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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상의 역사를 말하다(21)/해방이후 웅상에서 누가 가장 애향심이 강했을까

박봉수 전 도의원, 웅상의 지도를 바꾸는데 지대한 기여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6년 03월 04일
해방 이후 웅상지역에서 웅상의 지도를 바꾸는데 가장 기여한 인물이 누구인가 묻는다면 단연 박봉수라는 대답이 가장 많을 것 같아 이번 이야기는 박봉수 삶의 일부를 소개할까 한다.

1500년대 초반 경, 선대가 울산에서 웅상 명곡에 정착한 웅상 토박이 중 토박이다. 6대 조부 4형제 중 형제 두 분이 명곡에서 백동으로 이거해 와 살게 되어 박봉수도 이곳에서 1934년 출생하였다. 선대 때부터 100석을 훨씬 능가하는 유복한 선비의 가정이었다.

할아버지 박시현은 뛰어난 학문과 인품을 겸비한 분으로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향리의 젊은이들을 훈도하는 서당훈장으로 일생을 마쳤다.
아버지 박택종 또한 전통적 선비의 겸양을 갖춘 분으로 웅상면의회의원을 역임하고 유림과 문중지역 일에만 솔선수범하였다.

박봉수는 타고난 성품이나 가정 분위기가 학자의 기품으로 성장할 수 밖에 없었다. 웅상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아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했다. 고향 개운중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하다가 5.16군사혁명 세력에 의해 창당된 공화당 창당 멤버로 정치사회 첫발을 내딛게 되어 공화당 양산지구당 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이때부터 1년 365일 단 하루도 집에 있는 날 없이 바삐 쫓아다니는 행보를 시작해 오늘까지 지치지 않고 계속하고 있다.

1960년 초반 경 백동저수지와 명곡 시명골저수지, 주진저수지를 건립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 재원은 미국에서 원조한 잉여농산물 밀가루로써 충당했다. 인건비는 밀가루로 대신했다. 모랫들은 들이 넓고 재해가 심한 지역이었다. 당시 들 가운데 일정 때 건립한 작은 저수지로써는 가뭄을 해갈하기는 역부족이었고 국가 전체 산업도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었다. 우리 웅상 역시 순수한 농촌으로 전체 소득 물량 중 농업소득이 80%였고 농업 소득 중에서도 논 수입 소득이 절대적이었다.

저수지를 건립하고 수혜를 입은 들에서는 수확량이 엄청 증산되니 소득이 많이 증대되었다.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노재필에게 강력하게 요청하여 지원을 받게 된 것이다. 당시 도지사, 시장, 군수, 읍면장이 모두 임명에 의하여 발령받는 때라 국회의원의 힘이 막강했다.

백동저수지 건립공사 책임을 맡아 공사를 했고 사무업무는 김정진이 맡아 담당했다. 주진저수지 책임자는 김동진이었고 사무책임자는 김병하였고 시명골저수지 책임자는 이석순, 사무책임자는 박건중이었다. 중장비에 의존하지 않고 인력에 의존해 저수지 둑을 쌓았다.

끼니를 이어가지 못하던 사람들이 저수지공사에 품을 팔아 밀가루를 받아 이로써 끼니를 때우기도 하고 밀가루를 팔아 보리쌀과 쌀을 사먹기도 해 끼니 걱정을 덜기도 했다.
1972년 10월 17일 유신헌법이 국민투표를 통해 통과되면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통해 대통령간접선거와 국회의원 3분의1을 선출하고 국회가 발의한 헌법개정안 의결확정권 등을 행사하는 기구인 대의원선거를 1972년 12월 15일 실시하였다.

초대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웅상면 출신으로 당선되었다. 1981년 건설부로부터 사업인가를 받아 ADB차관자금으로 1982년 12월 31일 착공하여 1986년 5월 14일 울산시민의 식수원 공급을 위해 건립 준공된 회야댐으로 인해 1986년 7월 20일 건설부 312호에 의거 회야댐 상류지역인 웅촌면 지역과 웅상지역용당 일대가 환경보존지역으로 지정되었다.

당시 웅상지역에는 소주공업지역이 확정돼 한참 공장들이 입주하면서 웅상지역 경제환경이 획기적으로 변하는 초석을 마련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런 분위기에 웅상주민들은 지역발전에 대한 기대감으로 부풀어 있었지만 회야댐 준공과 함께 회야강 발원지 웅상지역 전역을 환경보존지역으로 지정하고 이어 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할 계획이었다. 환경보존지역해제투쟁위원장을 맡아 주민들의 협조와 엄청난 힘을 쏟아 1991년 환경보존 지역해제를 통보받았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환경보존지역으로 지정되었다 해제된 곳은 웅상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웅상이 생긴 이래로 가장 역사적인 일을 해 낸 것이다. 만약 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면 완전 농촌지역으로 그대로 있었을 것이다. 당시 울산시민 인구는 90만이었고 웅상인구는 2만도 되지 않았다.

울산에는 국회의원이 5명이었고 양산에는 국회의원이 김동주 한 명이었다. 울산시민 식수원 확보라는 명제도 그렇고 물적, 인적으로 열세한 입장에서 쾌거를 이룬 것은 역사에 길이 기록되어야 할 만한 일이다. 과정을 다 이야기하자면 장편의 책을 써도 부족한 시련들이었다. 많은 주민들의 협조와 특히 용당마을 주민들과 김동주의원과 박봉수 투쟁위원장의 노고가 대단했다.

명곡외홈과 서창을 접하고 있는 지역에 웅상에서 가장 먼저 토지구획정비조합을 설립해 조합장으로 선출되어 1981년 5월 12일 인가를 받아 1985년 5월 1일 준공을 했다. 도시기반 시설이 조성되지 않은 상태로 무분별하게 도시가 형성되어가고 있는 웅상에 정리정돈된 정비를 위한 견본을 마련해 이후부터 토지구획정리조합이 정비된 도시형성을 이루는데 기여했다.

박봉수는 1991년 6월 20일 실시된 도의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당시 양산군의 행정권역은 기장군을 포함한 지역으로 양산군에서 3명의 도의원을 선출했다. 이때 웅상지역 도의원선거구역은 웅상면, 상북면, 하북면, 동면, 철마면이었다. 후보자로는 당시 여당 민자당 공천을 받은 상북출신 오정일과 야당 민주당 공천을 받은 웅상출신 성홍룡, 무소속 웅상출신 박봉수, 무소속 철마출신 윤승자였다.

당시 웅상지역 선거인 수는 12,000명으로 웅상을 포함한 도의원 선거구 선거인수는 36,000명으로 웅상의 선거인 수는 전체 3분의 1정도였다. 더욱 난감했던 일은 웅상에서 두 사람(박봉수, 성홍룡)이 출마하여 너무나도 불리한 여건이었다. 나이를 보나 지역 기여도를 보아도 성홍룡보다 박봉수가 지역민들에게 호응을 받고 있어 뜻있는 지역주민들은 성홍룡후보에게 출마를 포기하라고 권유해도 1991년 3월 26일 양산군의회의원으로 출마해 17표 차이로 김진만은 당선되고 성홍룡은 낙선한 충격이 오기로 발동되었는지 아무리 만류해도 기어이 등록해 웅상출신 출마자는 고전을 감당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여건 가운데 박봉수는 당당하게 당선되었다. 만약 웅상에서 한 사람이 출마했다면 훨씬 수월한 선거를 치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웅상지역 출신 정치인들은 애향심 강한 지역민의 뜻에 부응하려는 의지는 없고 이기적인 생각으로 자기 영달만 추구하는 모습이 아쉽다. 이런 여건에서 웅상지역 출신을 당선시켜서 웅상지역민들의 정체성을 찾았던 것이다. 임진왜란 때 관군은 다 도망가고 지역의병들이 지역을 지킨 정신이 이어진 것이다.

소주공업지구 36만 3천평이 건설부고시에 의하여 지정되었으나 개발이 되지 않고 장기간 방치된 상태로 있었는데, 선진국에서는 가동될 수 없는 오염이 심한 군소 공장들이 하나 둘 들어왔다. 효성그룹 소유 토지 10만평과 웅상주민 소유 토지 10만평을 합한 20만평을 토지 소유자들의 동의를 받아 공영개발에 의하여 공업지구를 조성했다. 지금 가동되고 있는 공장들이 공영개발 이후에 우후죽순처럼 들어와 국가와 지역경제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토지 지주인 효성그룹과 여타 토지 지주들에게도 공영개발동의를 받을 수 있는 여건 조성과 도 공영개발단에서 공사를 할 수 있도록 한 주역을 박봉수가 감당했다.

기장군이 1973년 동래군에 있다 양산군에 편입되었다. 1986년 기장출장소를 개설하였다. 1994년 12월 31일 독립하여 부산시 기장군이 되었다. 양산시로 편입된 이후부터 지역의 뜻있는 인사들이 양산에 편입된 부당성을 내세워 계속 복군을 요청했다. 당시 큰 힘이 되었던 분은 서생면 위곡에서 출생하여 김영삼 정권의 가장 핵심이었고 내무부 장관이었던 최형우의 힘이 가장 큰 작용을 한 것이다.

웅상도 역사성, 전통성, 생활권을 무시하고 일정치하 때 울산에서 양산으로 통합된 사실을 불편해 하면서 권력을 가진 자의 눈치만 보는 지역 유지인사들은 아무런 불평없는 양 했지만 주민 설문조사를 무작위로 1만명 가량하였던 바 70%이상이 행정구역을 양산에서 벗어나 울산 또는 부산으로 편입되길 희망했다. 당시 웅상 인구는 4만 명이었다.

행정구역개편 추진위원을 구성하고 위원장에 전종태가 선임되어 박봉수 도의원과 같이 되어 추진하기로 하고 행정구역 개편진정서 서명날인을 며칠 만에 3만 명(당시 웅상인구75%)를 받아 국회를 비롯한 관계요로에 진정을 하고 직접 관청에 발송을 하였다.

당시 내무부장관직을 일주일 전에 사퇴하고 대권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최형우댁(서울 구기동)을 박봉수, 전종태, 김진만, 필자와 여러 명이 방문하여 아침식사를 같이 나누면서 웅상의 행정개편에 힘을 보태어 줄 것을 부탁하였던 바 한 달 전에 이 사안을 접수했다면 주민들의 바람으로 될 수도 있었다하며, 기장군 행정개편안은 부산시로 편입되어 기장군으로 복군하기로 국무위원회와 국회상임 위원회에서는 결의되어 국회본회에 상정된 상태라 하였다.

경남도와 양산시에 한 달 전에 접수하였으나 주민의 뜻을 무시하고 도와 군의 입장만 내세우고 있는 상태였고 국회에는 나오연 의원에게 청원하여 줄 것을 제출하였지만 선거구역 변경으로 선거입지만 생각하고 청원은커녕 제출된 서류는 오리무중이 되어버렸다. 경남도와 양산군이 발목 잡은 것을 무시하고 돌격대로 중앙정부와 협의하고 최형우 같은 힘 있는 분에게 부탁하였다면 행정개편이 가능했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절호의 시기를 놓친 것이다. 성과는 없었지만 이 과정에도 엄청난 경비와 열정을 쏟아 부었다. 이때 경비는 사비로 모아 사용하였다.

1995년경 평산, 봉우, 태원아파트 일대에 지하수를 굴착하여 식수 및 생활용수로 이용하였다. 인근에 아파트가 건립되고 신설되는 아파트마다 기존 아파트 지하수보다 더 깊이 굴착하여 한정된 지하수는 고갈되어 5000여세대 아파트에 물난리를 당했다. 고층 건물에 물이 없다고 한 번 상상해 보자. 그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주민들은 전쟁 난민 수용소보다 더 어려운 생활을 해야만 했다. 식수는 길러다 먹는다해도 집집마다 수세식변소에 용변도 보지 못하는 이런 난리가 또 어디 있는가? 도의원 박봉수는 김혁규 도지사와 현지에도 수차 방문하고 중앙정부와 청와대(김영삼 정권시절)까지 방문하여 청와대 영남 담당관이 현지까지 방문하여 확인하여 해결방안을 관계부서에 조속하게 조치하도록 촉구하고 명곡시명골 저수지 물을 일시 아파트까지 인수하여 공급하고 시명골저수지 몽리답인 명곡하와이 목욕탕 일대 뒷들과 웅상초등학교 앞 난수들 일대 농지 15만평을 주거지역으로 지정하였다. 양산군에서는 일대절대농지를 주거지역으로 지정해달라는 요청을 하니 정신병자 취급을 하였다. 군에서 서류도 접수받지 않는 일을 해낸 것이다.

1998년 웅상정수장이 준공가동되어 아파트에 정수장물을 공급하고 시명골저수지 물을 중단하였다. 추진과정에 수고한 분들을 열거하자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대충 열거하면 봉우, 태원 아파트 김종식 운영위원장과 주민, 명곡저수지 몽리민, 당시 현직에 있었던 공무원은 김혁규 도지사, 강길부 건설부차관(울주상북 출신), 김태수 농수산부차관(웅촌출신), 안광기 국무총리비서관(이사관, 주남출신), 농수산부 신현관(서기관, 편들출신), 나오연 국회의원, 김진만 시의원, 이부건 한나라당 경남도당부위원장 등 이외 분들도 많다.

이분들이 이웃사촌처럼 대해 주고 자기마을 일처럼 관심을 기울어 주었기에 단시일에 해결될 수 있었다. 이분들이 이런 자세로 관련 업무에 임할 수 있도록 앞장서서 일한 분이 박봉수 도의원이었다. 주거지역으로 지정된 농지는 토지구획정리조합을 설립하여 토지구획정리사업을 하여 아파트가 즐비하게 건립되고 많은 건물들이 건립 중에 있다.

이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 경비도 엄청 소요되었다. 여러 명이 한두 번도 아니고 여러 차례 서울 등지로 오고 간 비행기 삯과 숙식비만 해도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소요되었다. 경비도 같이 일한 분들이 사비로 다 감당했다. 사심 없이 지역 일을 열정적으로 하는 분들은 대다수 경제적으로 기울 수밖에 없는 것이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공통된 일이다. 그토록 풍족했던 박봉수의 경제처지가 궁핍해졌다. 평생 지역일을 한답시고 가정사는 안중에도 없었으니 가세가 기울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인사 받기 위해 한 일은 아니지만 물질적 도움은커녕 돈 안드는 말로서도 감사의 표시도 하지 않는 게 우리 지역의 인심이다.

어떤 과정으로 인해 부자가 되었는지 생각조차 해본 일 없이 자신이 똑똑해 부자가 된 양 한다. 배고플 때 단갈등겨(보리등겨)떡을 얻어 먹고도 고마운 마음을 오래 간직했던 우리 모습이 그립다.

출장소 인근 부지는 원래 도시계획상 공원지로 지정되었고 명곡 울산박씨 문중 선산 가잇질 일대는 주거지역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명곡 문중은 선산이 주거지역으로 지정되면 지가 상승으로 재산이 증식되는 것은 너무 뻔한 일이지만 약 500년 전부터 모셔온 선산이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아 선산을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던 중 출장소 인근 공원지와 선산 주거지역을 변형 지정해 줄 것을 요청하기로 문중에서 결의하고 문중인 도의원 박봉수와 시의원 박일배에게 추진하라고 부탁하여 양산시와 경상남도와 건설부의 관계자를 만나고 출장소 인근 지주인 장명식과 심완조를 만나 공원지로 지정된 토지를 주거 지역으로 지정되면 출장소부지를 기부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출장소 인근 부지는 도시계획상 주거지역으로 지정되고 명곡 울산 박씨 선산일대는 공원지로 지정되었다.

지역민들과 협력하여 토지 소유자로부터 출장소부지와 체육문화센터부지는 기부받았다. 박씨 문중 선산이 공원지로 지정되어 명동공원 조성시 양산시에서는 문중선산을 매수하고자 문중에 통보를 하였지만 문중에서는 이 고을에 울산 박씨 문중이 정착한 지가 장구한 세월이 흘러 지역에 문중원들은 주인 중 주인이란 자긍심으로 임하고 있는데 시민의 휴식공간을 제공하고자하는데 협조해야지하며 양산시에 기증한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영구무료 임대를 해준 것이다. 양산시에서는 감사히 받아들이고 공원 조성 준공식 때 문중에 양산시장이 시민들의 뜻을 담은 감사패를 수여하였다.

1988년 12월 웅상면 인구 15,000명 일 때 웅상라이온스클럽 창립회원 54명을 확보하여 양산라이온스클럽의 스폰서를 받아 창립총회를 했다. 박봉수는 웅상라이온스클럽 초대회장을 맡아 연임 2대 회장을 맡았다. 창립회원 1인당 가입비는 150만원이었고 당시 웅상의 좋은 논 한 평 값이 만원정도 했다. 농업에 전업으로 종사하는 회원들이 60%이상이었고 매월 회비는 3만원이었다. 지금 웅상땅값은 100배 이상 상승했다. 지금 땅값 150평 값을 가입비로 회를 창립하고자 한다면 과연 가능할지 자문자답해보니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매월례회 때마다 라이온스 운영에 관한 논의시간은 일부였고 지역발전에 관한 논의시간이 주제가 되었다. 지역정치인이나 기관 단체장을 초청하여 지역현안에 대한 설명과 지역발전을 위한 대화도 자주 나누었다.

웅상노인대학 학장을 맡아 존경받는 노인 건전하고 건강하게 즐겁게 생활할 수 있는 지혜로운 노인이 될 수 있는 길을 찾고자 노력하는 노인이 되고자 서로 당부하며 실천하는 도장을 마련하여 부단한 노력을 했다.

해방 직전 지역을 걱정하는 어른들이 모여 서로 화합하고 지역발전을 위해 기여하고 우정을 나누었던 산수계원 후손들 20여명을 모아 피소골 바위에 새겨진 어른들의 존함을 복원하고 후산수계라는 모임을 하기로 하고 박봉수가 계장을 맡아 어른들의 유지를 받들어 애향심을 가지자는 다짐을 계로 이어가고자 했다.

박씨 문중을 아우르는 웅상박씨 종친회를 조직하여 종친회장을 맡아 종친화목과 숭조사상을 고취하고자 노력했고 문중원들과 협력하여 박극수가 30대 전국 최연소 농협조합장에 당선되어 연속 3선을 하도록 하는 역할에도 중심이 되었고 박일배를 시의원에 당선시켜 시의회의장이 되도록 하는 역할에도 주역을 감당했고 박인을 시의원, 도의원에 당선시키는 일에도 모든 열정을 쏟았다.

오랜 세월동안 정치에 관여하면서 회색빛깔로 선거에 임한 순간은 한순간도 없고 항상 선명한 원색일변도로 나아가는 소신이 분명한 분이다. 국회의원 선거나 대통령선거나 지역의원선거나 작고 큰 어떤 선거에도 자기가 지지하는 후보는 엉거주춤하지 않고 모든 열정을 다해 도우는 분이다. 어떤 때는 열정이 지나쳐 전화를 많이 해 선거사범으로 몰려 곤욕을 치른 일도 있다. 양산신문 자문위원장을 맡아 어려운 지역신문의 고충을 나누고 자문위원들을 모아 신문사에 격려와 충고를 하고 신문이 바른 길로 나아가도록 지도에 열중했다.

갑술생 동갑계(1934년생) 회장도 30여 년간 맡아 친구간 우애를 돈독히 하고자 했다. 세월이 지나 세상을 떠난 사람도 있고 기력이 부족하여 나들이도 자유롭게 못한 이도 있어 80세가 되는 해 2013년에 애석하게도 해산을 했다.

지역 후배들의 결혼 시 주례를 600여 쌍 이상 집례를 했으며 주례를 맡았던 부부들이 살아가는 후견인 노릇도 단단히 했다. 지금은 취직을 했을 때 재정보증을 신용보증회사에 의뢰하면 되지만 1990년까지만 해도 취업시험에 합격해 취업하려고 하면 필히 재정보증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좋은 직장일수록 재정보증자격도 까다로워 좋은 직장의 재정보증자격을 갖춘 사람은 웅상에서 몇 사람에 불과할 때 박봉수는 이에 해당되어 가까운 이웃이나 인척들이나 결혼 주례를 해준 사람들이 재정보증을 요구하면 불청하는 예 없이 인감증명을 발급받아 재산세 납세실적증명을 첨부하여 재정보증서에 서명날인을 해주었다. 해당 직원이 업체에 손해를 끼치면 그 보상을 재정보증인이 변제하는 제도임에도 마구 해주었다.

어느 누구에게 재정보증을 해준 것조차 모를 정도로 많이 해주었다. 필자가 웅상농협조합장에 당선되었을 때도 당신이 당선된 것처럼 기뻐하시며 재정보증이야기를 하자 말이 끝나기 전에 “내가 안 해주면 누가 해주겠노?”하시며 기분 좋게 해주셨다.

보증만이 아니고 은혜를 입은 일들을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자주 찾아 뵈어야하는데 자주 찾아뵙지 못해 항상 송구스럽고 죄송할 따름이다. 필자의 형제 팔남매 중 구식결혼식을 한 네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주례를 맡아 주셨다.

한때 국회의원에 뜻을 가지고 여권공천 신청을 한 예도 있는 여권 정치적 성향을 가진 정치인이다. 한편으로는 여권 내 야당적 기질을 발휘하여 화합과 소통의 대가이기도 하다. 필자는 사실여부를 알 수 없지만 여당 공천을 받기 위하여 엄청난 금액을 바쳐야 한다는 게 전 국민의 대화 중에 자연스럽게 오간 시기고 공천도 어렵지만 공천이 된다 해도 여당은 당원관리만 해도 자금이 있는 게 한도라는 이야기를 정치경험이 있는 여러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다.

자질 면에서나 국가를 위한 애국심이나 지역에 대한 애향심은 비할 바가 없을 정도로 앞서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선거로 인해 더 어려운 처지에 처해 본인이나 그 가족들이 노후에 어려운 생활을 하게 될까 걱정되어 진정으로 애정을 가진 사람들은 만류하기도 했다. 필자 역시 대의원 출마와 도의원 출마 시 미력한 힘이나마 힘껏 도왔지만 국회의원 출마는 만류했다. 만류가 먹혀들지 않아 다른 후보 진영의 핵심 멤버로 뛰어들어 포기하길 권유했다.

그래서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국회의원 출마를 포기했다. 그토록 중안 정치권에 나아가 지역과 국가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간절한 소망에 박수를 보내지 않고 방해꾼이 된 것은 당시에는 욕을 먹더라도 그분을 위한 일이라는 확신으로 선택한 길이었지만 지나고 보니 그토록 하고 싶은 일 도전이라도 하도록 도와드리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된다.

취미생활로는 바둑을 즐겨 둔다. 바둑실력은 아마 초단 정도이며 독서를 즐겨 많은 책을 탐독한다. 어느 때 가도 보던 책이 탁자위에 열려있고 갈피가 접혀 있다. 사상계(폐간이 되기 이전까지)월간조선과 몇가지 신문을 평생 받아 보고 있다. 술도 좋아하지만 술 마시는 것보다 술자리에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풍류꾼이다.

이야기 꺼리가 너무 많지만 지면이 넘쳐 더 쓰지 못함이 아쉽다. 이 이야기는 기록을 참고한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 질문한 일도 없다. 본인(박봉수)에게 질문할까하다 객관성이 훼손될 것 같아 한 마디 물은 바 없다. 필자 혼자의 기억을 더듬어 사실대로 가감없이 쓴 이야기다.

↑↑ 박극수
(현)양산문화원 이사
양산시 향토문화연구회 감사
웅상의 발자취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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