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상의 역사를 말하다(13)/웅상도로의 변천사
7번 국도는 일정때 부터 1950년 중반 경 까지 1번 국도로 전국에서 우선적으로 개설된 도로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5년 10월 16일
|  | | ⓒ 웅상뉴스 | | 웅상에 도로라는 개념의 통행로가 개설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 부터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증명하는 일은 고려시대 때 개설된 기장군 정관면 월평리에 아월역이라는 역이 있었고 울산시 울주군 웅촌면 곡천리 서중마을에 간곡역이 있었다. 두 역을 연결하는 길은 웅상을 지나야만 가능했다. 당시 역에서는 말을 사육하고 숙식을 제공할 장소를 마련하여 이를 운영할 역리원과 노비를 두었다. 왕래의 이동수단은 도보와 말을 이용했고 신분이 높은 분들의 가까운 거리 이동은 가마를 이용하기도 했지만 장거리 이동은 말에 의존하고 무거운 짐 운반은 지게나 우마차를 이용했다. 이 시절 역의 기능은 조정과 관아의 문서전달 업무와 관료들의 출장 업무를 도우고 백성들의 왕래에 도움을 주고 국가에 위급한 사항이 있을 시 급히 전달을 하고 물류이동 역할과 오늘날 역보다 더 다양한 업무를 보았다. 역에서 시육하는 말을 빌려주기도 하고 장거리 이동하는 이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타고 온 말에 먹이를 주는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에 신작로가 개설되기 시작한 것은 1910년 일제침략 이후 부터였다. 신작로 개설은 일본식민지 정책으로 개설했다. 우리나라 경제 발전을 위하고 국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함이 아니고 우리나라 자원을 수탈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졌다. 신작로를 통해 우리 백성들은 일본이 벌린 전쟁물자 공급에 탈취당하고 수많은 문화유산을 강탈당했다. 징병 징용정신대에 끌려간 것도 이 길을 통해 실려 갔다. 현 7번 국도는 일정 때부터 1950년 중반 까지 1번 국도가 되어 있었던 국도라 전국에서도 우선적으로 개설된 도로다. 신작로가 먼저 개설된 곳은 편리보다는 더 많은 수탈을 당했다. 이때 신작로는 1차선으로 개설하여 일정한 구간마다 차량이 교차할 수 있는 2차선을 개설했다. 1940년 경 차량이 간신히 교차할 수 있는 2차선으로 확장했다. 포장된 도로였지만 해방 이후 도로관리는 되지 않고 6.25동란이 일어나 군수물자 이동과정에 탱크도 그대로 지나가고 중차량과 무거운 무기와 장비들의 통행으로 포장도로는 훼손되어 비포장 상태로 되어 있다. 1963년 경 포장도로가 되었다 비포장도로 상태일 때는 도로 개보수는 도로 인접 지역민들의 부역으로 충당했다. 마을마다 도로에 지정된 관리 구역이 있었다. 마을 구역에서는 반별로 세분하여 구역을 정해 관리했다. 장마철이 되면 도로가 깊이 파여 웅덩이와 골을 이룬 곳도 많았고 흙과 자갈이 차량타이어에 밀려 두둑을 이룬 곳도 많았다. 웅덩이와 골은 하천에서 자갈을 지고 와서 메우고 높은 두둑은 낮추는 작업을 했다. 도로변 하수구 정리 작업, 도로변 풀베기 작업도 지역민들이 다 했다. 인력으로 감당하기가 버거운 처지가 될 때면 불도저가 도로바닥을 고루기도 했다. 그때도 부산-울산을 오가는 버스가 있긴해도 장시간 기다려야 하고 시간도 질정이 없어 멀리 가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버스를 이용했지만 동면 법기, 개곡, 정관, 임곡, 두명, 월평, 웅촌, 검단, 하대, 삼동, 작동 등지에서 서창장을 이용하는 사람들이나 개운중학교를 통학하는 학생들도 대부분 차비를 아끼기 위해 걸어 다녔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은 맑은 날보다 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비가 오는날도 우의도 없이 비를 그대로 맞고 다닌 사람도 많았고 우의가 있긴 해도 삿갓이나 포대(자루)를 뒤집어 쓴 것이 우의였기에 우의를 이용해도 비에 적기는 같았다. 비가 오는 날이나 비온 뒷날은 도로에 웅덩이가 된 곳이 많아 차량이 지나가면 흙탕물이 튀어 걸어가는 행인은 온통 뒤집어쓰게 되고 가뭄이 계속되면 먼지가 날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고 숨을 쉬지 않을 수도 없고 먼지도 어지간히 마셨다. 당시 도로변에 사는 집들은 먼지때문에 하루에 몇 번씩 마루청소를 해야 할 정도로 먼지가 많이 날렸다. 1963년경 부분적으로 도로 확장도 조금하고 도로위치도 지나친 곡선부분은 변경시켜 도로포장 공사를 했다. 포장은 하긴해도 얼마나 허술하게 했던지 포장을 하고 몇 달 뒤 부터 계속 보수 공사를 했다. 1985년 경 4차선 확장공사를 했다. 덕계 지역도로는 당초 계획에는 마을 중심으로 통과하는 기존 도로를 따라 확장할 계획이었으나 덕계동 사는 이석모가 앞장서 주민들과 협력하여 마을 동편쪽 현도로 위치로 우회 하도록 해 달라는 진정서를 제출하고 부산지방국토관리청과 관계기관을 여러차례 방문하여 설계 변경하여 현 도로 위치로 개설하였다. 당초 계획을 변경하여 우회도로를 개설한 것이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도시형태가 된 마을 중간에 고속도로와 같은 도로가 생기면 도로 종서로 마을은 별개 마을이 될 수 밖에 없다. 명곡마을을 지나는 도로는 국토관리청 당초계획은 기존도로를 우회하여 명곡교량 서편쪽 난들에서 세정마을과 회야강 서편쪽에서 벌들 중심부를 통해 외홈마을 웅상중앙병원 서편쪽 현 도로와 연결되도록 계획되었다. 벌들 경지 정리가 완공된지도 얼마 되지 않는다고 일부 벌들 농지 소유자들의 적극적 반대로 기존 도로 따라 변경되었다. 필자의 마음은 국토관리청이 당초 계획대로 추진하자고 주민들을 선동하고 싶었지만 이웃간에 불화음이 날 것 같아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명곡을 통과하는 현 도로는 언젠가는 국토관리청 계획대로 도로 개설이 되어야 할 일이다. 서창마을 구간도로는 마을을 벗어나 현행 도로로 계획되어 계획대로 개설되었다. 서창 우회도로 개설도 참 잘된 일이다. 웅상읍이 4개동으로 분동되고 출장소가 개설됨으로 7번국도 유지관리를 양산시에서 하게 됨으로 인하여 도로 확장과 유지관리상 소요되는 경비를 모두 양산시가 감당해야 한다. 2004년 경 이부건, 박일배 시의원은 오근섭시장에게 강력하게 요청하여 웅상구간 7번국도를 4차선에서 6차선으로 확장하기로 시에서 예산 편성하여 시의회결의회에 의하여 예산 확보는 기채(지방자치단체에서 빚을 얻는일)로 800여억원이 소요되는 엄청난 일을 해내었다. 당시 출장소장 손기랑도 힘을 많이 쏟았다. 서창, 덕계 도심 도시계획도로 개설을 우선으로 하고 마을마다 도시계획도로 개설에도 박차를 가했다. 이를 다 열거하려면 지면 부족으로 제일 많은 예산이 소요되고 가장 폭이 넓고 길이가 긴 광로 3-3호선(덕계에서 평산, 주진, 백동, 소남, 주남을 통과하는 도로)에 관하여 이야기 하고자한다. 2005년 경부터 2010년까지 투입된 예산이 800여억 원이 소요되었다. 2005년 한해 동안 투입된 예산 400억이 넘는다. 토지구획정리조합과 시의예산으로 도로공사를 해도 아직 미개통구간이 남아 있다 조속하게 전 구간 개설 되도록 해야한다. 비슷한 시기에 건립된 웅상문화체육센터는 양산시가 건립한 단일 건물로서는 양산시가 생긴이래로 가장 많은 예산이 투입된 건물이다. 400여 억원이 소요되었다. 단 시일내 이런 엄청난 예산을 투입할 수 있었던 힘은 뚝심있고 추진력 있는 오근섭 시장이 있었고 지역 미래를 내다보고 시장과 시의회의원들을 설득할 수 있는 힘과 열정을 가진 이부건, 박일배 시의원이 있었기에 해낼 수 있었다. 부산시내 버스는 1960년 말경 영천까지 오다 1975년 경 월평까지 연장운행하다 1980년 경 서창까지 왔다. 2014년 용당마을에 종합터미널이 설립되어 용당까지 운행하게 되었다. 울산시내 버스는 1980년 경 서창까지 오다 1990년 경부터 노포까지 운행하게 되었다. 웅상에서 부산, 울산까지 통학과 출퇴근 과정의 애환은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사연들이 많다. 부산시내버스 요금체계가 2000년 경까지 부산시 기장군 정관면 경계지점인 지경고개만 넘으면 추가요금(할증 요금)을 더 내게 되었다. 날마다 통학과 출퇴근 하는 서민대중의 경제적 부담은 간신히 꾸려가는 가계를 더 힘들게 하여 할증요금을 취소해 줄 것을 양산시청, 경남도청, 부산시청 버스회사를 방문하기도 하고 서면상으로 오래동안 수십차례 요청했지만 시정이 되지 않았다. 박일배 시의원은 시내버스 할증요금 철퇴를 선거공약으로 내걸고 지역민들과 협력하여 철회를 위하여 갖은 힘을 다해도 잘 되지 않았다. 전국 할증요금 부담지역의 선례를 다 알아보고 시내버스 요금체계에 관한 규정과 제반 사안을 연구하여 부산시와 양산시 경계지점인(양산 동면과 기장군 철마면)부산우유앞 할증요금 경계지점으로 지정된 사안을 부산시와 양산시의 또 다른 경계지점인 양산웅상과 기장군 정관면과 경계지점인 지경고개로 옮겨 설정해 줄 것을 요청하기 위하여 건교부를 직접 방문하여 관련 부서 책임자와 협의하여 할증요금을 철회 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여 건교부에서 부산시와 양산시와 관련부산시내 버스에 시행토록 동보하여 추가요금을 물지 않도록 되었다. 할증요금 철회는 박일배 시의원이 이루어 내었다. 국민이 보호 받을 수 있는 제도가 있음에도 보신주의로 업무를 처리하는 공무원의 자세로 국민이 피해를 보는 사례가 더러 있다. 2000년 말경에서 2000년 초반 경까지 웅상관내에는 5개 조합이 토지구획정리사업을 했다. 토지구획정리조합에서 도로개설에 많은 기여를 했다. 토지구획정리조합에서 개설한 도로가 많지만 경주 벚꽃길과 흡사한 벚꽃길을 조성한 도로만 소개한다. 북부 7번국도에서 대동이미지 앞을 지나 화성아파트 앞과 석호가람휘아파트 앞을 지나 명동마을 소방파출소 앞 7번 국도와 연결하는 4차선 도로와 접한 간선도로 전부를 토지공사와 토지구획정리조합에서 개설했다. 이 도로와 연결된 에이원골프장 진입로의 당초계획은 덕계에서 외산을 경유하여 매곡으로 진입할 계획이었으나 도로에 편입되는 토지 소유자 몇 사람의 토지매입이 되지 않아 명동으로 전입하게 되었다. 명동을 통해 도로를 개설하게 된 것은 명곡토지구획정리조합의 요청에 의하여 개설하게 되었다. 명동토지구회정리조합에서는 에이원에 아무런 댓가 없이 에이원골프장에 진입하는 사업지구 내 도로를 우선적으로 시공해 사용토록하고 나머지 구간 도로에 편입되는 토지 소유자들에게 1차 감정가대로 보상받고 협의승락하는데 협조를 해 단 시일에 별 어려움 없이 도로를 개설하였다. 이 도로는 에이원골프장 진입로만 사용되는 도로가 아닌 덕명로(덕계-외산-명동을 연결하는 도로)가 되었다. 덕명로 중간지점에서 웅상에서 가장 큰 양로원인 성요셉의 집까지는 1km 진입로를 개설하는 과정에 대부분의 토지지주들은 무료로 도로개설 사용승락을 했다. 이런 협조를 구할 수 있었던 것은 명동마을 분들의 열린 마음과 당시 이장이었던 이자무의 적극적인 협조와 성요셉의 집 설립자 이석순여사의 천사 같은 생활자세에 감동한 존경심의 결과이다. 양로원이나 어려운 사람들의 보호시설을 개설하려고 하면 극렬한 반대를 하는 것이 보편화 된 시대에 명동마을 주민들 같은 이들이 있다는 것은 살만한 세상이라는 걸 증명하는 일이다. 벚꽃길 조성과정은 시에서 인가된 가로수식재수종은 담당공무원 기분대로 선정하였는지 시장의 지시인지 10가지도 넘는 수종을 식재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토지구획정리조합에서는 시장과 협의하여 북부마을에서 에이원골프장까지 같은 수종 벚꽃을 식재하자고 건의하며 설계변경을 해 7km가 넘는 벚꽃길을 조성하게 되었다. 벚꽃길조성 경비도 토지공사와 토지구획정리조합과 에이원골프장에서 감당했다. 가로수 식재 과정에도 공무원의 안이한 자세가 아닌 적극적이고 거시적인 의지가 요청된다. 토지구획정리사업을 원활하게 추진하고 있는 과정에 청천벽력 같은 일이 발생했다. 토지구획정리사업에 편입 된 토지를 매도한 지주들에게 엄청난 세금이 부과되었다. 작게는 몇 천만원에서 많은 집은 여러 수억원 인 집도 많았다. 세금 부과의 부당성을 항의하기 위하여 금정세무서 담당직원부터 세무서장도 여러차례 만나고 국세청까지 찾아가 관련부서와 국세청장까지 면담해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 세금 납부기일이 지나자 납세대상들의 재산을 압류하고 경매절차를 밟는 순간까지와도 끝까지 싸워보자며 아무도 세금을 납부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웅상주남 출신이며 부산 부곡동에서 세무 회계 사무실을 경영하고 있는 이규건 세무사의 친절하고 성의있는 자문을 받아 한편으로는 행정 소송 준비도 하고 한편으로는 정치적 해결 방안을 찾았다. 한나라당 경남도당부위원장 이부건을 통해 지역출신 국회의원으로 재경위원장이며 전국세무사회 회장 나오연의원에게 해결책을 호소하였던바 세무서에서 적용한 규정유권해석을 국회에서는 부관된 세금은 부당하다는 해석의 문서를 받고 부과된 세금 전부를 물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물적,정신적,시간적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앞서 몇 가지 사례를 보더라도 공무원의 자세가 국민생활에 막대한 손익을 보여줄 수 있다는 사례다. 웅상의 끝자락에 위치한 용당주민들은 많은 서러움을 당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용당에서 선대 때부터 거주하고 있는 이승갑은 공사석을 통해 목소리를 가장 높인다. 용당은 웅상에 전기가 들어 올때도 가장 늦게 들어왔고 울산시가 회야땜 수원보호라는 명분으로 회야강 주변 환경 보존지역 지정시에도 용당부터 가장 먼저 지정하고 웅상전역을 환경보존지역으로 확대지정한 후 웅상전역을 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 할 것을 계획하고 추진하는 과정에 박봉수와 전종태가 대표가 되어 용당주민들이 주축이 되고 지역민들이 물적, 인적 협력하여 사력을 다해 해지하게 되었다.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김동주의원 같은 의원이 아니였다면 웅상전역은 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옛 촌락마을 상태로 보존되었을 것이다. 부산시내 버스가 온 것도 서창까지 온 후 20여년 넘어서야 용당에 오게 되었다. 회야강정비사업으로 서창 회야강변에 있었던 부산시내 버스 정류장 이전이 불가피하여 명동화성아파트 인근에 삼신교통에서 종합터미널 조성부지까지 매입하고 추진하다 화성아파트 주민들의 반대투쟁위원회(투쟁위원장 이윤대)를 결성하여 강력하게 추진하다 보니 마땅하게 갈 곳이 없어 고민하는 처지에 용당주민들이 용당에 유치할 수 있는 여건 조성을 해 나동연 양산시장과 시의원들이 협력으로 2014년 종합터미널을 조성하게 되었다. 7번 국도 4차선을 6차선으로 확장하는 공사도 덕계에서 서창까지는 되고 서창에서 용당까지는 아직 확장이 되지 않았다. 용당에는 교통량이 적고 예산이 부족하여 시공하지 못했다한다. 시의 고충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용당이 받아 온 서러운 한도 있고 출퇴근 시간에 용당의 차량체증현상은 집중호우를 감당하지 못해 넘처나는 하수구와 같은 현상이 되어 우불신사 앞 도로와 편들마을 앞 농로도 교통대란이 일어난다. 7번 우회국도 램프가 용당에서 설치 공사중이다. 램프로서는 교통량을 소화시킬 수 없는 주변 여건이다. 이에 대한 대책을 조속히 강구해야 할 일이다. 웅상주민들중에 자동차 전용도로는 고속도로와 같은 기능을 하는 도로라 웅상으로 통과해도 소음과 매연만 풍기고가지 웅상발전에 기여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도시계획도로처럼 접속도로를 개설 할 수도 없고 램프로만 진입이 가능하다. 이런 의견도 일리는 있지만 도심을 향해 지나가는 교통량을 절대 절감하는 충분한 효과는 있을 것이다. 7번 국도는 부산에서 웅상을 지나 동해안을 따라 울진, 강릉, 금강산, 함흥을 지나 러시아를 횡단해 유럽을 통해 지구를 한바퀴 돌 수 있는 도로가 될 예상이다. 남북통일은 꼭 되어야만 하고 언젠가는 될 것이다. 전 민족의 염원이 담긴 통일시대를 여는 도로가 될 것이다. 덕계램프 명동램프도 웅상도심의 교통량이 편리하고 경제적으로 이용하도록 정비해야한다. 7번 우회국도는 당초계획은 웅상서편 천성산 자락으로 개설하도록 계획하였고 주민들의 바람도 같았는데 천성산 지하에는 KTX전철선로가 개설되어 있고 산자락에는 광도로3-3호선이 계획되어 있어 도로가 중복되어 동편 대운산쪽으로 변경 계획하게 되었다. 7번 우회국도 웅상 전 구간 중 절반은 대운산 지하터널도로이고 3개 램프 인근지역이 지상으로 노출된다. 잘한 일인지 못한 일인지 역사가 심판할 일이지만 천성산 지하터널 KTX선로공사시 지율스님의 단식투쟁과 환경단체의 공사 반대투쟁으로 물적, 시간적 손실이 엄청 발생되었다. 대운산 터널도로 공사에는 극력하게 투쟁하는 개인도 단체도 없고 화성아파트에서 소음, 매연, 시각적 공해를 우려하여 부분적 선로를 변경하여 줄 것을 요청하여 설계 변경 검토를 하는 걸로 알고 있다. 고대 때 북방민족이 웅상웅촌지역에 내려와 살았던 흔적이 있다, 웅촌 뒷골에 돌무덤이 형성되어 있다. 돌무덤의 장례 방법은 고구려와 북방계의 장례방법이다. 어떤 방법으로 이동해왔는지 기록이 없어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추정하건데 경사도가 완만한 7번 국토가 개설되어 있는 인접지역의 동해안을 따라 유목생활이나 어로 행위를 하며 남하 하였을 것이다. 7번 국도는 우리선조들이 이동했던 길 따라 형성되었다. 이상적 도시는 도로 점유비율이 높은 도시이다. 기존 계획된 도로도 예산확보를 하여 개설해 가야하고 필요한 곳에는 계속 도로가 개설되어야 한다. 이 일은 예산보다 인적자원이 우선되어야한다. 뜨거운 열정이 넘치는 우리 이웃중에 발굴해야한다. 그래야만 지역미래가 보장된다. 향토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이웃이 해가야 한다. 김양수, 허범도, 박희태 현직에 있을 때는 지역걱정을 어쩔 수 없이 했는지 몰라도 그 전에도 하지 않았고 지금도 앞으로도 우리지역은 잊어 버렸다. 이번 이야기는 문헌을 전혀 참고하지 않고 필자의 기억으로 적었다. 년대와 금액 등은 약간의 차이가 날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주시기 바란다.
 |  | | ↑↑ 박극수 (현)양산문화원 이사 양산시 향토문화연구회 감사 | ⓒ 웅상뉴스 | |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5년 10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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