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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상의 역사를 말하다(20)/말이 '씨' 되는 이웃들의 모습

뼈 속에서 녹아나는 절실한 말을 기도처럼…힘든 삶의 여정을 지혜롭게 헤쳐나가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6년 02월 25일
언어생활이 본인의 미래 모습을 만들고 그 가족과 자손들의 모습이 말과 일치하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래서 말이 씨 된다는 말이 나왔다.

일상 속에 아무런 의미 없이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들이 반복되다보면 인격속에 녹아 고착해 버린다. 언어 역시도 같은 맥락으로 형성되어 간다. 타고난 성품도 있지만 후천적으로 가꾸어져가는 것이 더 많다. 어린 아이들의 언어 가운데 거친 낱말을 잘 사용하는 경우는 집안

어른들이 자주 사용하는 비속한 언어로 인하여 몸에 베이게 된다. 우리 이웃분들이 자주 사용한 언어와 본인이나 가족들의 삶이 일치한 사람들을 몇 분 소개한다. 이번에는 필자가 몇 달 전 웅상노인대학교에서 ‘말이 씨가 된다’는 제목으로 강의한 내용 일부를 이야기 하고자 한다.

우리 이웃에는 홈실댁 할머니가 계셨다. 이 할머니는 1981년 96세의 연세로 세상을 떠나신 분이다. 할머니는 팔순중반 때부터 염불하는 것처럼 자주 되뇌이는 말씀이 “자는 잠결에 가야할텐데”를 자주 되뇌이셨는데 100수 가까운 노인이 돌아가시는 날, 낮까지 장정이 해도 버거울 정도의 일을 하시고 그날밤 잠자리에 들어 돌아가셨다.

평소 낮잠을 주무시는것도 본 일이 없고 너무 부지런하시고 할머니 댁 헛간에는 민간요법으로 치료할 수 있는 각가지 약재재료를 준비하여 달아 한약상을 방불케 할 정도의 많은 약을 준비해놓아 두었다.

이웃 사람들과 특히 어린 아이들이 아플 때 해당되는 약재를 사용할 수 있도록 조재하여 직접 가져다 주시는 분이었다. 무엇 때문에 ‘자는 잠결에 가야지’하는 주문을 계속 읊느냐 하면 천번 만번 수백 만 번 되뇌어야 하늘에 전달된다 하시고 병고에 오래 시달리게 되면 “내가 아픈 것도 예삿일이 아니지만 자식들에게 고생시키면 어쩌나 싶어 염불하는 것처럼 한다”고 하셨다.

홈실댁 한집 건너 사는 남동댁은 홈실댁의 종질부되시는 분이다. 남동댁은 가까이 몇 집 사는 대소간에서도 이웃중에서도 가장 풍족하여 머슴을 거느리고 백석지기를 능가하는 자경농이었다. 남동댁은 성질이 표독하여 예삿말도 가시 돋힌 말을 잘했다. 일상 가운데 대소가 조카들이나 이웃 어린아이들이 장난질을 심하게 하거나 떠들거나 하면 “요 빌어처먹을 것들, 벼락 맞을 것들” 하는 말을 자주 사용하셨다. 1960년경 장수도 못하시고 60을 갓 넘겨 세상을 하직하셨다.

손주가 운수업을 했는데 처가에서 사업을 도와주다 뜻대로 되지않아 경제적으로 기울기 시작해 장손자가 무슨일을 했는지도 모르는, 뚜렷한 사업을 한 일도 없이 어른들이 뼈가 으스러지도록 열심히 해 모은 재산을 다 날려버리고 보증을 선 이웃 여러 사람들도 보증채무를 변제하도록 만들어 피해를 주고 문중의 재산까지 손해를 입혔다.

홈실댁 뒷집에 사는 매일댁은 매곡 달성 서씨댁에서(친정조카 서학준, 서문준)명곡 경주 이씨댁으로 시집와 1남 4녀의 자식을 낳아 딸들은 다 시집을 보내고 남편도 세상을 떠나고 늦게 본 아들을 결혼시켰으나 아들은 지적장애자라 일반인들처럼 원만한 생활을 못해 며느리는 가버리고 할머니와 아들 두 분이 생활하는 처지가 되었다. 아들은 당신이(매일댁)계시지 않으면 끼니도 못챙겨 먹을 것 같은 불안 때문에 양손자 손부를 들여왔다.

양손자 손부는 할머니와 아들에게 효성을 다해도 매일댁 할머니는 자기 아들을 양손자 손부에게 시중을 들게 하는 것이 미안하고 아들이 몸이라도 불편해 용변 시중이라도 드는 처지가 되면 아들 마음이 얼마나 불편할까 우려되어 “저 놈 자식 죽고 내가 죽어야 할 텐데”를 얼마나 자주하셨는지 모른다. 세상에 어떤 기도가 애절한 기도라해도 자식 먼저 죽으라고 하는 기도만큼 애절한 기도는 없을 것이고 매일댁 할머니의 가장 큰 소망은 아들 먼저 죽고 본인이 따라 죽는것이었다.

뼈 속에서 녹아나는 절실한 말을 기도처럼 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부모들의 가장 아픈 상처는 자식이 상처 입는 것이고 그것보다 더 큰 상처는 부모보다 자식 먼저 보내는 일이다. 매일댁 할머니라고 일반적인 부모와 가지는 마음이 다를 바가 없을 것인데 자신을 갈기갈기 찢는 자해의 기도를 하며 살아가셨다.

세상 곳곳에는 이 순간에도 이런 기도를 하며 살아가는 부모들이 많을 것이다. 세상의 이런 슬픔을 생각하면 즐거운 순간 맘껏 웃으며 살아가는 것조차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할머니의 애절한 기도가 하늘에 닿았는지 할머니 아들은 칠순을 넘긴 1968년경 돌아가시고 아들가신 일 년 후 1969년경 아흔 중반에 들어 매일댁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밀양시 청도면 밀양박씨 선대 어른들의 집성촌이었고 선대 어른 중 고관 대작으로 계신 어른들이 많은 후예임에도 어떤 연고인지 생활이 어려워 기장군 정관면 병산에 살다 가야국의 시조 수로왕의 66세 후손으로 범어사 논 여섯 마지기를 소작하여 생업을 잇기 위하여 웅상 주진에 정착한 남편과 연을 맺어 4남 2녀를 낳아 큰 아들을 어릴 때 세상을 떠나보내고 3남 2녀를 길러 성혼시켜 각자 가정을 이루고 손자 손녀들도 각자 가정을 이루어 살아가고 있다. 할머니 남편은 1955년경 주진에서 돌아가시고 할머니와 가족들은 1960년경 명곡으로 이거해와 살다 1984년경 팔순중반의 연세로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생존 시 건강이 좋고 활기 넘치는 자세로 생활에 임하셨다. 마을에서 가장 일찍 일어나시고 걸음걸이도 어느 한 순간도 힘없는 걸음으로 걷는 순간을 보지 못했다. 재담꾼으로 옛날이야기부터 세상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이야기하는데 어찌 그토록 이야기꺼리가 많으며 재미나게 이야기를 하시는지 몇 날을 밤새도록 해도 이야기 꺼리가 있는 분 같았다. 남의 험담을 이야기 한 적도 없이 칭찬일변도의 이야기꺼리를 엮어갔다.

논밭일을 장정 못지않게 하시고 시간 날 때마다 특히 밤 시간을 이용해 멍석(덕시기) 멧 방시기(둥근멍석)을 많이 매어 이웃 분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고 수고비로 멍석 값을 주면 이 돈을 다른 곳에 사용하는 일 없이 오로지 부처님에게 바쳤다. 불심이 돈독해 아침에 일어나는 즉시 마당에 나가 미타암을 향해 기도의 의식을 가졌다. 이런 의식은 하루도 빠진 날 없이 꼭 행했다. 미타암에 자주 찾아가 부처님에게 마음속으로 ‘다음 언제쯤 부처님께 올 때는 시주는 얼마의 금액을 바치겠습니다’ 약속하고 꼭 그 약속을 지켰다한다. 약속한 금액을 다 준비하지 못하면 부족한 금액은 자손들에게 협조를 구해 약속을 지켜오신 분이다.

옛날 어른들은 아들 선호사상이 강했는데 할머니는 손자손녀들을 차별없이 사랑했다.
할머니는 사랑하는 손자, 손녀가 부처님의 가피(은혜) 입기를 바라는 소망에서 그랬던 것이다. 다른 손자손녀들도 할머니 협조를 불청한 예 없이 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협조했다.
병산 할머니는 손자손녀들을 부를 때 손녀는 “우리 선비님”, 손자들은 “우리 대감님”이라고 불렀다.

손자 영규는 울산 학성고등학교에서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하고 서울상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 포항제철(포스코)에 입사해 회사 경비로 미국유학을 다녀와 회사 중견직원으로 근무하며 한국경제 발전에 이바지 할 유망주로 부상하고 있다. 영규가 대학재학 시 필자가 관계한 장학회에서 지급한 장학금으로 약간의 도움 준 일도 있어 이때 성적증명을 제출받아 학업성적을 정확하게 안다고도 했다.

다른 손자손녀들도 각자 맡은바 책무를 열심히 하며 주변에 칭찬이 자자하다 했다. 이 모두가 병산 할머니 평소 말씀과 기도의 덕분이라 했다. 할머니 자손들의 향후 모습도 할머니가 뿌린 말의 씨앗이 싹이 나고 튼튼하게 성장하여 국가 발전에 크게 이바지할 것을 확신한다고 했다.

홈실댁 손자 친구이며 이웃에 사는 1945년에 출생한 정탁이라는 건실한 청년이 있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남의 집 머슴살이도 하고 명곡농협에서 경영하는 도정공장에 기술자로 일하다 명곡농협 도정공장이 다른곳으로 이전하게 되어 폐쇄된 도정공장을 인수하여 떡방앗간으로 시설을 개조해 운영했다 .1980년경 정부에서는 마을마다 있는 소규모 손두부 가공공장을 폐쇄시키고 통합하여 시설도 현대화 하고 위생적인 식품가공을 한다는 명분으로 시한을 정하여 시한까지 통합을 하지 못하면 기존 공장들은 가동중단 할 것을 통보하였다.

부산시 경계에서 울산시 경계지점 7번국도 주변 인접지역의 소규모 두부공장은 30~40개가 되었고 이를 정부에서는 2~3개 공장으로 통합운영 하도록 계획하고 추진하였다. 7번 국도변 소규모 두부공장 업주들을 모아 모두 두부공장 경영을 포기하고 정탁이 혼자서 1개 공장을 경영하기로 합의하고 포기하는 업주들에게 경영권 인수금으로 당시 웅상 최고 좋은 논 만평값을 지불하고 경영권을 인수받아 두부공장 시설을 하여 가동했다.

아울러 도토리묵 가공공장과 콩나물 재배공장도 경영했다. 공장 설립과 경영자금은 부채로 감당하고 4년만에 부채 상환을 완료했다. 공장시설을 새롭게 단장하고 규모도 확장하다가 공사과정에 감전사로 세상을 떠났다. 차림새도 초라하고 일밖에 몰라 “차림도 깨끗하게 하고 일도 좀 대충해라”하면 “두고 보아라 나는 40만 되면 넥타이 매고 다니고 일도 안할끼다!”라는 말을 자주해 “무슨말 하노? 40이면 기업인으로 틀이 잡혀 그때부터 일 시작해야 할 텐데”하며 나무랐지만 정탁이 일 안한다는 말은 육체노동은 안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그런 말을 자주했던 것으로 안다. 딱 나이 40이 되어 육체노동도 정신노동도 영원히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홈실댁 할머니 바로 이웃에 사는 할머니 집안 손자인 박인수는 어린시절 너무 가난해 영양이 부족하여 제때 크지 못해 체중과 신장 미달로 군에도 가지 못했다. 20중반에 결혼을 해 키가 5~6cm정도 더 성장했다. 이토록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해 얼마나 악착스럽게 살았는지 경제적으로 유복한 가정이 되었다. 평소 늘 하는 말이 “나는 부자될끼다. 가난한 서러움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데 내 자식들에게는 이런 서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하고 70살만 되면 죽을 것이다” 라는 말을 자주했다. 부자될끼다 하는 말은 좋은 말이라 많이 하고 70에 죽는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핀잔을 자주했다. 부자도 되고 멀쩡하던 분이 2005년 71세에 갑자기 돌아가셨다.

한 마을에 사는 박수명도 홈실 할머니 집안 손자다. 박수명의 아버지 박효용(일명 팔천)은 1931년에 출생하여 38세 되는해 1968년에 단명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때 수명의 나이는 열세살, 여동생 무순이는 열 살, 필순이는 일곱 살이 였다. 수명의 아버지는 지병으로 오래 고생하시다 돌아가셨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수명이는 건강에 대한 조심성이 있어야 할 텐데 술을 과음하는 일이 많아 만날 때마다 과음하지 말고 건강조심해라 어린시절 아버지 여의고 성장한다고 얼마나 고생했나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야지하면 “형님요, 먹고 죽은 귀신은 화색이 난다고 했심더.

우리 아버지는 사십도 못넘기고 가셨는데 나는 사십을 넘겨 살았심더. 어지간히 안 살았는교. 나도 아버지 닮아 오래 못 살긴데 나는 50만 넘기면 오래 사는 기라요”하면 “내일 당장 죽는한이 있어도 그런 말 하는게 아니다. 죽고 사는 일은 하늘에 맡기고 백년을 살 것 같은 자세로 사는게 사람의 도리다”라고 했지만 만날 때마다 50만 살다 죽는다는 말을 부지기수로 들었다.

죽기 전 몇 년 사이에 얼굴에 병색이 완연했고 수명이 자신도 중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평소와 같이 계속 폭주를 하며 50살 운운을 자주했다. 2007년 오십한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슬하에는 딸 윤진이와 윤선이, 아들 주욱이를 두고 갔다. 만날 때마다 내가 뿌린 씨앗은 거두고 가야지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당부했는데 오래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살았다면 자식들 혼사는 보고 떠날 수 있었을 것인데 하는 아쉬움이 가져진다.

수명이와 죽마고우인 이동석은 수명이와 한 마을에서 같은 해에 태어나 낙천적이고 농담을 잘해 주변 웃음을 많이 주는 장기가 있었다. 아버지는 경상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웅상농청장원놀이 소리 부분 기능보유자로 선정된 이유락의 장남이다.

동석이 아버지는 처절하게 가난한 집에서 자라 현모양처인 동석이 엄마를 만나 알뜰하게 살아가며 단란하게 가정을 꾸릴 수 있도록 하셨다. 동석이도 아버지를 닮아 마을일이나 집안일이나 앞장서 봉사를 잘하고 가정도 날로 알차게 꾸려가고 있었다. 헤픈 농담도 진실처럼 진지하게 이야기해 놀라게 하고 웃기는걸 좋아했다. 평소 농담 중 “나는 50살만 살끼다. 옛날 어른들은 50이면 노인대접을 받고 담뱃대 길이도 제법 길게 뻗었다. 기골 있을 때 저승가야 영원히 젊은 몸으로 살수 있다”는 말을 자주 했다.

가까운 인척들의 사후 장례를 위한 공동 납골당을 건립하면서 “내가 이 납골당에 제일 먼저 들어가야지”하는 농담을 하며 납골당 건립에 참여했다. 고물상 경영을 하며 사업을 착실하게 이끌어 가던차 주진에 사는 동석의 친구 김수희가 철골로 건립된 축사를 철거하고 다른 용도로 사용하기 위하여 철골을 철거해 주고 철골은 가져가라해 철거 작업을 하다 낙상해 절명하고 말았다. 이때 나이가 50이 되었다. 먼저 들어가야지 했던 납골당에도 제일 먼저 들어갔다.

↑↑ (현)양산문화원 이사
양산시 향토문화연구회 감사
웅상의 발자취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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