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상의 역사를 말하다(17)/회야강 수난과 더불어 발전한 웅상
웅상이 산업화돼감에 가장 먼저 수난을 당한 곳은 회야강이다
박극수 (현)양산문화원 이사 양산시 향토문화연구회 감사 웅상의 발자취 편집위원장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6년 01월 08일
 |  | | ⓒ 웅상뉴스 | 부산시민의 식수원인 오륜대 댐 상류의 가축사육농가들이 부산시의 식수보호를 위한 이주대책으로 당시 별 규제없이 축사건립을 할 수 있는 웅상으로 대거 이동해 왔고 축산업의 호경기로 웅상주민들도 축산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아 축산농가들이 방류하는 가축분뇨의 양도 많았다. 1980년대에는 경상남도 읍면별 낙농(젖소) 사육두수가 웅상이 제일 많았다. 평산마을의 농토는 웅상에서도 재해가 가장 심한 지역이라 땅값도 싸고 마을주민들의 민원도 없고 마을 자체적으로 중차량의 통행이 가능한 도로가 확보되어 외지 가축사육농가들이 평산으로 더 많이 몰려왔다. 가축분뇨 중에서도 닭과 돼지가 악취를 심하게 풍기는데 평산의 대다수 가축 사육은 닭과 돼지가 많았다.
소나기가 오거나 장마철에는 가축분뇨를 방류하여 마을 골목은 말할 나위도 없고 집마당까지 뒤덮는 일이 다반사였다. 환경보존법도 허술했고 허술한 법도 공무원들은 적용하지도 않아 회야강은 가축분뇨 처리장이 되었다. 물의 흐름이 느린 곳에서는 가축의 분뇨가 쌓여 늪을 이룬 곳이 많았다.
정부의 농정실정과 IMF까지 겹쳐 축산업은 사양길에 들어 도산한 축산농가들이 많았다. 어려운 가운데 축산업을 하던 토지를 지니고 있던 농가들은 땅값이 올라 형편이 나아진 사람도 있었다. 축산업을 하던 장소는 아파트 부지로 이용되었다. 웅상이 도시기반 시설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인구가 먼저 증가하여 도시기반 시설이 취약한 것이다.
도시계획도 되지 않고 아파트가 먼저 건립되었다. 웅상에서 가장 먼저 들어선 아파트는 사평마을(새진흥4차)로 축사로 이용되던 장소에 건립되어 이 아파트는 5층 건물로 엘리베이터가 없고 식수와 생활용수는 지하수를 굴착해 이용하고 진입도로는 골목길이었다.
건립된 지 약 30년 세월이 지났음에도 집단 공동주택지가 도시계획상 주거지역이 아닌 자연녹지지역상태로 보존되고 있다. 나동연 시장이 시의원시절부터 시장으로 취임한 후, 주민들은 지금까지 주거지역으로 지정해 줄 것을 여러 차례 건의하였던 바 건의 때마다 조속한 시일 내 주거지역으로 지정되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하고도 아직 약속이 이행되지 않고 있다. 이해하기 어렵다.
평산마을에 건립된 경보, 선우, 봉우, 태원, 새진흥아파트 역시 한정된 지하수에 의존하여 식수와 생활용수를 확보하다보니 지하수가 고갈되어 평산마을 아파트 주민들은 전쟁피난민 수용소와 같은 고충을 당한 때도 있었다. 임시방편으로 명곡 시명골 저수지 물을 끌어올려 몇 년간 물 해결을 했다. 인구 증가로 도시계획 설립이 불가피했고 가장 시급한 사항이 상하수 문제로 정수장과 하수종말처리장이 설치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부산시 당감동 화장장 이전 추진계획 중이었다. 부산 근교에 부지선정을 물색하던 중 덕계 부일레미콘 주변지역(배나무골)이 안성맞춤이라 전직 모장관의 부인 이에리사란 분이 앞장서 추진하여 전이용, 김상길 외 5~6인의 전답 및 임야의 매매계약까지 하였다.
화장장이 회야강 상류에 건립되게 되면 강물이 오염되고 대기오염을 우려하며 전 지역민 반대운동과 궐기하기로 하고 박봉수, 김병하, 전종태 이분들이 앞장서 극렬반대하기로 했다.
매매계약된 토지를 덕계출신이며 부산에서 부라더미싱대리점을 경영했던 이동윤씨가 매수하도록하여 화장장이 들어오는 것을 막게 되었다. 부동산 투기 목적이 아닌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에 고향땅에 화장장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매입하였으나 이 토지를 매도할 때 많은 이득을 본 걸로 안다.
이분은 사평마을이 된 새진흥아파트일대 토지와 유엔아이아파트 토지도 아파트건립되기 이전에 매수하여 행정당국의 협조를 받아 아파트 건립이 가능한 토지로 변경한 후 매도하여 엄청난 이익을 본 것으로 안다. 화장장이 유치되지 않도록 앞장서 일한 분들과 지역민의 각고의 노력으로 화장장 유치를 막아 낸 것이 지역민들은 쾌거를 이루었다 평가했지만 그때 오히려 화장장이 유치가 되었다면 잘된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부산시에서는 웅상에 화장장 유치가 허용됐다면 학군도 부산에 편입되도록 할 것과 당시 창기까지 온 부산시내버스를 웅상과 울산 경계지점인 용당까지 연장운행되도록 조치할 것과 복지회관 건립과 상당한 웅상발전기금을 주겠다는 협약을 하겠다하며 부산시에서 애원을 하고 매달리다 싶이해도 웅상주민들은 단호하게 극구 유치를 반대했다. 당감동 화장장은 부산 팔송 영락공원에 이전되었다.
|  | | ↑↑ 우불산 앞 회야강 전경 | ⓒ 웅상뉴스 | | 문화적 차이는 다르지만 태국 방콕시가지 한복판에 화장장이 있고 일본 동경 시가지 복판에 납골당이 있어도 어느 시민 이상하다고 보는 이가 없다. 화장장은 양산시민에게도 꼭 필요한 시설이기도 하다.
부산시에서는 영락공원에 설치된 납골당이 수용할 여력이 없게 되자 새로운 납골당을 건립하기 위하여 웅상 여러 곳을 탐색하고 적당한 위치까지 선정하였으나 주민들의 반대를 우려하여 웅상지역을 포기하고 정관 두명에 건립되었다. 웅상유치를 위해 부산시에서는 막후 교섭도 하였다.
웅상 용당 출신으로 당시 부산시청 간부로 근무한 안덕우(필자와는 동갑내기친구)가 필자를 찾아와 부산시 납골당 유치를 웅상에서 허용한다면 웅상을 부산시 인구증가 전진기지로 만들수 있는 신도시 공영개발을 하고 웅상까지 부산지하철 연장과 복지회관 건립을 해주고 웅상발전기금도 상당한 금액을 협찬하겠다는 협상안을 부산시장으로부터 명을 받고 왔다며 웅상지역민을 설득할 것을 제의하였지만 필자의 마음도 납골당 유치가 탐탁지 않았고 주민들을 설득할 용기가 나지 않아 할 수 없다고 하니 “너가 그런 용기를 가지지 못한다면 누가 용기를 가질 수 있나” 하면서 실망스럽게 돌아간 일이 있다. 웅상에 납골당 유치가 어려워 정관 두명에 유치하고 정관에 신도시 건설을 위한 공영개발을 하고 부산시에서 부산전철 연장을 위하여 추진중이며 정관 도심에 복지회관 건립과 많은 발전기금을 협찬하여 정관발전을 위한 협의체를 구성하여 유급직원을 여러 명 두고 지역발전을 구상하고 복지회관을 임차한 수입으로 계속 발전기금이 증가하고 있다.
정관신도시 공영개발로 증가된 인구는 6만 5천 명 정도이며 계속 증가일로에 있다. 만약 웅상에 이런 특혜가 제공되었다면 정관보다 인구증가 여건이 나아 웅상인구는 20만에 육박했을 것이다.
지역이나 국가발전자원 중 가장 으뜸 자원은 인적자원이다. 인구가 많다보면 두뇌자원도 계발될 수 있고 인구수가 경제발전의 으뜸 요소가 된다. 중국과 인도가 경제성장이 급성장하는 요인도 광활한 국토와 수많은 자원도 있지만 이보다 인적자원이 가장 큰 요인이다. 웅상인구가 20만이 되었다면 100여 년 전까지 한 고을이었던 인접 지역과 어울려 독립된 행정구역을 구상해 볼만한 일이다. 이스라엘과 파레스타인이 장구한 세월 동안 유랑생활을 하면서도 새로운 국가를 재건할 수 있었던 것은 역사와 문화를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족국가 때부터 면면히 이어 오며 울산의 모태지역으로 유지해 온 우리 웅상이 임진왜란을 맞아 웅상 전지역민 중 혈기 있는 젊은이는 모두 의병으로 출병하고 노약자와 아녀자들도 모두 전쟁 뒷바라지를 한 지역이라 일본인에게는 골치 아픈 지역으로 단결된 지역정서를 교란시키려는 저의로 1905년 을사조역이 체결되고 우리나라 국권이 찬탈당한 후 1906년 일본인들의 강제적 조치로 웅상이 양산에 병합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웅상주민 중 양산과 병합되길 희망한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었고 일본인들은 웅상주민 어느 누구에게 물은 적도 없이 모래알 같은 백성을 만들기 위한 술책의 일환이었다.
일본인들은 우리나라 문화재 관리도 그들의 저의로 관리했다. 우리나라 문화유산은 아무리 소중한 유산도 어느 하나 국보로 지정하지 않고 그들이 말하는 일본 본토에 있는 문화재만 국보로 지정했다.
우리나라 숭례문(남대문), 흥인지문(동대문)을 일본인들은 보물1호 보물2호로 지정했다. 지정한 이유는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이 이끄는 군대와 소서행장이 이끄는 군대가 한양 입성한 일본국의 개선기념하기 위한 저의에서 지정한 것이다. 해방이 되고 대한민국 역사 편수관도 일정 때 역사 편수관들이 그대로 이어 받았다. 이들은 일본 경성제국대학에서 일본충성을 세뇌받은 학자들이었다.
일정 때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를 이름만 바꾸어 국보가 되어 오늘까지 관리되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 말살 정책과 의식없는 민족 만들기 위한 술책에 의하여 우리 웅상 행정구역이 난타 당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금번 양산시에서는 2030장기발전 기본계획안을 양산 인구를 50만 인구로 계획하고 있다. 그 중 웅상인구는 12만으로 계획하고 있다. 2011년 양산시에서 계획한 2020 웅상장단기 발전계획에 웅상인구 12만으로 계획되어 있다. 2030웅상 인구 증가 계획은 한마디로 엉터리 계획이다. 양산인구가 2015년 11월 20일 30만이 되었다.
인구증가는 국가의 가장 중요한 정책이고 끝없이 추구해야 될 사안이다. 웅상인구가 양산시에 차지하는 비중은 오랜 기간 동안 삼분의 일을 유지해 왔다. 이대로 적용한다면 계획인구 50만 인구 삼분의 일은 약 17만 명이다. 현재 인구 10만명에 현재 입주하고 있는 아파트와 건립중에 있는 아파트 입주예상자를 보아도 2020년 내 12만명은 충분하게 넘기게 될 것이다. 이 예상수치를 본다면 2020웅상장단기 발전계획 인구증가는 17만 정도가 정확할 것으로 예산된다. 이를 무시하고 2030계획에 웅상인구 12만 명이란 어떤 계산에 의해 산출된 것인지 뒷집강아지가 들어도 웃을 일이다.
필자는 다방면에 빈약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고 도시계획에 대하여는 더 까막눈이다. 가장 장점이 있다면 서민대중이 가지는 동일한 정서와 평범한 상식을 가지고 있다. 모임 때마다 소신을 주장하는 사례가 많은 것도 서민대중의 함축된 의견이라는 확신을 가지기 때문이다.
양산을 이끄는 높은 어른들과 자주 대하는 양지만 찾아다니는 웅상지도자 몇 사람들은 웅상인구 증가계획을 옳다고 박수를 보내었는지 몰라도 의식 있는 웅상 서민대중 어느 누구도 동의하지 않는다.
국민의 인권을 무시하는 무서운 독재자라도 국민을 의식한다.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양산의 높은 어른들이 웅상주민의 뜻을 묵살하고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 사례가 없길 바란다.
가축분뇨가 회야강을 어지간히 괴롭히나 싶더니 이와 때를 같이하여 덕계 선우아파트 자리에 아주판지제지공장이 들어서고 벽산아파트 자리에는 삼아요업, 그 남쪽 방향에는 성원제지와 동명펄프 그 앞에는 대성공업이 건립되고 소주에도 제지공장이, 용당과 주남 입구에도 그때 건립되어 지금까지 가동되고 있는 한창제지와 송학제지가 있다.
이때부터 웅상에는 각종 공장들이 우후죽순처럼 건립되기 시작했다. 제지공장은 제품제조 과정상 엄청난 물이 필요하고 엄청난 폐수를 방류한다. 여타 공장에서도 폐수를 방류하였지만 제지공장에서 방류하는 폐수 때문에 다른 공장들이 방류하는 폐수는 가늠되지도 않았다. 제지공장에서 방류하는 폐수는 아예 정수란 개념조차 없이 그대로 방류하였다.
이로 인하여 회야강에서 서식하는 모든 동식물은 전멸되었다. 회야강에 서식했던 고기는 탱고리, 참지름쟁이, 중태기, 피리, 은어, 붕어, 메기, 미꾸라지, 황어, 잉어, 뱀장어, 새우, 가재, 참게 등이 떼를 이루고 있었다. 얼마나 고기가 많았던지 더운 여름날 오후 시간에 필자가 사는 마을 회야강변 벌들보(물을 대기 위한 시설)밑을 보면 물이 폭포를 이루는 바위틈에 반도로써 고기를 잡으면 잠깐이면 두말통 분량이 넘치도록 잡았다. 겨울에는 하머를 들고 돌을 때리면 돌밑에 있던 고기들이 하얗게 떠올랐다.
이것뿐이 아니라 몰지각한 사람들이 고기를 잡기위하여 강에 농약 지오릭스를 풀기도 하고 청산가리를 풀어 푼 지역에서 3~4km까지는 고기가 전멸하는 상태가 되는 행위를 강 곳곳에서 연간 몇 차례 되풀이해도 큰 비가 한번 오고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듯이 고기들이 원상태로 떼를 지어 서식했다.
이런 강이 제지공장 폐수가 뒤덮어 전 강바닥은 제지폐수 찌꺼기가 쌓여 두꺼운 층을 이루고 강물 빛깔은 완전 황색으로 변했다. 풀 한포기 조차 살 수 없는 죽음의 강이 된 것이다. 강바닥 전체가 두꺼운 도배상태가 되어 있다. 가뭄이 계속되어 강바닥이 들어난 곳에는 두꺼운 나무껍질처럼 층이 생겨 일어나 이를 주어다 땔감으로 이용한 집도 많았다.
먹고 사는 일에 급급한 대다수 주민들은 폐수로 인하여 죽음의 강이 되어도 관심도 두지 않고 공장이 들어와 품팔이 자리가 생겨나는 일에만 감사했다. 일부 주민들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에 폐수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진정서를 여러 차례 제출해도 아무런 해결방안을 모색하지 않고 책임 회피성 회신만 반복되었다.
이도 모자라 회야강 상류 덕계, 평산지역에는 제품제조과정에 생명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는 화공약품이 사용되는 아교공장이 여러군데 생겨 폐수를 더하고 미관상 흉물을 이루었다. 부일레미콘과 대승아파트자리에는 가축사료원료 어분을 생산하는 공장이 생겨 환경을 훼손하는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변한 생선을 사용하여 제품을 생산해 엄청난 악취를 풍겨 인근 마을주민들이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고통을 받았다.
특히 남풍이 불고 흐린 날은 명곡마을 주민들이 더 많은 고통을 받아 관계관청에 호소도 하고 어분 공장에 찾아가 사정도 하고 우격다짐을 해도 아무런 대책 없이 4~5년을 버티며 가동하고 다른 지역으로 이전했다.
이런 수난 가운데 1986년 회야댐이 준공되고 같은 해 웅촌 회야강변 전역과 웅상용당일대가 환경보존지역으로 지정되었다. 회야댐 건립시에도 환경보존지정시에도 행정절차상 주민 여론 청취를 하는 절차가 있었을 것인데 어떤 기만적 술책에 의하여 이루어졌는지 웅상주민들 대다수는 깜깜무소식 상태에 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격이 되었다. 짐작하건데 당시 행정관계자들이 높은 어른들 말이라면 맹목적으로 따르며 양지를 향하여 일생 살아온 유지라며 폼 잡고 다니는 비굴한 인사들과 결탁하여 주민 몰래 요식을 갖춘 것으로 사려된다.
땜 건립시에도 환경보존지역 지정시에도 직간접 이해당사자인 웅상주민들에게 공고와 공람을 했을 것인데 공고를 보았다는 사람도 없고 공람을 했다는 사람도 없다. 이 행위 역시 앞서 언급한 분들이 공람했다는 서명날인을 했을 것이다. 이런 행위는 일본정부가 추구했던 우리 백성들의 수탈행위에 자기 이익을 도모할 목적으로 일정 공무원에게 꼬리를 치고 흔들며 협조한 행위와 다를 바가 없다. 지탄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이다.
지역민중에는 자타가 유지라 인정하는 분들이 있다. 유지의 유형이 어떤 유지는 높은 어른들에게 듣기 좋은 소리만 하고 아부하여 그들과 식사 시간이라도 가지는 게 어깨가 우쭐하고 자기이익을 챙길 기회를 노리고 어떤 유지는 지역발전을 염두에 두고 높은 어른들에게도 쓴소리와 바른말을 하는 자가 있다. 이런 유지의 뜻이 반영되어 지역이 발전되어 가야하는데 이런 유지는 높은 어른들과 상면 할 수 있는 자리에 제외되는 사례가 많다.
사심 없는 애향심에 의하여 나온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듣기 좋은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는 높은 어른들도 아쉽지만 쓴 소리, 바른 말이 나올까 두려워 자리에 배제시키는 한심한 졸개들도 많다.
역사는 소수 지도자에 의해 창출되고 그 지탱은 민중이 한다. 역사를 창출해야 할 지도자들에게 바른 생각을 가지게 하는 유지가 요청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회야댐 건립시 우리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이라도 칠 수 있는 기회마저 비굴한 유지들이 상실케 했다. 댐 건립 반대를 해 관철이 되지 않았다 해도 댐 건립 이후 우리 생존권 침해와 회야강의 형태 변화를 우리가 원하는 바를 제시하였을 텐데 이도 묵살 당했다.
댐이 준공되고 곧이어 환경보존 지역으로 지정된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서창에 사는 소정무가 웅촌과 웅상경계지점 인근 농장에 건축물 건립신청을 하고 보니 환경보전지역으로 지정된 관계로 건축물 건립이 불가능하다는 회신으로 인해 용당 이승갑과 웅촌와지 노진일 등에게 알려 이분들이 경남도청에 재확인하여 알게 되었다. 환경보존지역 해지를 위해 웅상면민과 웅촌면민들은 강력투쟁 하기로 하고 환경보존지역해지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웅상투쟁위원장은 박봉수가 맡고 웅촌투쟁위원장은 이동석이가 맡았다. 웅상주민들은 서창 토지구획정리지구에서 수천명이 모여 궐기대회도 하고 관계관청이 중앙과 지방에 수십차 방문하고 용당마을 주민들은 과천 정부청사마당에서 단식투쟁도 하고 할 수 있는 방법이란 방법은 다 동원해 환경보존지역이 해지되었다. 이때 김동주 국회의원의 노고가 정말 대단했다. 투쟁과정상 소요된 경비는 당시 웅상지역 산과 답의 논 한 평 값이 만원 정도 했는데 5천만원이 소요되었다. 이 경비도 지역민들의 자발적인 협찬에 의하여 모금했다. 많게는 500만원부터 적게는 5천원을 한 분도 있다. 단합된 웅상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당시 대한민국 건국 이래 환경보존지역으로 지정된 지역을 해지한 곳은 우리지역 웅상 뿐이라 했다. 그때보다 웅상토지 가격이 지금 백배 이상 상승했다. 땅값으로 모금액을 환산한다면 그때 오천만원은 지금 50억이 된다. 지금 만약 50억이 소요될 만큼 지역의 중요한 현안이 발생한다면 그때처럼 모금이 가능할까 자문자답해보니 답변하기 어렵다.
이때도 양지만 찾아다니는 지역유지인 자들은 이웃마을 불구경하듯 했다. 만약 그때 환경보존지역을 해지하지 않았다면 웅상 전역은 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을 것이다. 이 계획은 댐 건립 때부터 사전 계획하여 추진되고 있었던 사안임에도 관계 공무원들은 쉬쉬하고 자기자리 보존만 편하게 하려고 웅상주민들의 생존권은 안중에도 없었다. 이들 중에는 웅상 향인도 있었다. 지역을 걱정하는 알만한 분들은 다 알기에 후일 역사의 기록에 맡길까하고 지금 거명하지는 않는다.
하수종말처리장 차집관로 공사를 하면서 얼마나 허술하게 했는지 사시사철 항시 물이 흐르던 강이 조금의 가뭄이 와도 차집관로 공사 굴착했던 곳으로 다 흘러들어가 건천이 되어 버렸다. 어떠한 노력을 가해도 항시 물이 흐르는 강으로 복원해야 한다.
회야댐 건설로 바다와 강을 오고가며 생태를 이루는 어종은 어로가 차단되어 멸종이 되고 지금까지 찾아 볼 수가 없다. 회야댐에 어로를 개설해야하고 1급수에 서식하는 어종이 서식할 수 있는 여건조성과 어종을 방생해서라도 생태를 복원해야 한다.
웅상에 고향을 가진 사람들은 고향 향수 중 회야강에 얽힌 사연이 가장 많을 것이다. 우리와 더불어 희노애락을 같이 해 왔고 영원히 같이할 회야강의 역사와 정체성을 정립하고 잘 가꾸어가자.
금번 이야기는 옛날일 외 근대사에 일어난 일들은 어떤 기록에도 없는 사실을 기억을 더듬어 적었다. 사실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람들 간에 약간의 견해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점 유념하기 바란다. |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6년 01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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