 나무를 하루 한 짐 밖에 해 나를 수가 없었다. 추운 겨울 도시락을 사가면 도시락이 얼음이 되어 얼음 씹듯이 먹었다. 당시 쌀 한 되 가격은 200환정도 하였고 보리쌀 가격은 100환 정도를 했다.

장정이 하루 종일 힘들게 나무를 해와도 쌀 한 되도 채 못되는 금액이다. 당시 농촌일은 하루 일꾼 품삯은 남자 장정은 쌀 1되 성인 여자 품삯은 보리쌀 1되였는데 농촌일이 중노동이 아닌 일은 한 가지도 없었지만 품꾼이 하는 노동은 더 힘겨운 노동이었다. 나무를 해 파는 것보다 농촌 품 들려가는 소득이 나았지만 일거리가 없어 돈벌이라고 나무하는 일뿐이라 나무를 하러갔다. 나무를 많이 해 내어 나무가 없는 터에 대운산과 천성산에는 한 해 겨울 동안 몇 회의 산불이 났다. 산불을 끄는 방법은 대운산 주변에 사는 주민들이 올라가 진화했다.

불이 났다는 사실을 알고 주민들이 불난 곳까지 가는 시간이 몇 시간이나 소요되어 불이 번질 대로 다 번져 진화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불이 더 번지지 못하게 나무와 풀을 제거해 띠를 이루게 하고 소나무 가지 등을 꺾어 불을 두르려 끄는 방법이 전부였다. 바람이 불때는 불가항력이었다.

한 겨울동안 주민들이 불 끄는 작업에 동원되는 일이 빈번했다. 주택도 초가집이 90%이상이고 땔감을 하고 남은 재를 헛간에 퇴비로 사용하기 위해 모아둔 곳에서 다 끄지 않은 불씨가 살아나 화재원인이 되어 주택에 불이 나는 곳도 있었고 산불도 자주나 자주 동원될 수 밖에 없었다.

하늘이 굶어 죽지 말고 연명하라고 그랬던 것인지 불이 난 곳에는 그 이듬해 봄에 산나물이 많이 나 나물을 뜯어다 먹고 삶아 말려 취나물로 만들어 겨울 식량대용을 하기도 했다. 꿀밤(도토리)철이면 도토리묵 끓여 내다 팔았다. 시명골 사너자 앞이 넓고 부드러워 향이 좋고 맛이 있고 어느 곳에 군락을 이루고 있는지 어느 골짝 어느 비탈 어느 등성이에 어느 바위 밑에 어떤 식물이 서식하는지 어느 골자기에 뱀이 많고 개구리가 많고 가재가 많은지 대운산 자락에 산사람들은 눈을 감고도 대운산 전체를 훤하게 알 수 있다.

이번 이야기는 기장군 장안읍지와 울주군 온양읍지와 웅상의 발자취를 참고하고 기명한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필자의 기억을 더듬어 적은 이야기이다.
↑↑ 박극수
(현)양산문화원 이사
양산시 향토문화연구회 감사
웅상의 발자취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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