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상의 역사를 말하다(16)/1960년대 골재채취로 인한 수난사
회야강은 우리 생명을 부지하고 인물도 배출했다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5년 12월 28일
모든 국가나 지역 문명의 발상지는 강변이였고 우리 선조들이 웅상땅에 발을 들여 놓은 것도 회야강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시산국의 영역이 회야강따라 이루어졌다. 강변따라 생활권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강변은 경사가 완만하여 농경지를 이루기도, 통로를 형성하기도 용이하고 식수와 생활용수, 농업용수를 얻을 수 있어 부족국가때 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수자원은 회야강과 그 지천에 의존하여 생명을 부지해왔다. 울산시민들의 식수 확보를 위하여 회야강물만으로는 부족하여 낙동강물을 취수하여 우리지역 지하를 지나 회야땜으로 유입되어 절대량은 울산시민의 식수로 공급되고 웅상지역 식수로도 공급되고 있지만 그 이전에는 전적 물은 회야강과 그 지천에 의하여 구했다. 자연에 의하여 형성된 하천이 홍수와 가뭄과 기상변화로 형태와 생태가 변화되어도 큰 변화 없이 장구한 세월을 견디어오다 1959년 9월 16일~17일 양일간에 내린비와 태풍(사라호)으로 인해 강의 형태가 크게 변화되었다. 강변에 마을을 이루고 있던 구덕계 마을 전체가 소실되고 당시 마을지명이 신기마을이었던 소남마을에도 많은 피해가 있었고 주진마을, 용암마을에도 피해가 많았다. 7번 국도의 교량, 덕계다리, 주진다리, 외홈다리 등이 홍수를 견디지 못해 반파가 되고 야중임야 상태로 되어있던 현 경보아파트, 선우아파트, 대승아파트 일대와 오리소공원일대가 하천상태로 되어 버렸다. 회야강 최 상류에 위치한 장흥저수지가 일부 붕괴되기 시작해 회야강변에 사는 웅상전 주민들에게 높은 지역으로 피신하라는 급보를 전하고 일부 피신도하고 피신 준비를 하던차 비가 그치고 용기있고 지혜로운 공무원과 지역민들이 협력하여 더 이상 저수지뚝이 붕괴되지 않도록 조치했기 때문에 재앙을 방지할 수 있었다. 조금의 비가 더 내려 붕괴방지에 소홀했다면 엄청난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입는 재앙이 있었을 것이다. 강이 생긴 이래로 자갈 모래를 채취한 일 없이 보존해왔고 사라호 태풍으로 전 하천은 양질의 자갈 모래로 쌓여있었다. 1960년 초반 경부터 새마을 사업과 양옥 건축물 건립이 대중화하기 시작하여 골재(자갈, 모래) 수요가 급증하자 회야강에는 지천으로 깔려있는 골재채취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도 생겨났다. 골재채취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을 당시 자갈 파먹고 사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골재채취로 노동품 삯 치고는 제법 넉넉한 벌이가 되어 마을마다 몇 가구는 전적 이 일에 메달리는 사람도 있었다. 골재(자갈, 모래)채취가 웅상의 신흥 갑부로 탄생되는 초석을 이룬 사람도 있다. 당시 운수업을 했던 그 분은 부산 구서동에 태광산업을 건립할 시 회야강 자갈, 모래를 마구 싣고 가 납품하고 시멘트, 벽돌 공장을 건립해 회야강 골재를 원료로 사용해 엄청 많은 재력가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되었다. 회야강에서 골재채취를 하던 아픔을 딛고 이채익은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채익은 웅상 명곡출신으로 우불신사 단장과 웅상면의회의원을 역임한 이준걸의 4남 4녀중 4번째로 태어났다. 세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새 어머니를 맞이해 동생 4명이 더 태어났다. 유아기때까지는 풍족했던 가정이 초등학교 졸업할 즈음에는 가세가 기울어 정말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농토도 줄어들고, 그간 머슴을 들여 농사를 지어오다 머슴세경 줄 사정이 못되어 머슴도 들이지 않고 농사를 지어야만 했다. 농촌에 살면서도 농사일을 하지 않고 학문 추구에만 전염했던 아버지는 농사일이 서툴고 힘들어 했지만 어쩔수 없이 농사일을 맡아하게 되었다. 이채익이 개운중학교 2학년때 쯤 아버지가 비오는 날 식전에 소 풀 베러가 다리뼈가 골절되고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상처를 입고 병원 입원을 1년 가량하게 되었다. 건강보험이 없던 시절이라 병원치료비 부담으로 가세가 더 어려워졌다. 유복하던 가정이 설상가상이 되어 방황하던 차 친구권유로 일요일날 친구따라 자갈 모래 채취를 하러가니 일은 엄청 고되었지만 몇 푼 돈을 벌게 되니 그토록 먹고 싶던 군것질도 할 수 있고 군것질 거리를 동생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게 되어 기쁨이 되었고 더 열심히 하면 아버지 치료비도 보탤 수 있을꺼라는 기대가 되었다. 여름방학 때는 본격적으로 자갈을 쳐 돈벌이를 해야지 하는 설레임으로 방학 때를 기다리다 방학을 맞이해 염천의 더위를 견디며 자갈을 처 모아 자갈 운반차량이 오면 실어주고 돈을 받았다. 학교를 다녀도 희망이 보이지 않았는데 자갈을 열심히치면 아버지 치료비와 동생들 학비도 보탤수 있다는 희망이 생겨났다. 자갈치는 돈 벌이에 재미를 붙인 채익은 여름방학이 끝나도 학교가는 날도 예사로 학교를 빠지고 자갈치기에 전념했다. 당시 채익이반 담임선생님은 같은 마을 뒷집에 사는 김철호 선생님이었다. 가정사정을 너무 뻔하게 아는 처지임에도 채익이 입장이 되어 생각하는 일 없이 학생이 학교를 결석하는 학생본분 이탈만 탓하고 애정의 표현이라는 것이 심한 매질만으로 채익이가 학교를 정상으로 다니게 할 수 있는 첩경이라 생각했는지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심한 매질을 가해, 학교가기 싫은 학생에게 매도 두렵고 학교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가속으로 확대되었다. 아예 학교는 포기하고 자갈만 치기로 결심했다. 자갈치면서 어른들에게 참 때 술을 얻어먹다 술도 배우고 담배도 배워 술도 많이 먹고 담배도 많이 피웠다. 얼마 기간이 지나지 않아 학교에서 장기결석으로 퇴학조치대상이 되었다는 통보가 왔다. 퇴학하겠다는 결심으로 시작한 일이라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고 학교에 가지 않고 자갈치는 일만 계속하고 있던 차 아버지는 다리가 절름발이가 되어 퇴원을 하고 채익이가 장기 결석한 사실을 알고 아버지는 채익이를 껴안고 아무말없이 한참 흐느껴 울기만 해 그 이튿날부터 학교를 가게되어 중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게 되었다. 채익이는 아버지 울음에 ‘나를 진정으로 이해해주고 사랑해주는 이는 세상에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아버지는 나를 진실로 사랑하시는구나.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말아야지’ 하는 다짐을 했다고 한다. 가정사정으로 고등학교 진학할 사정이 못되어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있는데 작은 누나(이무출, 필자와 초등학교, 중학교 동기)가 한국생사종합검사소에 근무하면서 고등학교 진학할 것을 간곡하게 권유하고 수업에 소요되는 경비를 감당해주어 계속 공부를 할 수 있었다. 형 채형이는 생사검사소 경비를 하면서 대학을 다녔다. 이채익은 사회로 나와 노동현장에서 노동자와 같이 일하다 울산남구 구의원에 당선되고 그 이후 경상남도 도의원과 울산시남구 구청장을 연속2선을 하고 울주군에서 한나라당 국회의원 공천을 받아 출마를 해 낙선되고 울산항만공사 사장으로 임명받아 임기를 마치고 울산남구에서 새누리당 국회의원 공천을 받아 출마하여 압승으로 당선되었다. 최고 밑바닥에서 허덕이는 국민의 아픔을 몸소 체험한 정치인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청렴하고 가장 모범적이고 가장 부지런한 정치인이 되겠다는 신념을 시종일관 지키고 있다. 가족의 사랑이 아니었다면 중학교중퇴의 학력밖에 되지 않을 사람이 박사 학위를 받아 정치 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꺼이 공사석에서 논하는 것을 여러 차례 들었기에 가감 없이 사실대로 적는다. 양산시와 웅상에 관련된 사안에는 양산출신 국회의원 이상으로 심혈을 기울인다.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웅상농청장원놀이 기능보유자 김필연은 자갈치는 한을 가진 사람이다. 타고난 목청 탓도 있지만 인생살이가 가슴에 한이 되어 이 한을 토해 내는 노래소리로 인해 기능 보유자가 되었을 것이다. 김필연은 1934년 웅상주남 뒤 천성산 속 대성암 근처 민가에서 태어나 자라 반계에서 처녀시절을 보내다 주남 학성이씨 이채일과 결혼하여 서창에 살다 1960년경 명곡으로 옮겨와 살았다. 가난한 가계를 꾸려가기 위하여 구멍가게도 하고 (아버지는 산속에 살면서 총칼을 메고 온 공비들이 먹을거리를 달라 요청해 경각에 달린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나누어 준 죄로 보도연맹 양민학살 될 때 학살당했다. 남동생들이 아버지 명예회복을 위해 법적투쟁을 해 명예가 회복되었다)품팔이도 하고 자갈도 오래 쳤다. 자갈치는 일이 얼마나 고되었던지 남편 이채일은 병이 나 오랫동안 투병생활을 하다 세상을 떠났다. 남편 약값이며 자녀들 학비부담하기가 너무 힘겨웠다. 이런 와중에 막내 만호가 태어나 뜨거운 자갈밭에서 그늘을 치고 재우며 자갈치는 일을 계속했다. 자갈치는 일도 예사로 고된 일이 아니었지만 그중에서도 큰 트럭에 큰 삽(오삽)으로 한차를 혼자 퍼 담아 채울 때가 많았다. 이때의 고달픔은 말을 형언하기 어려운 아픔이었다. 지금은 중장비를 이용하지만 그때 자갈은 삽을 이용해 인력으로 퍼 담았다. 지금 6남매가 다 자라 각자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살고 있는 모습이 대견스럽다. 농청장원놀이 노래 소리 기능 보유자가 된 것도 무거운 삶에 짓눌린 탓이다. 이 때 까지만 해도 누구도 자갈치는 일에 간섭을 하지 않다 양산군에서 허가 된 장소에서만 차량중량 따라 한 차량당 정해진 세금을 물고 반출 하도록 조치하여 자갈 반출증 발급하는 직원을 두고 관리했다. 반출증 발급직원이 자갈운반 차량기사에게나 자갈치는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위압적인 대상이었다. 양산경찰서 서창파출소에서는 자갈 운반차량에 빌려준 돈 받는 것처럼 매일 아침마다 파출소 앞에서 푼돈을 걷어 들였다. 걷어 들이는 경찰관이나 주는 차량기사도 당연한 일로 생각했다. 직장구하기 어렵던 시절이라 자갈차 운전기사들의 인기도 대단했다. 당시 7번국도에서 가장 많은 물류운반 차량은 골재운반 차량이었다. 회야강과 주변에서 채취한 골재를 주로 부산에 납품했다. 골재운반 차량은 계속 골재운반만 했기에 웅상에서 부산, 울산 쪽으로 통학하는 여학생 중에는 자갈차 운전기사와 정분이 통해 부부가 된 사람도 여러 명이 된다. 이 시절에 서창오리소 공원도 사리채취허가권을 양산군에서 모씨에게 내어주어 사리채취를 해 장구한 세월동안 유지해온 유적지가 소멸되었다. 2014년 오리소향토회(회장 박중구)의 요청에 의해 옛 오리소가 위치했던 자리와 약간 달리진 위치에 오리소 공원을 시 예산으로 건립했다. 건립과정에 박일배 시의원의 노고가 많았다. 이 시절 사리채취허가권은 엄청난 이권이 따르는 사업이라 이권에 관계되어 문책을 당한 공무원도 있었다. 경보아파트 주변일대, 선우아파트 주변일대, 대승아파트 일대, 소남마을 앞 하천변 일대, 백동마을 하천변 일대, 당촌마을 하천변 일대는 사리채취로 형질이 변경되었다. 사리채취 허가를 받아 사리채취를 하고 재방을 쌓아 국유지를 무상 양여 받은 사람도 있고 헐값에 불하 받은 사람도 있었다. 사리채취권으로 엄청 많은 돈벌이를 한 모씨는 웅상에서 공동주택으로는 가장 먼저 건립된 서창 국민주택을 건립하다 자기도 재산을 날려버리고 소남에 살던 순진한 엄한섭이와 동업을 하자고 유인하여 촌부자로 살던 엄한섭의 가산을 다 소실케 하였다. 사리채취권에 가담하여 재미를 붙인 주진마을 안용호는 웅상지역이 아닌 타 지역 사리채취권사업을 하다 뜻대로 되지 않아 만만찮은 재산을 다 날리고 빚쟁이들 등살에 집에 오지도 못할 처지가 되어 몇 년간 집에 오지 못하고 숨어사는 처지가 되었다.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동생들 지분재산까지 다 날려버려도 동생들(용주, 용중, 용문)은 남의 집 머슴살이까지 하면서도 형을 한마디 원망도 하지 않고 막내 동생 용문이 주가 되어 동생들이 형님 빚을 다 갚아주고 형님가족이 기거할 집이 없는 난감한 처지에 동생들이 마련해 줘 그 집터에 지금까지 살고 있다. 안용중은 필자의 마을 이웃에 머슴살이 할 때도 어찌나 고루했는지 감동할 정도였다. 부산항 부두근처에서 선구에 관련된 사업을 하고 있다. 엄청난 재력가가 되었다. 지금도 형제지간이나 조카들과의 관계가 주변의 감동의 대상이 된다. 부모재산으로 인해 형제지간에 원수지간이 된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는 시대에 이런 모습은 더욱 귀한 모습이다. 회야강 사리채취권은 노다지 금광에 비유될 정도로 엄청나게 돈을 번 사람도 많았고 이로 인하여 어려워진 사람도 많았다. 사리채취를 한 후 직강 공사를 하고 하천을 농지로 변경해 불하 받기도 당시 실세였던 모 권력자로 부터 약속을 받고 웅촌면 통천근처 강을 모산(옹기마을) 고개로 직강공사를 하고 굽어진 부분 강을 모두 농지화 할 계획을 하고 이를 이루기 위해 젊은 청춘을 소진하고 성사시키지 못하고 고향을 떠난 이도 있다.(만약 계회대로 되었다면 엄청 많은 농지가 생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에 의해 형성된 강 형태를 인위적으로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것은 바람직한 개발이 아니라 생각된다) 회야강에 얽힌 이야기는 너무 무궁무진하다. 다음이야기는 지역이 산업화하는 과정에 공장악취와 폐수에 시달린 회야강 수난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  | | ↑↑ ■약력 박극수 (현)양산문화원 이사 양산시 향토문화연구회 감사 웅상의 발자취 편집위원장 | ⓒ 웅상뉴스 | |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5년 12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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