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상의 역사를 말하다(18)/해방 전후 그 시절, 우리 삶의 모습은
악랄하게 수탈에 앞장 선 사람 민선면장 자진 사퇴, 주민들 타락선거가 극치를 이룰 때 정의로운 여론 형성
박극수 (현)양산문화원 이사 양산시 향토문화연구회 감사 웅상의 발자취 편집위원장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6년 01월 29일
|  | | ⓒ 웅상뉴스 | | 부족국가 때부터 울산 모태 지역을 이루어온 웅상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우리나라 모든 국권이 일정에 찬탈당하고 상실된 때인 1906년 울산에서 양산으로 병합되었다. 병합 사유는 일본인들이 그럴듯한 이유를 내세웠지만 모두 기만이고 실상은 임진왜란 때 웅상 의병과 지역민들이 왜구들에게 치명적 타격을 입혀 왜구들의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는 ‘왜시등’이라는 지명까지 만들어 지금까지 유래되고 있는 사실 때문이다.
이로 인한 왜구들의 보복으로 웅상 전 지역민들은 산속이나 인근 울산으로 피신해 살면서도 끈질기게 항거했고, 일본인들에게는 골치 아픈 지역으로 남아 역사성과 전통성, 생활권, 혈연관계도 전혀 없는 양산과 병합됐다.
일정은 웅상 주민 단 한사람에게도 의견을 물은 바 없이 자기들 멋대로 강제 이행했다. 단결하지 못하는 모래알 같은 민족을 만들기 위한 술책으로 웅상과 유사한 역사를 가진 지역을 골라 행정개편을 했던 것이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풍수설이 좋은 우리나라 전역을 조사하여 인물이 날 만한 지형을 이룬 곳은 주민들을 강제 부역으로 동원하여 지세를 변경하고 쇠말뚝을 박는 행위를 전국을 다니면서 자행했다. 우불산은 고대 때부터 각종 문헌에 영남의 명산 중 명산으로 기록되어 있고 일본을 전복할 만한 위인이 웅상지역에서 태어날 지형의 지세라 하였으니 얼마나 수난을 당하였겠는가?
일정은 우리 민족성을 말살시키고 황국시민을 만든다는 얼토당토않은 정략으로 우리 민족을 우민화 시키려는 악정을 되풀이했다.
학교에서는 우리말 수업시간을 없애고 우리말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고 일본어를 가르치고 일본어를 사용하게 했다. 창씨개명을 하여 일본식으로 고치게 하고 신사참배도 강요하고 강제징병과 근로보국대라는 명칭으로 강제로 동원하여 군사시설과 중공업 탄광에 징용으로 끌고 가 잔혹한 노동과 구타를 일삼고 끼니도 제대로 주지 않고 노예보다 심하게 부려먹고 아리따운 꽃봉오리 같은 처녀들을 그들이 말하는 정신대라고 하며 전쟁 성노예로 끌고 갔다.
또한 그들은 우리 백성들을 꼼짝달싹 못하도록 코뚜레를 채우기 위하여 산림 보호라는 미명하에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산림법을 만들었다. 당시 땔감은 전적으로 산에서 구해온 나무 말고는 없던 시절이라 그들이 제정한 산림법을 적용한다면, 농촌지역에 사는 어떠한 사람도 구금될 수 밖에 없는 법을 만들었다.
식량 절약과 세수 증대란 미명하에 식량이나 다를 바 없이 담가 먹어온 농주를 담그거나 먹다 적발되면 엄청난 형사처벌을 받아야 하는 법을 만들어 일정이 우리 국민을 멋대로 수탈하고 거부하면 이 악법을 적용하여 처벌을 했고 처벌을 가할 것이라는 엄포로 우리 국민을 다스렸다. 코뚜레에 메인 우리 백성을 소처럼 마음대로 끌고 다녔다.
그것도 부족하여 처음부터 승산 없는 전쟁을 일으킨 그들은 전쟁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국력이 쇠진해지자 죄없는 식민지 국민에게 공출이란 제도를 만들어 가족 먹을 식량도 없는 처지인 배고픈 백성들에게 쌀이란 쌀은 다 수탈해가고 놋그릇, 솔가지 기름까지 배급제로 하여 우리 국민의 생활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당시 농촌 마을마다 추수한 곡식으로 가계를 간신히 유지하고 끼니를 이어 갈 수 있는 집은 한 마을에도 몇 집에 불과하고 그 이외 집들은 초근목피로 연명하고 영양실조가 되어 부황 현상이 된 분들이 부지기수였고 배곯아 죽는 사람도 자주 발생했다. 이런 가운데 제삿상 맵밥용으로 볏짚 볏가리 속이나 마루 밑 땅속 또는 산속에 묻어둔 쌀과 놋그릇을 찾아 매질을 가하고 빼앗아 갔다. 이 몹쓸 행위를 한 공무원은 대다수 우리 국민으로 일본앞잡이가 되어 공분을 일으켰다.
웅상에서도 그러한 행위로 인하여 피해를 본 사람이나 소문을 들은 사람은 누가 그런 악랄한 자세로 임했는지 웅상에 오래 산 60대 중반 이상이면 다 아는 사실이다. 수탈에 앞장선 어느 한 사람이 4.19이후 민주당 정권시절 민선면장에 출마했으나 과거에 행한 악랄한 행적의 여론을 감당하지 못해 중간 자진 사퇴한 사례도 있었다. 그때는 타락선거가 극치를 치달을 때임에도 웅상주민들은 정의로운 여론을 형성했다. 그런 모습이야말로 바로 웅상의 정체성이었다. 그것은 바로 임진왜란에 대처한 웅상인들의 숭고한 정신이 이어진 것이다. 그 시대 그런 공무원이 있었는가 하면 친일파의 뜻에 의해 일본문화의 단발령이 내려질 때 단발령을 거부하고 공직을 사직한 웅상농협 전 조합장 이태춘의 조부 이재명 같은 분도 있었고 창씨개명 정책으로 말단 공공기관의 급사와 청소부마저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면직을 시킬 때 필자의 백부님 박정학은 통도사 부설 통도 중학교를 졸업하고 당시로서는 최고 선망의 직장인 철도청의 중견간부시험에 합격하고도 창씨개명을 거부해 발령받지 못했다. 일정 때 어떤 공직에도 나서지 않고 있다가 해방 후 철도청 납품사업을 했다. 해방 직전 전세가 일본의 패전으로 확실해 감에도 백성들을 기만하고 계속 승전하고 있다고 알렸다. 전쟁을 감당하기 어려운 일본은 애꿎은 식민지 백성들의 피빨기에만 광분했다. 일정에 시달려 말이 아닌 상태에서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이했다. 행복해야 할 틈도 없이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끼여 민족의 자주권을 지키지 못하고 내적으로는 정치권력 다툼으로 정국이 혼란스럽고 경제상황도 파죽지세로 나빠졌다. 당시 경제상황은 해방되기 1년 전 금융조합에 대출받아 산 논 다섯마지기(1,000여평)값을 물가가 얼마나 상승했는지 쌀 한 말 값으로 갚은 분(박기업)도 있었다. 그 시절 살았던 분들의 삶의 모습을 소개하고자 명곡마을에서 태어나 명곡마을에 살다 세상을 떠난 필자의 인척되는 박기업이란 분의 삶을 소개하고자한다.
<쌀 한말에 논 다섯 마지기를 구입한 박기업> 박기업(朴基業)은 1891년에 명곡에서 출생하여 1966년 76세의 나이로 명곡에서 세상을 떠났다. 별명은 소똥망태 할배다. 일 년에 몇 번 나들이옷을 입고 나들이를 하는 날이 아니면 사계절 소똥망태를 늘상 메고 다녔다. 집을 나오다 용변이 보고 싶으면 한참 나오다 집으로 돌아가 용변을 보고 집에 돌아올 때는 용변을 억지로 참고 집에 와서 용변을 보았다. 나들이를 하다가도 개똥이나 소똥을 보면 짚이나 풀에 담아 집에 가져오고 원거리 타지역에서 보면 인근 논밭에 넣어주고 왔다. (비료와 퇴비가 귀한 때라 개똥, 소똥, 인분까지 퇴비로 사용했다) 너무 가난한 집에 태어나 먹는 것도 배불리 먹지 못하고 서당문전에도 가보지 못해 이름자도 쓸 수 없는 까막눈이라 집에 글 읽는 소리 끊어지지 않게 들리고 백석지기 하는 게 인생 한으로 살았다. 슬하에는 3남 4녀의 자녀를 두었다. 둘째 아들(화중)은 웅상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소남(당시지명은 신기) 이하락(李河洛)훈장이 훈도하는 서당에 한학을 공부하러 다녔다. 신기서당에는 문하생이 열 명이었는데 책 살 돈이 없어 훈장이 소장한 경서(經書)와 한서(漢書)를 베껴 교제로써 공부했다. 당시 서당 수제자로 나이가 많고 사서오경(四書五涇)을 배우는 윤수재만이 가정이 부유하여 자기 책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화중의 갈망은 소학책 살 수 있는 것이었다. 화중이 서당공부를 마치고 회야강을 건너려고 하는데 건너편에 논을 갈고 있는 소가 자기집 소 같아서 이상하게 여기며 징검다리를 건너갔다. 그리고 소를 몰아 논을 갈고 있는 아버지를 보고 “아버지, 이 논은 우리 논도 아닌데”라고 말했다. 박기업은 “훈장님네 논 아니여”라고 대답만 하고 더 이상 아무런 말도 않았다. 그는 속으로 ‘너는 학문에만 전념하여 어진 선비가 되어라’라고 중얼거렸다. 아들은 더 이상 아무 말없이 집으로 갔다. 일터에 나가면 어두워야만이 집에 가는 그는 그날따라 아들이 글 읽는 소리가 듣고 싶어서 해 질 무렵 집에 들어가서 아들이 글 읽는 소리를 한참 듣다가 다시 들로 나갔다. 박기업은 동래의 왕귀천의 소유인 논을 소작했다. 가을에 벼를 베어 말린 뒤 단을 묶어 논두렁에 쌓아두었다. 보리씨를 뿌린 뒤 쌓아 둔 볏단을 집으로 지고와 타작했다. 큰 아들이 어느 날 볏단을 지러가니 벼가 한짐 가량 없어졌다. 좁은 시골마을이라 삽시간에 마을사람 모두가 알게 되고 서창지서까지 알게 되어 경찰관이 현장 조사를 시작했다. 경찰관은 볏단을 지기 위하여 지게를 받친 목발자국을 본 후 목발 사이와 목발의 크기를 자로 재어보고 집집마다 다니며 지게목발을 재어보고 비슷한 지게 둘을 가지고 현장에 가서 비교해보니 지게 하나가 목발의 자국에 빈틈없이 맞아 경찰관은 지게임자를 동행해 지서로 갔다. 한 시간이 지날 쯤 박기업은 지서에서 출두하라는 통지를 구장을 통해 듣고 지서로 향했다. 지서 주임이 “지게임자가 댁의 벼를 한짐 지고 갔다고 자백하였는데 벼가 없어지지 않았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는 논에 벼가 없어진 일이 없다고 대답했다. 주임은 “저 사람이 지고 갔다고 하는데 어찌 거짓말을 합니까?”라고 말했지만 그는 “지게임자가 다른 논에서 지고 간 걸 착각한지 몰라도 우리 논에는 그런 일이 절대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몇 시간이나 질문과 답변이 오가다 벼를 잃은 사람이 잃은 사실이 없다하여 범죄가 성립될 수 없어 벼를 지고 간 사람과 같이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주임은 문을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향해 혼잣말로 ‘성인이 따로 없다. 명곡 박기업이 성인이다’라고 했다. 그 자리에 동석한 명곡구장 김동렬은 그때 들은 그 말을 사람들에게 전했다. 1940년대 대다수 농토는 외지인의 소유로 소작을 하였다. 소작인들은 소작권이 떨어질세라 해마다 봄이 되면 소유주를 찾아가 최고 빛깔 좋은 장닭, 씨암닭, 꿀등을 선물로 바치는 것이 되풀이되었다. 왕귀천의 집에 집안 심부름을 하는 사람이 나이가 들어 주진 광산에 취직을 하였다. 광산에 작업을 하다 보니 시간이 있어 왕귀천을 찾아가 명곡 박기업이 소작하는 난수들 세 마지기를 자기가 소작하도록 해달라 요청하니 왕귀천은 오랜 세월 동안 집안일을 돌봐준 정으로 불청을 못해 금년부터 그 사람에게 소작하라고 했다. 비슷한 사연이 그 당시에는 많았다. 이를 소작시비라고 했다. 얼마나 한 맺힌 이야기인지 소작시비꺼리는 지금껏 이야기로 전해온다. 소작인들은 1년이 가도 달걀하나 먹지 못하는 처지에 전답소유자에게는 씨암닭을 바쳤다. 어느 날 마당을 쓸고 있는 큰 아들 박수용(朴秀龍)에게 오늘 난수들 논을 갈러가라 하니 난감한 처지인 큰 아들은 대답없이 싫어하는 표정을 했다. 다시 논을 갈러 가라하니 그래도 큰아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박기업은 큰 아들에게 말했다. “오늘 왕귀천 집에서 심부름하던 이가 논을 갈러온다는 말을 들었다. 그 쪽에서 논을 갈지 말라하며 언성을 높이더라도 너는 말소리를 높이지 말고 그쪽에서 흥분해 너에게 팔만 내밀더라도 너는 논고랑에 엎어져 일어나지 말고 어떠한 경우에도 대항해서는 안 된다. 금년에는 반씩 갈라 소작을 하고 내년에는 떨어져야지 오늘 논을 갈러가서 그쪽에서 앞두름부터 갈면 너는 뒷두름부터 갈아라 우리가 간 곳은 우리가 모를 심고 내년에는 논을 다 내어놓자. 내가 부지런히 농사를 잘 지어 곡수를 많이 내어 왕부자가 정한 세를 한 번도 어김없이 바쳤고 초봄에 큰 장닭을 선물로 바쳤는데 논을 떨어질 수 없지 않느냐.” 그는 논 300평 소작을 한 해 더하기 위해 그토록 처절한 울분을 삼키며 경작했다. 1935년경 흉년이 들어 굶어죽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밥을 얻어먹는 사람들이 풍년이 든 곳을 찾아 먼 곳까지 이동하며 잠자리를 다리 밑에서 하고 떠돌이 생활하는 사람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아침저녁으로 다섯, 여섯 명 정도는 밥을 얻어 먹으러 왔다. 어느 날 아침 아홉 식구가 아침밥을 먹고 있는데 삽짝에서 밥 좀 주세요라는 말이 들렸다. 그 당시 걸인도 예절을 행하느라 삽짝(대문)밖에서 밥 주세요 하지 주인 허락 없이 마당에 들어오지 않았다. 큰 딸은 처녀라 밥을 가져갈 수 없고 둘째 아들(화중)이나 아내가 밥을 가지고 가야했다. 준비한 밥을 찾고 숟가락을 챙기느라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삽짝 밖에서 다시 밥 좀 주세요,라고 하니 박기업은 먹고 있던 밥을 갖다 주고 돌아와 큰 딸에게 식은 밥 없느냐고 했고 큰 딸은 먹던 밥을 들고 돌아앉아 가슴으로 가리고 부엌으로 가지고 가서 다른 그릇에 담아 아버지에게 드렸다. 추운 겨울에 밥을 얻어먹던 사람이 벌벌 떨고 있으면 입던 윗도리를 벗어주었고 해 질 무렵 굶주림에 지쳐 떨고 있는 사람을 집으로 데리고 와 자기가 먹던 밥을 나누어 먹고 잠도 여러 날 같이 잔 적도 여러 차례 있었다. 심한 추위는 떠돌이 생활하며 명곡다리와 외홈다리 밑에 잠자는 이들이 한 해에 두세 명은 얼어 죽었다. 그들이 입고 있던 옷이 너무 헤지고 낡아 민망해 여름에 자신이 입었던 삼베옷으로 갈아 입혀 공동묘지에 장사를 해주었다. 웅상면사무소에서는 행려사망자 장례비를 구장을 통해 지급했다. 구장은 박기업에게 주었으나 그는 거절하며 받지 않았다. 그런 일이 여러 차례 있었다. 1943년 일정치하 때 일개면에 가장 부지런한 면민 한사람씩 선발하여 금융조합에서 논 다섯 마지기를 구입할 수 있는 금액을 낮은 이자로 1년 거치 5년 분할 상환으로 빌려주었다. 선발 심사위원은 면장 면협의회 각 동리구장으로 구성되었다. 부지런하게 농사를 짓고 소똥망태를 메고 다니며 퇴비 마련도 제일 많이 하므로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박기업이 웅상면 근농자로 선정되어 금융조합에서 빌린 돈으로 명곡 뒤뜰에 논 천 평을 사 농사를 지었다. 이렇게 산 논을 연부답이라 했다. 1944년은 거치기간이라 거치하고 첫 번째 상환 해인 1945년 8월 15일은 우리나라가 광복이 되었다. 광복과 더불어 경제공황이 와 돈의 가치가 떨어질 때로 떨어져 쌀 한 말 낼 돈으로 5년 상환할 돈을 한꺼번에 모두 갚았다. 그와 같은 횡재는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천성이 부지런하고 어진 성품에 감동하여 하늘이 내린 복이라고 당시 초당방에서도 말이 오갔다한다.(경제공황으로 그토록 횡재한 사람도 있었지만 국민의 경제 사정은 죽지 못해 사는 지경이 되었을 것은 뻔한 일이다) 둘째 아들 화중은 서당에 공부한지 2년도 채 안 된 어느 날 부산으로 가 취직해 돈을 모아 부자가 되어야겠다했다. 공부를 더해 서당훈장이라도 되어 학비가 없어 공부할 수 없는 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라고 말려 보았지만 난수들 소작시비하는 모습을 보고 우리집은 글보다 돈 버는 게 우선이라 느꼈다며 고집을 부렸고 그 고집을 꺾지 못하고 부산으로 떠나 보냈다. 부산으로 간 화중은 일본사람이 경작하는 갈목포도밭에 일하다 남선전기주식회사 운수과 전차 차장으로 근무하면서 남전회사 노동조합가 가사를 작사했고 이로 인하여 해고당하고 부산형무소 간수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해(당시 초등학교만 졸업해도 웬만한 직장에는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형무관 연수원에서 교육을 마치고 부산형무소에 발령을 받았다. 28일째 되는 날 그는 아들집으로 찾아가 “네가 그 옷을 입고 있으면 나는 너와 얼굴을 상종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한 마디만 던지고 왔다. 아버지가 형무관으로 근무하는 일을 싫어하는 걸 알았는지 몰랐는지 둘째 아들은 그 이튿날 사직서를 제출하고 관복과 휴대용구를 다 반납했다. 박기업은 둘째 아들이 그때 왜 사직해야했는지 한 마디 묻지도 않았다. 둘째 아들은 집안 형이 경영하는 광명목재에 들어가 목재판매원으로 일하다 돈을 빨리 모을 수 있는 길은 장사를 해야 한다는 걸 깨닫고 신발 장사를 해 거부가 되었다. 큰 아들 수용도 농사를 열심히 지어 그의 생전에 백석지기를 했다. 셋째 아들은 대학졸업을 시켰고 손자들은 대학교수도 되고 약사도 되고 회사중역도 되었다. 한을 가졌던 박기업은 백석지기도 했고 선비 집안도 되어 한을 이루었다. (이 글은 필자가 박기업의 생존 시 본 모습과 둘째아들 생존 시 들은 증언을 토대로 한 것이다.) |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6년 0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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