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상의 역사를 말하다(15)/잊혀져가는 정겨운 웅상의 소리
박극수 (현)양산문화원 이사 양산시 향토문화연구회 감사 웅상의 발자취 편집위원장
새벽 4시가 되면 미타암 인경종소리가 정관면까지 울려 펴지면서 하루가 시작됐던 시절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5년 11월 26일
|  | | ↑↑ 엿장수 | ⓒ 웅상뉴스 | | 고향을 그리워할 때 갖가지 일들이 많이 생각난다. 그 중 고향의 소리도 떠오른다. 전형적인 농촌 형태로 있을 때 들리던 소리들, 날마다 계절 따라 때때로 들리던 소리들이 사라져가는 소리들이 많다.
금번 이야기는 잊혀져가는 고향소리와 그에 얽힌 사연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날마다 새벽을 일깨우는 첫 닭울음 소리는 새벽 3시경이면 ‘꼬기오~’ 하곤 한다. 첫닭 울음소리를 시작해 온 마을 닭들이 잠에서 깨어난다. 그때는 숫탉(장닭)이 울음을 운다. 그 시절에는 집집마다 닭을 사육했다. 닭의 사육방법은 낮이면 마당에 마구 놓아두었다 저녁이면 닭장으로 들어간다. 암 탉은 사람들이 만들어준 둥지에 들어가 알을 낳고 알을 놓았다는 소리로 꼬꼬댁 꼬꼬댁하고 운다. 병아리도 어미닭이 알을 품어 부화해 키웠다. 집집마다 닭을 먹이면서도 1년 가도 달걀을 몇 개도 먹지 못하고 시장에 내다팔았고 귀한 손님이 올 때면 손님 식탁에 반찬으로 올렸다. 닭고기는 더 먹을 수가 없었다. 소작논 지주에게 빛깔 좋고 튼튼한 놈은 뇌물로 바치고 사위가 오거나 아주 귀한 손님이 올 때 잡아 대접했다.
다음으로 새벽 4시가 되면 미타암 인경종소리가 울린다. 이 종을 제작한 시기는 1950년 후반경으로 안다. 징하며 울리는 종소리는 웅상전역과 울주군웅촌면, 기장군 정관면까지 들렸다.
 |  | | ↑↑ 영각 | ⓒ 웅상뉴스 | 언제부터 그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1990년 말경까지 들렸다. 미타암 종소리가 들리지 않아 미타암 주지스님께 요즘은 인경종을 치지 않느냐? 질문하니 계속 종을 친다고 한다. 도시화가 됨에 따라 많은 건물들이 소리를 흡수해 종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 같다. 이 종소리를 듣고 부지런한 가장들은 일어나 소죽을 끓이고 가족들이 사용할 기명물과 세숫물을 데우고 농사일을 하러 나간다.
새벽 4시 30분경이면 교회종소리가 울린다. 새마을 노래가사에 ‘새벽종이 울렸네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하는 구절의 새벽종은 교회종소리를 말한다. 그때 전국에 있는 교회는 모두 새벽종을 다 울렸다. 그때 엄마는 일어나 마을 공동우물터에 가 두레박으로 물을 퍼 올려 물동이에 담아 머리에 이고 여러 차례 물을 길러다 물더무(물통)에 가득 채우고 밥을 짓는다. 공동우물은 마을마다 몇 군데 있었다.
오늘날 주부들이 하루 종일 가사 노동에 소요되는 에너지보다 그 때 엄마들이 새벽물 길러오느라 소요된 에너지가 더 많을 것이다. 물 길러오는 노동은 힘든 노동임에도 이는 노동 중에도 넣지 않고 그저 일상의 한 부분으로 밥먹고 용변 보는 것쯤으로 생각했다. 1960년경 새벽에는 육성으로 “간장간장 오복간장”하며 자전거를 타고 마을 골목골목을 다니는 서창에 사는 박홍도 아버지 박상용이 있었다. 큰 말통에 간장을 싣고 다니며 가정에 필요량 만큼 들어 팔았다. 박상용은 웅상 웅촌일대의 오복간장 대리점을 하며 간장을 팔러 다녔다. 어지간히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지금도 그 사람을 오복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다. 콩고물이나 깨소금에 밥을 비벼 먹으면 맛이 좋았는데 그때 그 간장에 아무 것도 넣지 않고 밥만 비벼 먹어도 정말 꿀맛이었다.
아침 끼니때마다 “밥 좀 주세요”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굶어 죽는 사람이 더러 있던 때라 외홈마을에는 밥을 얻어먹고 사는 걸인들이 집성을 이루고 있었다. 그 마을 가운데 달선이란 분의 집 앞에는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샘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 샘물로 식수와 생활용수로 사용했는데 구획정리를 하고 난 후 그 물이 어디로 갔는지 지금은 샘이 없다.
밥을 구걸하러 갈 때 한 마을에 몰려가는 것이 아니라 마을 별로 나누어 구걸하러 다녔다. 그때 아침때마다 2~3명 정도가 밥을 얻으러 왔다. 1960년 후반 경까지 마을마다 몇 집을 제외하고 식량이 부족해 장이쌀(현물고리채)로 연명해갔다. 이런 어려운 처지에도 단 한 집도 걸인에게 밥 나누어 주는걸 거부한 집은 없는 걸로 안다.
필자의 집은 도로변에 위치해 걸인들이 더 많이 찾아왔고 배고픈 행인들도 자주 찾아왔다. 그때도 엄마는 인상 한 번 짓는 일 없었다. 어떤 때 여러 명의 걸인이 와 가족들이 먹을 밥이 모자라도 그들에게 밥을 나누어 주었고 밥을 다 먹을 쯤 늦게 오는 걸인에게 줄 밥이 없으면 엄마는 미안해 어쩔 줄 모르고 당신 먹던 밥을 걸인에게 부어주고 당신은 굶을 때도 있었다.
걸인마을에도 밥을 얻으러 갈 기력이 없는 분들도 있었다. 그 분들에게 얻어 온 밥을 나누어 주었고 배고픈 행인들이 오면 무조건 밥을 주고 잠 잘 자리가 없는 행인들에게는 잠자리를 제공했다.
그 분들이 진짜 보시를 한 분들이다. 그때 걸인마을에 살던 이들이 웅상에 살고 있는 이도 있다. 어려운 환경을 살아온 이들이라 어느 누구보다 성실한 모범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분들의 자녀들도 착하고 예쁜 모습들이다.
동냥아치들이 쌀을 얻으러 다니며 “동냥 좀 주세요”하는 소리도 날마다 들리던 소리다. 식량이 모자라 장이쌀로 꾸어온 쌀을, 가족이 단 한 번도 밥을 해먹지 않는 쌀을 동냥아치에게 쌀가마니를 풀어 동냥주는 모습을 생각하면 바보의 모습이라 해야 할지 성인의 모습이라 해야 할지 분별이 가지 않는다. 세상 인심이 변해 낯선 사람이 오면 대문도 열어주지 않는 오늘과 격세지감이 난다. 그 시절에는 대문이 없는 집이 태반이고 대문이라는 것은 삽짝이고 대문이 있는 집은 한 마을에도 몇 집이 되지 않아 대문 있는 집을 대문집이라 했다. 삽짝이나 대문이나 새벽만 되면 다 열어 놓았다.
6.25동란이 일어나 피난길에 든 그들은 먹을거리가 없어 동냥아치가 되기도 하고 6.25참전 용사들이 부상을 당해 팔다리를 잃었거나 신체부분이 훼손이 되어 노동을 할 수 없어 동냥아치가 되기도 했다. 그 시절에 각설이 타령이 등장해 각설이를 하면서 동냥을 했다. 그때 각설이 타령은 “1짜나 한자나 들고 보니 일선에 가신 우리 낭군 제대해오기만 기다린다 2짜나 한자나 들고 보니 이승만 대통령 장면 박사가 부대통령 3짜나 한자나 들고 보니 삼팔선이 갈라져서 부모형제 헤어지고 깡통생활이 왠말이냐” 하며 10짜까지 각설이 타형을 했다. 각설이 타령은 깡통을 숫가락으로 두드리며 장단을 맞추어 춤까지 곁들여 했다.
각설이 타령이 얼마나 애절하면서 흥겨웠는지 어린 시절 친구들과 때를 지어 각설이꾼이 각설이 타령을 하며 동냥하러 다니는 뒤를 따라 구경을 하였다. 낮이면 낮마다 나는 소리는 엿장수 가위 치는 소리다. 엿장수 가위는 여남집 넘어 까지 들릴 정도로 큰 소리가 났다. 엿장수는 장단의 능력에 따라 가위소리를 냈다. 어떤 엿장수는 노랫가락을 하며 가위소리를 냈다. 특권을 가진 자가 서민대중을 향해 맘대로 하는 행위를 ‘엿장수맘대로’라는 말로 인용한다. 이는 엿장수가위는 엿장수 맘대로 친다는 말에서 유래된 말이다. 엿장수는 지게에 바지게를 채워 그 위에 엿판티를 얻어 엿을 담고 고무줄 빗 바늘 등 생활용품을 지고 다니며 각종고물(떨어진 고무신, 쇠 조각, 병 등)을 주고 엿을 바꾸어 먹고 생활용품을 교환하기도 했다. 먹을거리가 귀하던 때라 엿이 먹고 싶어 고물을 주우러 다니기도 했다.
엿치기란 놀이가 있어 엿가락을 잘라 엿가락 구멍이 큰 사람이 이기는 놀이로 엿가락 구멍이 작은 사람이 엿 값을 치르는 놀이도 했다.
경상남도 도의회 박인 의원 아버지 박문수께서는 부산일보신문 지국장을 약 40년 하면서 날마다 웅상전역과 웅촌 일부지역까지 자전거로 신문배달을 했다. 그 자전거 벨 소리도 신문이 쉬는 날 말고는 날마다 울렸다. 생존해 계시면 107세의 연세다. 동래고보를 졸업하시고 지역 문화에 남다른 관심과 애착을 가지고 지역문제와 특히 지역문화부분에 관한 기사를 신문사에 자주 기고했다.
웅상 우불신사 보존위원회 회장도 역임하고 웅상문화인상도 수상하고 웅상읍지 발행에도 많은 힘을 쏟았다. 보릿고개가 가시지 않은 때라 당장 끼니 해결도 버거운 판국에 글 모르는 까막눈이 글자 아는 이 보다 더 많고 그때 신문은 한글보다 한문이 더 많아 신문구독료를 감당하기 어려웠지만 신문을 읽은 수 있는 사람도 소수였다. 한마을에도 구독자가 몇 부 되지 않은 신문을 마을 구석구석 직접 배달을 했다.
당시 학력이나 문학적 소양으로 보아 돈벌이도 잘되고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일자리를 구할 수도 있었을 것인데 굳이 돈벌이도 변변치 않고 고된 신문지국을 평생 운영한 것은 무지 몽매한 지역민들을 일깨우겠다는 일념에서 그랬던 것이다.
삼사일 간격으로 동동구리미(화장품)장수가 동동구리미 사라는 북소리가 울린다. 동동구리미 장수는 동동구리미를 큰 통에 넣어 메고 북도 메고 북을 치고 다니면서 동동구리미를 팔았다. 동동구리미를 금액 따라 들어 팔았다. 북소리가 동동하고 울려 동동구리미라 했다. 북소리 장단도 리듬 감각이 있는 사람은 북소리를 잘 내었다.
필자는 동동구리미를 생각하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울산 온산 동백섬 근처가 친정인 엄마는 동백꽃 필 무렵이면 동백섬에 동백꽃이 만발했을 텐데 동백열매 기름을 머릿기름으로 바르면 머리가 윤이 반질반질 해지는데 해마다 하는 말씀을 흘러가는 바람소리보다 가볍게 듣고 넘긴 그 말의 내용에 고향 그리는 애절함과 예뻐지고 싶은 여인의 본성이 담겨있는 내용인데 엄마는 고향도 없고 엄마는 여인이 아닌 엄마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40중반의 젊은 연세에 세상을 하직하고 나니 그제야 엄마는 엄마만이 아닌 여인 중 여인이란 걸 알았다. 평생 당신 얼굴 가꾸기 위해 동동구리미도 한번 발라 본 일이 없는 분이다. 예쁘고 싶은 여인의 본성을 가진 분에게 동동구리미도 한통 사드리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가 나를 슬프게 하기 때문이다.
해가 기울어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면 부엉이가 부엉부엉하고 울기 시작한다. 일터에서 일하는 농부들은 ‘집으로 들어갈 때가 되었으니 이제 그만 집으로 가세요’ 하는 소리와 같다. 부엉이는 우리선조들이 웅상 땅에 발을 들여놓기 이전부터 이 고장에 터를 잡고 살았을 것이다. 부엉이가 둥지를 트는 곳은 주로 높은 절벽이었다. 필자가 사는 마을 근처에서 회야강변 범살미 칭디미와 시명골 저수지 북쪽 방향이었다. 2000년경까지 울던 부엉이가 울음을 중단했다. 지금도 대운산 동편 쪽 온양 외광 가래점골에는 부엉이가 운다. 한밤중이면 여우울음 소리가 밤마다 들렸다. 이 울음소리는 1990년경까지 들리다 들리지 않는다. 의술이 발달하지 못하던 시절 유아기를 넘기지 못하고 절명하는 어린이가 많았다. 천연두, 홍역 등의 돌림병이 돌때면 한마을에 하루를 두고 몇 명의 어린이가 죽어가는 날도 있었다. 마을마다 죽은 유아들을 매장하는 지정된 장소가 있었다. 그 장소를 애장터라고 한다.
죽은 아이는 밤중에 바지개에 얹어 지게 지고가 매장을 했다. 깊이 매장하지 않고 허술하게 하기 때문에 배고픈 여우들이 아이들의 시신을 파먹기도 했다. 1960년경 까지만 해도 태어나 초등학교 입학하기 이전에 세상을 떠나는 어린이는 10%이상이 되었다. 병원도 귀했지만 치료비가 너무 비싸 병원에 가지 않고 민간요법으로 치료하는 이가 많았다. 의료보험도 없던 시절이라 투병생활을 오래하는 가족이 있는 집은 치료비 부담으로 가산이 탕진된 집이 부지기수였다. 소는 경제적 동물이라 아프면 약을 사먹여도 사람이 아프면 병원도 가지 않는 집도 많았다.
가정에 걱정스러운 일이 생기면 무당을 초청해 굿을 하는 가정이 많아 무당의 북소리와 괭가리소리가 밤새도록 나기도 했다. 굿을 며칠을 달아 하는 집도 있었고 하루저녁 간단하게 하기도 했다. 마을에 좋지 못한 일이 자주 발생하면 마을 전체에서 경비를 지출하여 마을 굿을 하기도 했다.
삼월 삼짓날이 가까이 되면 강남으로 갔던 제비가 찾아와 처마 끝에 흙을 물고와 집을 짓고 새끼를 까 키운다. 새끼제비가 나는 훈련을 하고 스스로 먹이를 구할 수 있는 가을이 되면 다시 강남으로 돌아간다. 제비가 처마 끝에서 생활하면 ‘지지베베’하고 시끄럽기도 하고 똥도 싸고 비늘도 날려 청소하기가 만만찮아도 흥부놀부전의 영향인지 아무도 제비를 귀찮아하는 집은 없었다.
여름이 되면 두레논메기(마을 공동으로 협력하는 논메기)작업하는 농부들에게 때를 알리는 신호를 나팔(영각)을 불어 알린다. 작업 시작하는 때 오전과 오후 참 때, 점심때 논메기를 마치는 때를 알린다.
시계가 없던 때라 부지런한 사람들은 뜨거운 볕과 볕에 데워진 물이 열기를 더한 논에서 땀을 흘리며 논을 메다 끼니를 넘겨 허기지고 열사병에 쓰러지는 걸 예방하기 위하여 나팔을 불었다. 영각수(나팔 부는 사람)는 나팔을 잘 부는 사람이 정해져 있었다. 나팔은 아무나 잘 부는 것이 아니다.
명동마을에 농청장원놀이 무형문화재지정 신청시 영각수(나팔 부는 사람)를 선정하기 위하여 온 마을 사람들을 다 모아 불어보게 해도 나팔소리를 잘 내는 사람이 없어 백동마을 사는 정상덕에게 영각수를 맡겨 기능 보유자로 지정되어 활동하다 지금은 세상을 떠났다. 두레논 멜 때 실제 영각수(나팔 부는 사람)는 명곡마을에서는 이찬옥(일명 이인수), 서용규 평산마을에는 최인식이 리듬을 맞추어 불 정도로 잘 불었다. 마을마다 영각수가 있었다. 나팔소리는 온 마을 전역과 인근 마을에도 들렸다. 영각은 마을사람들이 직접 제작했다. 재료는 대나무, 오동나무, 잔 새끼(짚으로 꾼 끈), 황토, 흙 등을 이용해 만들었다.
두레논메기 시작은 모심기가 끝난 후 모가 싸람(뿌리내리기)할 즈음에 마을 농청회에서는 푸짐한 음식을 준비해 놓고 전 마을 사람들을 모아 술과 음식을 나누며 협업, 영농에 필요한 임원을 선출한다. 그날 선출하는 임원은 행수, 방목감독, 보감독, 숫총각, 영각수(나팔부는이)이며 두레논메기 순서를 정하여 두레논메기를 시작한다.
이날 하는 행사를 ‘나다리 먹는다’라고 한다. 나다리란 말을 낯선 새로 들어온 머슴도 있고 아직 장정층에 들지 못하던 어린이가 성장하여 두레논메기 일원으로 들어옴을 축하, 환영하며 서로 낯 알림의 행사를 한다는 의미에서 낯 알림을 발음하다 나다리로 변형된 것이다. 신라 때 나락은 (벼)나록이라 하다 세월이 가다 나락으로 변할 것과 같다.
더운 여름이면 얼음과자를 나무통에 담아 메고 마을마다 “아이스케키”하고 큰 소리를 내고 팔러 다녔다. 봄 소풍, 가을소풍, 운동회 때도 얼음과자 장수는 반드시 따라 다녔다. 서창마을 웅상농협본점 건너편에서 박기범의 아버지 고 박이인이 얼음과자 공장을 했다. 가정사정이 어려운 청소년들이 돈벌기 위하여 얼음과자 장수를 했다. 그때 얼음과자를 팔러 다녔던 사람은 서창에사는 양산시민대상을 수상한 정상모와 서창 서부이장도 오래하고 서창동 선거관리위원장을 한 이덕환이 팔러 다녔다.
날씨 따라 들리던 소리는 대운산 넘어 동편쪽 동해 남부선(기장군 쪽)를 달리는 기차기적소리다. 맑은 날은 들리지 않고 날씨가 흐린 날 저기압일 때 기적소리가 웅상전역에 생생하게 들렸다. 일기예보가 잘 맞지 않던 시기라 기적소리가 나면 그날 밤이나 다음날 비가 오는 경우가 많아 일기예보보다 기차기적소리를 더 믿고 영농에 임했다. 이 소리가 들리지 않는 시기도 미타암 절 종소리와 비슷한 걸로 기억된다.
수시로 나는 소리는 마을에 화급한 일이 발생하거나 부역동원이나 모여야 할 일이 있을 시 징 소리로 알렸다. 징소리는 사안 따라 다르게 징소리를 울렸다. 이 후 종소리 사이렌 소리로 알리기도 하다 오늘날 방송시설이 되었다.
서창시장에 가설극장(천막을 쳐 놓고 영화 상영함)이 한 달에 한번 정도로 와 며칠 씩 영화를 상영했다. 이때 차량에 마이크를 설치하여 마을마다 다니며 영화제목 영화내용도 곁들여 소개하며 관객동원을 위하여 선전을 하고 다녔다. 영화상영은 밤에만 하였고 관람료도 받았다. 웅촌에서도 정관에서까지 걸어왔다. 인기 있는 영화가 들어오면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로 관객이 많았다. 관람객은 주로 젊은 청춘남녀가 많았다.
이때 만난 연으로 부부가 된 사람도 더러 있다. 영화구경도 하고 젊은 청춘들을 상면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간 사람도 많다. 짝짓기 할 시기가 된 어미 소의 울음소리도 자주 나고 팔려간 송아지를 이별한 어미 소는 몇 날을 그칠 줄 모르고 목메어 운다. 가족처럼 사육한 소였지만 가축은 가계유지를 위해 팔지 않을 수 없었다.
밤이긴 겨울 마실(나들이)은 먼 마을까지 다닌다. 웅상에서 걸어 정관 병산까지도 가고 웅촌 덕현, 검단, 석천, 통천, 온양, 내광, 중광 까지도 다녔다. 초저녁에 걸어가 놀다 새벽에 걸어 돌아온다. 춥고 바람이 세차게 불면 들리는 애잔한 소리, 전봇대에 걸려있는 전화선 우는 소리는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가난한 이들의 절규와도 같이 느껴졌다. 장례 문화가 변해감에 매장을 하는 이보다 화장을 하는 이가 더 많아지고 있다. 2000년 이전까지만 해도 화장을 하는 이는 간혹 있었고 대다수 매장을 했다. 마을에 돌아가신 분이 계시면 전 마을 사람들이 장례진행에 임했다. 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부고 전달도 마을 사람들이 분담하여 먼 지역까지 직접 집집이 방문하여 알렸다.
곽이며 수의 상주들이 입는 제복 모든 장례용품을 마을 사람들이 제작해 사용하였고 장례에 필요한 모든 절차도 집에서 행했다. 지금은 집에 계시나 죽음이 임박하면 병원으로 모셔가지만 그때는 병원에 계시다 죽음이 임박하면 집으로 모셔왔다. 집 밖에서 돌아기시면 길거리에서 죽는 것과 같이 객사 죽음이라 했다.
망인이 돌아가시고 출상하는 날이 열흘 이상 되는 집도 있었다. 시신을 방안에 그대로 모시고 있어 여름이면 시신이 부패해 물이 나오곤 했다. 상주는 빈소 방을 밤낮을 지키며 계속 곡소리를 내야했고 조문객도 곡소리를 내며 참배를 했다. 출상 날 상여이동시 상여꾼들의 상여소리에 온 마을사람들이 눈물을 지었다. 애절한 이런 정도 장례방법도 사라져가고 있다.
이외에도 잊혀져가는 고향소리가 너무 많다. 모심기노래소리, 베틀소리, 디딜방앗간소리, 물레방앗간소리, 대장간소리, 풍물소리, 짐승들의 소리 등 너무 많아지면 관계로 이야기하지 못한다. 창호지 한 겹으로 방안과 밖을 이루고 이웃 간에 담장은 나무로 된 울타리 이웃의 웃음소리, 짜증부리는 소리 다 들리고 지금은 먹지도 않는 하찮은 음식을 별나고 귀한 음식이라고 울타리 사이로 매일댁, 홈실댁, 백홈댁, 근동댁, 검당댁, 내광댁이라 부르며 넘겨주고 나누던 훈훈한 대화소리도 사라진지 오래다. 금번 이야기는 어느 기록에도 없는 사실들이라 필자의 기억으로 적은 글이다. 년대는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점 유념하기 바란다. |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5년 11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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