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상의 역사를 말하다(12)웅상의 근대교육사
개운중학교가 설립되지 않았다면 현 60대 이상은 대다수 국졸학력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5년 09월 25일
당시 일제의 가혹한 식민지 차별 교육정책으로 우리민족은 교육의 기회를 상실하여 문맹자가 증가하였다. 대한민국을 통치한 일본정부는 문맹자의 증가가 많이 되어야 민족 역량을 약화시키게 됨으로 우리나라를 문맹국을 만드는데 그 목표를 삼았던 것이다. 당시 공립 보통학교는 수용능력이 제한되어 있고 학비부담으로 농민, 노동자, 빈민들은 갈 수가 없었다. 1920년대 전국각지에 뜻있는 젊은이들이 야학을 설립하였으나 민족주의 색채가 강하다하여 탄압에 의해 문을 닫게 되었다. 계획적인 ‘한국인 우민화 정책’으로 1930년대에 문맹자는 전국의 80%에 해당하였다. 1960년경에만 해도 교육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한 사람이 많아 한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웅상지역의 경우 일제 식민지 정책에 따라 일본 충성심을 세뇌시킬 목적으로 역사도 언어도 글도 빼앗고 일본 역사와 언어, 글을 가르치는 최초로 조선교육령에 따른 관제학교로 1927년 9월 10일 4년제 보통학교가 설립된다. 현재 웅상초등학교의 전신인 서창공립심상소학교이다. 이 학교를 졸업한 학생은 능력에 따라 인근 웅촌면에 있는 6년제 보통학교인 웅촌공립보통학교(현 웅촌초등학교)나 영천공립보통학교(현 영천초등학교)로 편입했다. 서창공립심상소학교는 1937년 1월 20일 6년제로 전환됐다. 1939년 5월 3일 4년제 학교 설립인가로 인해 덕계간이학교가 설립 돼 학령기를 넘긴 학생을 입학, 수료시켜 서창공립국민학교로 편입하게 했다. 덕계간이학교는 1943년 4월 1일 6년제로 전환 돼 덕계공립국민학교(현 덕계초등학교)가 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중학교 이상의 학교는 웅상지역에 설립되지 않아 진학을 위해 대부분 사람들은 울산공립농업학교로 진학했다. 특히 교육에 대한 웅상지역민의 열망을 보여주는 사례로 서창국민학교 설립과정을 들 수 있다. 서창국민학교(현 서창초등학교)는 1946년 6월 1일 학교 설립인가를 받아 1946년 11월 19일 3개 학급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지역민들이 협력하여 허술하게 지은 건물이라 1950년 2월 25일 교사(건물) 사용불능으로 교지를 개운중학교에 양도하고 현 소재지로 이전 했는데 그 당시 학교육성회 김희조 회장이 자신의 토지 500평을 학교에 기부하고 윤일규는 54평, 박경덕은 65평, 정경주는 218평의 부지를 기부해 학교 설립에 기여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행정과 지역주민 모두 학교의 정상적인 설립과 운영이 가능하도록 앞장섰다. 1950년경 국가가 온통 혼란 속에 빠져 있을 무렵 정부는 기존학교 운영에도 진땀을 흘리는 판국에 신설학교 설립을 아예 엄두도 내지 못하는 시기에 임상수는 현 웅상출장소 부지인 자기 소유 토지를 기부하고 사재로 학교 건물을 지어 2년간 수업을 하다 현 개운중학교 위치로 이전 하였다. 이전 과정상 모든 경비도 임상수의 사재로 충당하였다. 부지 조성과 건물건립 인력 충당은 학생들의 자진해서 나서는 노동력이 절대적이었다. 건물완공시기까지 학생들은 공부하는 시간보다 건물 건립에 투입된 시간이 더 많았다. 당시 웅상지역에 거주한 현재 60대 이상 사람들은 개운중학교가 설립되지 않았다면 최종학력이 국졸이 대다수였을 것이다. 지역에 중학교가 있다 보니 간신히 중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수업도 연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1951년경에는 웅상초등학교와 덕계초등학교는 피난민의 수용소가 되고 국군 병원이 되어 수업을 하지 못한 때도 있었다. 한편 정식 학교는 아니지만 1969년 1월 30일 전종태는 소남마을에 웅상재건중학교를 설립해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학교를 진학하지 못하는 향학열이 높은 학생들을 수용하여 일체의 학비 부담 없이 교육을 시켰다. 교사는 우리 지방출신으로 현직에 재직한 교사나 교사능력이 있는 이들이 무급 봉사하였다. 재건중학교를 수료하고 검정고시를 통해 고등학교 진학한 학생도 있고 지역발전에 기여한 이도 많다. 지역민의 소득이 증대하고 중학교 의무교육이 됨으로 재건중학교는 폐교되었다. 1927년 웅상초등학교가 설립되기 전까지나 설립된 후에도 교육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정사와 서당이 있긴 해도 그토록 활발하지 못했다. 그때 가장 시급한 문제가 끼니를 해결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마을에 교육을 할 만한 곳이 없었다는 게 교육을 받지 못한 중요한 요인이다. 그 시절 주민들 사이에 마을별 자랑거리로 말하면 용당가서 양반자랑하지 말고 명곡가서 목수자랑 하지 말고 소남가서 약 자랑 하지 말고 백동가서 글 자랑 하지 말고 매곡가서 힘 자랑 하지 말라는 말이 나돌았다. 웅상초등학교가 설립된 이후에도 서구식 학문에 대한 불신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 1920년대에 출생한 자녀들도 서당에 보낸 사람들이 많았다. 백동에 정사가 있고 소남에 서당이 있어 그곳에서 배운 학동들이 많았다. 또한 초등학교가 설립되고도 공납금이 부담스러워 학교를 보내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 1950년 6월 1일부터 초등학교 의무교육이 시행되고 난 후에 교육 수혜자들이 부담하는 교육비가 많이 절감되었지만 월사금이라는 일정한 금액을 부담케 하여 이마저 감당치 못해 아예 학교를 가지 못하거나 학교를 다니다 중도 퇴학한 사람도 많았다. 공납금을 납부기간까지 납부하지 않고 밀리게 되면 선생님은 미납된 학생들을 교단 앞에 불러 세워 심한 꾸지람과 매를 들기도 하고 집으로 돌려보내기도 했다. 돌려보내진 학생들은 집에 가도 돈이 없다는 사실을 너무 뻔하게 알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곳에 한참 숨어있다가 다시 학교 교실로 돌아갔다. 선생님이 “집에 돌려보내도 왜 공납금을 가져오지 못했냐?”고 야단을 치면 “집에 가도 부모님이 계시지 않아 논밭으로 아무리 찾아봐도 만나지 못하고 그대로 왔다”고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 제때 공납금을 납부하지 않으면 온갖 수모를 당했다. 공납금을 미납한 학생들에게는 월말고사나 기말고사 시험도 치르지 못하게 하고 전 과목 0점 처리하기도 했다. 담임선생님의 수납 한계를 느꼈다는 판단에서인지 서무과장이 전교생이 모인 아침조회시간에 미납자에게 조회시작 때부터 조회가 끝날 때까지 앞자리에 불러내어 세워놓은 모독적 체벌을 하기도 했다. 거꾸로 메달아 놓은 고통보다 더한 체벌이다. “너희들 때문에 우리 반이 월사금(수업료) 납부실적이 전교에서 제일 꼴지 반이 되었다”는 선생님의 안타까운 심정도 헤아릴 수 있지만 전교에서 제일 늦게 어렵사리 마련한 월사금을 부모님으로부터 받아가면서 월사금 마련을 위해 며칠 밤잠을 이루지 못해 한숨만 지새운 부모님 마음을 생각하며 많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뒤에 안 일이지만 월사금 납부실적이 선생님의 근무평점에 적용되었다 한다. 가난한 자녀가 있는 반은 선생님의 뜻이나 근무자세와 관계없이 억울함을 당했던 것이다. 그 시절에도 장학제도가 있긴 해도 수혜 받는 학생은 극소수였고 학교를 다닐 수 있는 첫째 조건은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 보다 초등학교나 상급학교 간에 공납금을 납부할 수 있는 능력여부가 가장 우선되었다. 교실이 모자라 여름에는 나무그늘 밑에서, 겨울에는 양지바른 곳으로 옮아가면서 수업을 했고 눈비가 오는 날은 수업도 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학용품은 질도 떨어졌지만 이마저도 구입할 사정이 못되어 미술시간에 크레용 도화지를 못 가지고 오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연필도 손에 잡히지 않는 몽땅연필을 대나무에 끼워 쓰기도 했다. 어쩌다 몽땅연필이나 지우개가 교실 마루바닥이나 나무옹이 틈 사이로 빠지기라도 하면 교실 밖 마루바닥 공기창을 통해 간신히 기어들어가 캄캄한 바닥 밑을 배를 깔고 기어 다니면서 찾았다. 교과서도 유니세프 원조에 의하여 인쇄와 제본이 되어 공급되었지만 무료로 공급되지 않고 책값을 부담하게 하여 책값을 감당치 못해 상급생들에게 책을 얻어 사용하고 헌 책방에서 구입해서 사용하는 학생도 많았다. 급식소 운영은 미국이 원조한 잉여 농산물 강냉이 가루로 죽을 끓여 도시락을 지참하지 못하는 극도로 사정이 어려운 일부 학생들(전체 학생 중 10%정도가 되었을 걸로 안다)에게 배식했다. 급식대상자를 담임선생님이 공정하게 선정한다고 했지만 가정사정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고 한정된 강냉이 가루로 추가 선정할 수도 없는 사정이라 급식대상자로 선정이 되지 못한 학생 중에는 도시락을 싸올 형편도 못되고 아예 점심을 굶은 학생들도 많았다. 급식소에서 급식 받는 학생들도 걸인 된 심정으로 받으며 먹었고 점심을 굶어야하는 학생들은 학교에 옥수수죽을 끓이는 구수한 냄새가 진동하여 배고픈 학생에게 더 배를 고프게 했다. 급식제공을 받는 학생들은 허기진 배를 채웠는지는 몰라도 ‘마음의 허기’는 훨씬 더했다. 세상에 배고픈 서러움이 가장 큰 서러움이라 해도 급식 받기위해 줄을 서 구걸하는 처량한 그 심정은 당해보지 못한 이는 모른다. 이런 열악한 교육환경 속에서도 뜻있는 젊은이들이 학업과 생업에 종사하면서 어려운 시간과 지친 몸을 이끌며 아무런 대가 없이 순수한 봉사로 학교 교실이나 마을회관을 빌려 글 모르는 이들을 모아 밤에 한글과 한문을 가르쳤다. 글을 가르치는 것보다 이들에게 배움의 의지를 가지게 하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필자가 사는 마을에서도 여러 차례 야학을 개강하였지만 오래 지속하지 못하고 명동교회 전신인 ‘명곡교회’에서 오랫동안 야학을 개강하여 중학교에 가지 못한 사람들을 모아 중학교과 과정을 가르쳤다. 강사들은 명곡교회 전도사와 그의 친구들이었다. 사명감에 불탄 강사들은 정규학교에 뒤지지 않는 실력이 되도록 지도했다. 박정희 정권이 주창한 내용 중에도 경제개발보다 우선으로 한 문맹퇴치(글 모르는 이 없게 하자는 운동)라는 국정중요현안으로 농촌마을마다 4H다 청년회에서 문맹퇴치에 앞장설 것을 촉구하여 교육의 중요성을 전 국민에게 강요시켜 교육선진국으로 발돋움하는 초석을 이루었다. 1930년대에서 1950년 이전에 출생한 이들 중에서 젊은 시절에 무지한 국민을 일깨우기 위해 헌신한 이들이 많다. 대학생들의 방학 농어촌 봉사활동에도 문맹퇴치 운동이 필수적인 계획이 되었다. 1960년 1970년경 농촌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개발을 위하여 마을단위나 몇 개 마을단위로 문고 설치를 하고 책을 기증받기도 하고 돌려보기도 하는 독서회를 조직했다. 교과과목에만 얽매어 기계처럼 사는 오늘날 젊은이들의 모습보다 학력은 훨씬 부진했지만 지난날의 젊은이들이 더 인간적이고 정적인 감성과 문학적 소양을 갖춘 것은 교과과목에만 전념하는 오늘의 젊은이보다 다양하게 많은 책을 접하며 살아간 결과가 아닌가 싶다. 웅상에서도 글 읽기를 좋아하는 젊은이들이 모여 웅상독서회가 조직되어 매주 한 권 이상의 책을 읽고 토론회도 가지고 독후감을 제출하며 ‘초롱’이란 주간 회지를 발행했다. 수록한 회지 내용은 독후감 위주로 하고 부재도 더욱 성실한 자세로 임하여 개인과 국가발전에 일조를 할 수 있는 애국시민이 되자는 다짐과 더 많은 독서생활로 선진의식을 가진 나라를 만들어 가는데 젊은이들이 앞장서자는 내용이 주된 내용이었다. 필자도 졸필이지만 글을 쓸 수 있는 위치가 된 것도 그때 쌓은 내공의 덕이라 생각한다. 세계에서 가장 무지한 국민을 가진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교육선진국으로 우뚝 설수 있게 된 것은 우연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무지가 한이 되어 이 한을 씻기 위하여 죽을힘을 다한 결과이다.
 |  | | | ↑↑ 시인 박극수 (현)웅상지 편집위원장 전 웅상농협 조합장 웅상주부합창 단장 천성산문학회 회장 | ⓒ 웅상뉴스 | | |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5년 09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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