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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상의 역사를 말하다(19)/웅상의 주택의 변화

1950년경까지 새로 짓는 집은 방바닥에 멍석(덕시기)을 깔고 문은 거적으로 가려…

박극수
(현)양산문화원 이사
양산시 향토문화연구회 감사
웅상의 발자취 편집위원장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6년 02월 18일
↑↑ 새마을 초장기 농촌지붕개량 사업추진으로 가격이 저렴한 시멘트기와로 지붕을 교체하는 모습
ⓒ 웅상뉴스
눈비만 피하면 족하다는 옛날 주택은 대개가 목조로서 초가와 기와이며, 양지바른 남쪽을 향한 산기슭에 주거가 형성된 곳이 많았다. 집의 구조는 삼(세) 칸 내지 사(네) 칸으로 큰 채 아래채가 대부분이었다.

삼 칸 집은 부엌 한 칸과 방 두 칸이며 사 칸 집은 부엌 한 칸과 방 셋 칸으로 구성된 집과 부엌 한 칸과 방 두 칸 청마루 방 한 칸으로 구성된 집도 있었다.
아래채 형태는 방 한 칸, 마굿간 한 칸, 창고 한 칸인 세 칸 집이 대부분이었다.
집의 크기는 세 칸 집은 330㎡~400㎡(10평~12평)정도이며 네 칸 집은 400㎡~500㎡(12평~15평) 방 한 칸의 크기는 7㎡~10㎡(2평~3평)부엌은 13㎡~16㎡(4평~5평)정도였다.

부엌이 방보다 큰 것은 땔감을 이용하다 보니 나무를 들여 놓을 곳이 차지하는 면적이 많아 클 수밖에 없었다. 부엌에는 방을 향하는 아궁이에다 불을 떼어 온돌방을 데우고 아궁이에서 음식을 익히고 기명물을 데우기 위한 솥이 보통 두 개가 걸려있었다.

물을 길러다 사용하였기에 필수적으로 큰 물더무(물을 받아두는 큰 옹기그릇) 놓는 곳이 있고 식기와 숟가락과 젓가락과 음식제조 용구들을 올려놓는 살강(선반)이 있다.

살강(선반)은 일반적으로 솥이 걸려있는 반대 방향에 여자들이 서서 물건을 올려놓고 내려놓을 수 있는 높이로 되어 있으며 살강 밑에는 음식제조에 필요한 식초, 젓갈, 간장, 된장, 소금 들을 담은 용구와 식재료들을 보관하는 장소가 있다.

나무로 음식을 익히다 보니 연기가 많이 나고 부피가 많은 나무를 들여놓기 위하여 부엌 앞과 뒤에는 큰 문이 있고 연기가 잘 빠지도록 환기구를 몇 군데 내어 두었다.

부엌문 형태는 여닫이 형태로 나무판자로 제작하고 빗장을 걸어 열고 닫곤 했다. 부엌문은 비바람을 막고 가축(송아지, 닭, 개)들이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수단이었다.

큰 채는 주로 가족들이 생활했고 청마루방이 있는 집은 여름을 지내기 위한 공간이며 제사나 집안에 행사가 있을 시 사용되는 공간이다. 아래채는 머슴들이나 할아버지와 손자들이 거처하고 소를 키우는 마구간과 곡식과 연장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고 별도 헛간이란 가건물 형태의 집에 퇴비를 모우는 장소가 있고 변소 칸(화장실)도 있다. 현대식 건물에는 방과 변소가 붙어있지만 옛날집의 변소는 수세식 변소도 없고 용변을 모아 전적으로 퇴비를 이용하기 때문에 변소에 저장한 용변이 냄새가 많이 나 변소 칸은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사용하는 공간과 멀어야 좋다고 했다.

방과 멀리 떨어진 곳에 변소가 위치해 무서움을 많이 타는 어린애들이 밤에 용변을 보러갈 때 어른들이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

벽은 대나무를 엮어 그 위에 흙을 발라 흙벽으로 되어있고 그 위에 도배지를 발랐다. 방의 앞문은 두 개의 여닫이 문이고 뒷문은 한 개의 쪽문으로 되어 있다. 문은 문살을 짜고 그 위에 창호지를 발라 바람을 막았다.

어린애들이 많은 집에는 장난질로 인해 문종이가 떨어져 일 년에 몇 번이나 새로 발라야 했다. 필자의 이웃댁인 매일 할머니댁에는 아이들은 없고 연로하신 할머니와 늙은 아들, 두 분이 사는 집이라 문종이가 떨어져 바르는 것이 아니라 색깔이 바래 5~6년 만에 새로 바르기도 한다.

필자의 집은 초가삼간에 팔남매가 부모님 슬하 에 자랐다. 잠자리가 협소하다보니 할머니는 한 집 건너 작은 아버지댁에 잠자리를 정하고 날이 밝으면 양가집을 오가며 일거리를 도우시고 주무실 때는 작은댁에서 사촌동생들과 주무셨다.
문종이를 바를 때마다 엄마가 어지간히 애들이 별나야 문이 견뎌 낼 수가 있나하며 궁시렁거리면(잔소리) 할머니는 "문종이가 자주 떨어지고 자주 부러지는 집이 잘 되는 집이다. 매일댁봐라. 무엇이 좋노?”라고 하셨다. 벽지도 온갖 낙서로 환칠을 하고 찢고 성할 리가 만무했다.

그것도 부족해 누나 씹던 껌을 벽에 붙여두면 몰래 필자가 씹다가 다시 붙여두고 동생이 몰래 떼어 씹다 붙여두기도 했다.
방바닥은 온돌방으로 부엌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큰방, 작은방까지 온기가 전해지고 유지되었다. 구들막에는 뜨거워도 작은방에는 별로 따뜻하지 않았다. 같은 방이라도 위치에 따라 온도차이가 많았다. 따뜻한 큰방에는 집안 어른이 거처하고 같은 방에서도 어린아이나 연세 많은 노약자는 따뜻한 곳에 잠자리를 하고 찬 곳에는 젊고 건강한 가족이 잠자리를 했다.
한방에 이불은 하나로 보통 다섯, 여섯 명이 많게는 그 좁은 방에서 열 명이 자기도 했다. 손님이라도 오는 날은 이보다 더 많이 잤다. 방바닥에서도 빈부의 차이와 신분의 차이가 현저히 났다. 사정이 좋은 가정은 방바닥에 종이를 바르고 기름칠을 한 장판지 위에서 생활했지만 형편이 어려운 가정은 거적(짚으로 만든 바람막이)을 펴고 생활했다.

1950년경까지 형편이 좋은 집이라 해도 주인이 자는 방에는 장판을 깔고 머슴들이 거처하는 방에는 거적을 깔고 이불까지도 거적을 덮고 잔 집도 있다. 필자가 태어날 때 살던 집은 비워주어야 할 사정이 있었고 새로 짓는 집을 짓는 중간에 태어나 방바닥에는 멍석(덕시기)을 깔고 문은 거적을 가려 태어났다고 했다.

1960년경까지 방바닥이 대나무 삿자리(돗자리보다 올이 욹은 것)를 깔고 생활한 집도 있었고 갈대삿자리에 생활한 이도 있었다. 대나무 삿자리에 어린아이들이 똥을 누게 되면 삿자리 사이로 똥이 끼어 치우기가 여간 난감한 일이 아니었다. 1970년경부터 비닐장판을 일반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보온밥통이 나오기 전 구들막에는 놋밥 그릇에 밥이 따뜻할 때 담아 뚜껑을 덮고 담요 같은 이불로 겹겹이 싸 그 위에 또 이불을 덮어 가족들에게 따뜻한 밥을 먹이겠다는 할머니와 엄마의 정성과 애정이 항시 자리를 하고 있었다. 좁기도 하지만 작은 기침소리도 온 집안에 다 들리는 공간에서 피부를 접하며 아웅다웅하며 자란 세대들과 각자의 방에서 문만 닫으면 다른 방에서 굿을 해도 들리지 않는 밀폐된 공간에서 성장한 세대들 간에 가치관의 차이가 많다. 성장배경이 가치정립에 중요한 동기가 된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낀다.

-지붕의 변화와 뤼브케 대통령 방문

1970년대까지 웅상지역에는 기와집은 마을마다 몇 채뿐이고 초가집이 많았다. 그때 기와집은 부의 상징이고 초가집도 집의 크기에 따라 생활정도를 가늠할 수 있었다.
새마을 초장기 농촌지붕개량 사업추진으로 모든 초가집은 기와집이나 슬레이트 지붕으로 개량하도록 권유하는 것을 넘어 거의 강압적으로 실시하도록 했다. 당시 정부는 지붕 개량 자금을 집집마다 장기저리 정책자금으로 지원해 분할 상환토록 했다. 사업추진 목적은 외형적 아름다움보다 지붕을 잇는데 들어가는 볏짚을 퇴비나 가축사료로 사용하고자 함에 있었다.

초가삼간집 지붕을 잇기 위해 사용되는 짚은 다섯 마지기 이상이었고 인력도 20명 이상 필요하기 때문이다. 웅상 중간 부분을 통과하는 7호선은 당시 국도1호선이었다. 당시 정부는 국도변 지붕개량을 최우선으로 했고 같은 시기에 박정희 대통령이 부산, 울산 순시계획에 국도1호 경유일정을 잡은 탓에 모든 공무원들은 업무를 전폐하고 국도변 지붕개량에만 전념해 단시일내에 지붕개량이 이루어졌다.

이어 서독 뤼브케 대통령이 한국방문 일정 중 지금 웅상출장소 부지로 확보된 주진금성사료 소유농장일대(당시는 문동길 낙농목장)를 박정희 대통령과 동행하는 일정 때문에 주변 마을 지붕에 페인트 도색을 한다고 법석을 떨며 지붕개량과 지붕도색도 많이 했다. 이때 뤼브케 대통령 방문계기로 서독으로 부터 본격적인 경제원조의 계기가 되고 서독에 광부와 간호사들이 품을 팔러갔다.
당시 주택 지붕개량 사업은 지금도 그런 현상이 많지만 행정에서 마련한 방향이 국민생활위주가 아닌 통치자로부터 질책을 면하고 칭찬받은 것이 우선이었음을 나타내는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새마을 사업운동이후 이전까지 사용했던 토기와는 수명도 오래가고 외형으로 보기에도 좋았지만 정부시책에 따라 가격이 저렴한 시멘트기와로 지붕을 70%가량 교체하고 슬레이트는 20%, 토기와는 10%가량 되었다. 당시 지붕개량이 일시에 이루어져 많은 자재를 공급할 길이 없어 시멘트기와 공장을 장려해 웅상지역에도 필자가 사는 마을에는 박청이란 자가 시멘트 기와공장을 운영했다. 한편 과거 초가집은 탈곡을 끝낸 말끔한 볏짚으로 11월경에 연게(이엉)를 엮어 어깨에 메고 사다리를 타고 올릴 수 있는 만큼의 크기로 몇 십 통을 엮어 지붕에 얹고 겹겹으로 연게를 둘러 새끼로 촘촘히 동여맨다. 지붕 맨 위에는 짚을 추려 용부름을 틀어 올려 단단히 묶어 마무리를 한다. 초가집은 한 해 한 번씩 교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해마다 교체를 하지 않으면 짚이 썩어 비가 세기 때문이다. 늦가을 억새가 다피고 잎과 줄기가 마른 상태의 억새를 산에서 베어와 연게(이엉)를 엮어 지붕을 잇기도 했다. 억새로 이은 집은 3~4년마다 한 번씩이었다.

담은 어느 시대 때부터 시작했는지 알 수 없지만 오랜 옛날부터 자기 집의 영역표시와 더불어 짐승이나 도적 등의 외부침입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설치되었다.

1960년까지의 울타리는 나무로 된 울타리와 돌을 한 첩을 놓고 흙을 물에 이겨 한 첩 놓고 겹겹이 쌓은 흙담이 있고 돌로서만 쌓은 강담이 있다. 대다수 나무로 된 울타리가 많았다.
울타리에 사용되는 나무는 주로 밤나무, 소나무, 참나무였다. 흙담은 비를 맞으면 잘 무너지기 때문에 담위에 이엉을 덮거나 기와를 덮기도 했다.
생나무를 가지째 베어와 가지를 생긴 모습대로 차곡차곡 쌓아 무게 나가는 돌이나 물체를 얹어 마르고 숨이 죽도록 재워뒀다가 울타리를 했다. 이때 울타리에 사용되는 나무를 우섶이라고 하고 울타리 하는 일을 우섶한다고 했다. 우섶은 땅에 깊게 여러 겹으로 꽂아 바로세워 대나무나 긴 장대 나무를 양옆으로 누이고 끈으로 여러군데 묶어(울대방)우섶을 했다. 한 번한 우섶은 해마다 한 번 정도 새로운 우섶을 해 보강했다.

5.16군사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이 시작한 새마을운동 초창기사업으로 농촌울타리로 사용되는 나무가 산림을 해치므로 이를 없애고 좁은 골목길도 넓히기 위해 울타리를 헐고 담을 쌓게했다. 울타리와 담 사이에는 이웃 간에 정을 나누기 위해 터놓은 공간이 집집마다 있었다. 이 공간으로 작은 별난 먹을거리라도 생기면 서로 나누고 정담도 오갔다.

그 시절 마을 전 골목은 작은 손수레도 잘 다니지 못할 정도였다. 울타리와 담을 헐고 심지어 집까지도 헐어가며 어느 누구도 대가를 바라지 않고 솔선해 골목을 넓히고 자기집 안쪽으로 담을 쌓았다. 지금 이름이 지어진 대다수 길은 그때 넓어진 길이다.
길로 사용하기 위해 서로 양보한 땅이고 길로 사용돼 아무도 마을공동 소유임을 의심하지 않고 사용해 왔지만 지적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세월이 변함에 따라 일부사람들의 시비꺼리로 등장하기도 한다. 1970년경부터 블록담이 보편화 되고 2000년경부터 낮은 나무를 심은 울타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1960년경까지 대문이라고 형식을 갖춘 문을 가진 집은 마을마다 한 두 집뿐이었다. 대문을 달고 있는 집은 댁호와 이름처럼 아래마을 대문집, 윗마을 대문집 이렇게 말하면 어른이나 어린애나 그 댁을 말하는 줄 알았다.

당시 웅상사람들이 쓰는 말 가운데 1960년경까지 사용된 말 중 “우리집 대문째 지으면 000해줄게” 이 말은 바로 우리집 부자되면 후하게 살겠다는 말이었다.
대문이 있다면 바로 부잣집이고 변소채가 기와집이면 부자라는 뜻이다. 거의 다 삽짝으로 대문을 대신했다. 아예 삽짝도 없는 집도 더러 있었다.

삽짝은 연목정도 굵기의 나무를 양 옆으로 나란히 하고 서장을 4개정도 박아 엄지손가락 굵기의 삽짝 높이와 같은 길이의 바른 생나무를 서로 엇길로 서장에 끼워 양쪽에 실한 기둥에 철사 같은 것을 묶어 삽짝을 열고 닫고 했다.
1970년 경부터 철대문이 보편화되었다. 밤에 방안에서 불을 밝힌 것은 1960년대 초까지 호롱불에 의해 불을 밝혔다. 석유를 호롱에 붓고 호롱 뚜껑에 난 구멍사이로 심지(창호지를 말거나 헝겊을 말아 사용함)를 끼워 그 위에 불을 붙이면 불이 켜진다.
심지를 올리면 불은 밝아지지만 엄청난 그을음이 나고 기름이 더 많이 들어 기름을 아끼기 위해 심지를 낮추어 사용했다.

호롱불 3개 밝기와 작은 양초 한 개의 밝기가 비슷했다. 호야(호롱램프)밝기가 호롱불보다 밝고 바람에도 잘 견디었지만 기름이 호롱불보다 많이 들어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생활이 윤택한 집에서는 양초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극히 드문 일이다. 제삿날이나 양초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날 양초로 불을 밝히면 그 불빛이 얼마나 밝게 느껴졌던지 방이 째지도록 밝다는 표현을 하기도 했다.

어두운 호롱불 밑에서 길쌈을 하고 베를 짜고 새끼를 꼬고 짚신을 삼고 가마니를 치고 멍석(덕시기)봉태기, 바지게, 소쿠리, 우장(우의)를 매고 떨어진 양말과 옷가지를 기우며 이를 잡고 반찬거리를 장만하고 밤에 이루어진 모든 일은 호롱불 밑에서 했다. 밤새 책을 보거나 글을 쓰고 나면 그을음이 콧구멍에 배어들어 코를 풀면 코가 까맣게 나왔다. 호롱불 앞에서 졸음을 견디지 못해 졸다 머리가 호롱불에 닿아 노랗게 그을러 먹은 일도 많다.

명곡과 용당에서는 수력발전소를 설치하여 마을에 전기불을 밝혔다. 1959년 11월 15일 명곡농업협동조합(조합장 이석순, 상무 박건중)에서는 7호국도 명곡 다리 서남쪽 회야강변에 주진리 김수백 소유물레방아를 720,000원에 매수하여 회야강 중봇들 봇물을 이용하여 소형 수력 발전소를 건설하였다. 사업자금과 운영자금은 농협은행으로부터 1959년 11월 10일 1400,000원 차입하였다.

수력발전기를 설치하고 전주를 세워 전선을 연결하여 전등 146등을 설치하여 전기사용료를 받아 시설 차입금을 상환하기로 하였다.
1960년 3월 14일(조합장 박건중)물레방아를 터빈으로 개조 건설하여 전등 100V 13W 200등을 설치하였다.

터빈개조 기술자인 밀양군 삼량진읍 송지리 380번지에 본적을 둔 이우곤은 명곡으로 이거해와 낮에는 도정공장을 돌리고 밤에는 마을에 전기를 공급했다.(그분의 아들 이창기는 필자와 절친한 친구이며 현대조선 설계부에 근무하면서 현대조선 악단장과 배구부주장을 했다)

외홈마을에는 전선시설공사비가 많이 들어 전기 공급을 하지 못했다.
전깃불 공급은 초저녁 어둠이 깔릴 때부터 밤 11시경까지 공급하였다. 전등 한 등 밝기는 양초 두 개 밝기였다. 우수기에는 터빈을 돌리는 물이 많아 불이 더 밝고 가뭄에 물이 적을 때는 어두웠다.

재료도 부실하고 전문가도 아닌 부락민들이 전기 공사를 하여 전기줄에서도 고장이 자주 발생하고 집안에서도 고장이 잦아 전기 수리는 박희수, 박장식이 많이 했다.
다방면에 어설픈 지식을 가진 이두수는 전기를 돌본다는 마음으로 전기에 자주 손을 대어 전 마을의 전등을 깜박이게 하거나 고장을 자주 냈다.
전등만 깜박이면 그 분의 소행으로 알고 온 마을 사람들이 안방에서 “두수, 두수다!”라고 한 적도 있었다.

모든 자원이 부족했던 때라 밤사이 한적한 곳에 설치되어 있는 전선을 도둑이 자주 걷어가곤 했다. 늦은 가을쯤에는 터빈이 돌아가지 않아 물을 빼고 터빈을 들여다보면 회야강에서 떠내려 온 민물 게가 터빈구멍에 20~30마리가 끼어 터빈을 돌아가지 못하게 했다. 터빈 하수구를 청소하기 위해 물을 빼고 도랑을 칠 때 뱀장어, 탱고리, 참지름쟁이등의 고기가 엄청 잡혔다.
전지 한 등 당 연간 사용료로 벼 1말 정도를 받아 경비로 충당했다. 전기를 아껴쓰기 위해 방과 방사이 벽에 구멍을 내어 전기 한 등으로 두 방을 사용했다.

1970년 덕계부터 서창까지 전기가 들어왔고 용당 이승갑의 말에 의하면 그 후 2년 정도 지나 용당마을까지 전기가 들어왔다. 용당마을 전기가 들어올 때 소요된 경비를 용당마을 사람들이 용당리 산 57번지, 산 44번지 일대 20만원 동유재산을 처분하여 감당했다. 당시 처분가격은 평당15원에 처분했다. 현재 그 지역 땅값은 평당 50만원 이상에 거래된다.

전기를 들이기 위해 많은 분들이 노력했지만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신상우 의원의 역할이 컸다. (이번 이야기는 일부는 ‘웅상의 발자취’에 필자가 쓴 부분의 글을 인용했고 대부분 내용은 기록에도 없는 사실을 기억을 더듬고 흘러 다니는 말을 모아서 쓴 글이다)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6년 02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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