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상의 역사를 말하다(10)
그때 그 시절, 교동댁은 어떻게 살았을까 -결혼 다음날 남편은 6.25동란에 끌려가고 한평생 시집살이-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5년 08월 20일
그 시절의 며느리이자 아내, 어머니였던 교동댁이 태어난 곳은 학성이씨 시조 충숙공의 11세손이 선대 때부터 거주하던 울산군 농소면 원지, 학성이씨 집성촌을 이룬 온양면 외광리 교동마을이었다. 엄한 양친 슬하에 두 오빠와 두 언니를 둔 5남매 1933년 5월 17일 외광리 438번지에서 출생하여 열 살 정도까지 자라 같은 마을 413번지로 가족을 따라 옮겨 성장했다. 집성 문중을 이루는 마을에 살면 문중 분들의 보호를 받는 면도 있지만 철저한 감시 감독 속에서 일상 행동거지가 바르지 못하면 길거리에서도 금세 질책을 당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 헤픈 웃음도 크게 소리내어 웃지 못했다. 교동댁은 예의범절도 남다르고 항상 몸가짐이 여성스러운 모습이라 인근에서 칭송이 자자한 규수였다. 교동댁은 18세 꽃다운 나이가 되었을 때 박희수(당시 나이에 웅상읍 명곡리 476번지 울산 박씨 댁 박시언의 장손이며 박영호의 5남 4녀 중 장남 박희수(당시 21세)와 결혼했다. 첫날밤을 지낸 다음날 남편은 6.26동란에 끌려가고 교동댁은 시조부님(71세) 시조모님(61세) 시아버지(40세) 시어머니(41세) 시동생(14세, 12세, 7세) 시누이(18세, 9세, 3세, 돌이 지나지 않은 1세) 등 모두 13명의 가족과 한집에 살았다. 그 시절, 시집살이하는 모든 며느리들이 절대적으로 지켜야 했던 수칙이 있었다. 보아도 보지 못하는 눈 봉사 3년, 들어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 3년,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벙어리 3년. 시집온 색시들이 다 감당해야 하는 일인지라 당연하게 행해야 될 일이었다. 교동댁도 마찬가지. 묵묵히 시집살이 했다. 대가족 삼시 세끼 마련도 예삿일이 아니었고, 비누도 귀하던 시절 빨랫감만 해도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가족들이 가사 일을 많이 도와주긴 했어도 일은 해도 해도 밀리기만 했다. 낮엔 힘이 부치도록 일하고 밤늦게까지 길쌈하고 새벽에 일어났다. 몸은 고되고 잠이 부족해 앉기만 하면 잠이 왔다. 온 가족 고무신만 씻어도 2시간 이상이 걸렸다. 전쟁에 끌려간 남편은 소식도 없고, 군에 간 사람들의 전사소식은 쉴 새 없이 들려왔다. 교동댁은 외줄 타는 마음으로 나날을 보내어도 한숨도 마음 놓고 쉬어보지 못했다. 아무도 몰래 조상님, 해님, 달님, 별님, 당산할매, 할배, 용왕님, 산신령님 등 빌 수 있는 곳이라면 빌고 또 빌었다. 시집 온 그해 시조부님이 병고에 시달리다 별세하시고 큰 시누이가 시집을 갔다. 시조부님 3년 상을 치뤘다. 생존시와 같이 빈소에 정성스럽게 밥상을 차려 삼시 세끼 상석을 올리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는 삭망을 모셨다. 끼니때마다 밥 색깔도 다르고 반찬 가짓수도 다른 밥상을 다섯 상을 차려야 했다. 어른들 밥상에는 가능한 생선이라도 얹도록 노력했지만 일반 서민들은 평소에 생선을 접하기가 어려워 서창 시장 파장에서 가격이 싼 생선이라도 사와 전 가족이 먹을 수 있게 가족 수대로 토막을 내어 익혀 감나무 잎에 싸 배분했다. 식구가 많다보니 한방에서 밥을 먹을 수가 없어 겨울에는 두 방에서 먹고, 여름에는 마루와 마당에서 먹었다. 식사도중에 많은 식구들의 잔심부름을 하느라 부엌까지 왔다 갔다 하다보면 밥을 먹었는지 굶었는지 모르고 밥 때가 지나갔다. 마침내 휴전이 되고 남편은 성한 몸으로 제대를 했다. 교동댁은 포탄과 총알이 빗발치는 속에서 남편 생명을 부지해 준 천지신명께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몸이 뼛가루가 되는 한이 있어도 참고 견디리라 다짐했다. 남편의 말에 의하면 격전시 전우들이나 적군들이 너무 많이 죽어 살아 제대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어차피 전쟁에서 죽을 몸, 무엇 때문에 죽어 가는지 무엇 때문에 상대를 죽이는지 모르는 전쟁, 처절한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는 고통으로 연명하느니 차라리 빨리 죽어버리거나 요행히 팔다리가 잘려 후송돼 제대할 수 있는 영광이 따를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남편은 수많은 적과 아군이 바로 눈앞에서 빗발치는 총격전을 벌이고 있는, 여기저기 포탄이 떨어지는 판에 참호 속을 벗어나 총알을 맞기 위해 두 팔과 다리를 벌리고 오랫동안 서 있었다. 그럼에도 총알이 모두 남편의 몸을 피해가고 죽지 않으려고 참호 속에서 고개도 들지 않고 숨어 있던 전우들은 포탄에 맞아 몰살을 당했다. 남편은 죽기 위해 참호 속에서 벗어났지만 오히려 살았다. 이는 필시 누군가 지켜주신 분이 있었기에 총알을 맞고자 해도 맞지 않았을 것이다. 교동댁은 큰 아들을 가졌다. 무거운 몸이 되니 모든 일들이 더 힘겨워졌다. 농사는 마을에서 중동이상 되었지만 식구가 많아 소비하는 식량도 많고 씀씀이가 많을 수밖에 없어 남들은 부잣집이라고 했지만 궁핍한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식량과 학비 등을 감당하기 어려워 시래기밥, 무밥, 잡곡밥, 보리밥을 해 먹으면서 어른들 밥그릇에는 쌀 섞인 밥을 드리고 그 이외 가족은 험한 밥을 먹었다. 큰 아들을 낳고 일년쯤 있다 막내 시동생이 태어났다. 시어머니는 젖이 모자라 아들과 시동생에게 젖을 나누어 먹여야 했다. 시동생에게 먼저 젖을 빨리고 난 후 아들에게 젖을 빨리니 양이 부족해 찡찡거리곤 했다. 암죽을 끓여 먹여도 아들은 그때부터 왜소하게 성장하여 어른이 된 후도 왜소했다. 막내 시동생이 신장병이 들어 병원에 입원하게 되어 시어머니는 집에 계시고 병원에서 시동생 수발을 했다. 시동생이 퇴원을 하고 큰 시동생이 장가를 들어 식구는 17명이 되었다. 밥, 국을 퍼다보면 한 두 그릇 덜 펄 때와 더 펄 때가 예사로 일어났다. 늘 오는 걸인이 아닌 어쩌다 오는 걸인은 축담에 놓인 신발을 보고 어제 저녁 제사를 모신 모양인데 떡 좀 달라는 요청을 자주 했다. 시동생 시누이 결혼을 연거푸 치러야 했다. 7명이나 되는 학생들의 학비 때문에 가세는 자꾸만 기울었다. 아침마다 도시락 챙겨야 하고 학용품 값, 차비 챙기느라 요란스러웠다. 남편은 야윈 몸에 키만 멀쑥하게 컸지만 헌신적인 성품에 몸을 아끼지 않은 탓인지 마을 사람들로부터 뼈 장골이란 말을 들었다. 무슨 일을 할 때 온 힘을 다해 임하고 ‘면민 체육대회 가마니 매고 달리기’ 선수에도 자주 출전할 정도로 힘을 아끼지 않았고 근검절약하는 생활을 했다. 마을에서 일어난 대소사에도 항상 앞장섰다. 사라호 태풍 때 감 주우러 가다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이석문(대동댁)씨의 딸 이복덕을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급류에 뛰어들어 구해내기도 했다. 화급한 상황에 자기 일신을 돌보지 않고 대처하는 그 모습이 평소 삶의 자세였다. 전기가 들어오기 전, 마을에 자가 발전을 해 호롱불 대신 전깃불을 밝혔는데 고장이 잦아 전기 고장 수리도 자원해서 오랫동안 했다. 시아버지가 위암에 걸려 오랫동안 투병생활을 하다 1968년 세상을 떠났다. 병원 입원도 오래 했고 집에서도 견디기 어려운 고통에 시달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고통은 차라리 아픔을 나누어 가질 수 있다면 훨씬 편한 일인데 나눌 수도 없고 참기 어려운 고문이었다. 아들은 덕원공고 2학년에 다니고 시동생은 영남상고 1학년에 다녔다. 부산에 유학한 두 사람의 학비를 감당치 못해 아들은 고등학교2학년 때 중퇴를 시키고 시동생은 고등학교를 졸업시켰다. 아들에게 평생동안 미안하고 죄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때 가정사정으로는 어쩔 수 없었다. 아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행한 일이지만 아들은 방황을 많이 했다. 친구들과 술을 자주 마셨고 어느 날 술을 한꺼번에 너무 많이 마셔 혼수상태가 되어 부산대학 병원에 입원해 사경을 헤매다 살아난 일도 있다. 아들과 시동생이 군 입대를 했다. 아들은 강원도 홍천, 시동생은 대전에서 군대 생활을 했는데 아들은 한 번도 면회 가지 못하고 시동생은 면회를 갔다. 아들은 엄마의 심정을 이해하리라 생각했는데 서운했던지 간혹 그 일을 교동댁에게 들먹거렸다. 어느 부모가 자식 멀리 보내놓고 하루에도 몇 번씩 달려가고 싶지 않을까. 북쪽을 향해 하늘을 얼마나 보았는지 북쪽 하늘 보는 게 버릇이 되었다. 새마을 사업이 한창 열기를 더해가던 1975년경 남편은 마을 이장을 맡았다. 새마을 사업을 다른 부락보다 우수하게 추진하겠다는 열의로 임한 남편은 매일 같이 몇 사람의 공무원이나 외부손님을 집에 모시고 왔다. 할 일도 많은데, 손님 식사대접은 해야 하고, 찬거리를 살 사정도 되지 못했지만 찬을 장만할 시간도 없고 가족끼리 먹는 대로 대접할 수도 없고 여간 걱정이 아니었다. 그때는 교통이 불편한 때라 양산군청에서 오는 손님은 자주 집에서 자고 가기도 했다. 집에 찾아 온 손님을 식사 대접을 않는다는 것은 가족 굶기는 일보다 더 불경한 일로 생각하던 때였다. 교동댁이 시집와서 33년을 모셔도 단 하루도 몸져눕지 않고 살아오신 시조모님이 주무시던 잠결에 아흔 세 살의 연세로 저승에 가셨다. 시어머니는 일흔 세 살에 며느리 신세를 면하고 가정의 최고 어른이 되셨다. 시동생, 시누이 8명 성혼시켜 살림 내고 아들, 딸 5남매 고이 길러 출가시키고 나니 남은 것은 가난과 늙어 힘 빠져 나약해진 몸뚱이뿐이었다. 교동댁은 밤만 되면 온 몸이 쑤시고 아려 잠을 이룰 수가 없어 뒤척이다 새벽같이 일어나서 일했다. 일에 쫓기다 보면 아픈 곳이 달아나 아픔을 잊기 위해 더 부지런하게 닥치는 대로 일에 몰두했다. 그토록 매사에 적극적이던 남편이 나이 50이 가까워오니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누가 보아도 한눈에 병자임을 느낄 수가 있을 정도로 건강이 좋지 못했다. 본인은 자기 병을 훨씬 이전부터 알고 있으면서 가족들이 걱정하고 치료비도 부담되고 노동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인데 가족들이 알면 일도 하지 못하게 할 것이기에 숨기다 도저히 일어나지 못할 순간이 되면 알리고 죽어야지 하는 마음이었다. 조기 치료를 했더라면 나을 수 있는 폐결핵이었다. 병을 키워 악화상태에서 치료하려고 하니 병원에 장기간 입원도 하고 집에서도 병원 약을 타와 온갖 민간요법의 치료를 해 봐도 가물가물 꺼져 가는 생명을 연장할 뿐 별 차도 없었다. 남편은 십 년을 훨씬 넘어 고생만 하다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의료보험이 없던 때라 치료비도 만만찮게 들어 채소도 키워 팔고, 산나물도 뜯어 팔고, 품팔이도 하고 닥치는 대로 푼돈이라도 될 일이라면 다 했지만 빚만 늘어가고 병에 대한 치료약값 감당하기도 벅찼다. 독한 약을 장기 복용하면 원기를 돋우게 해야 된다는 사실을 너무 뻔하게 알지만 형편이 되지 않아 살이라도 베어 먹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찬도 변변찮게 해서 상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가슴 아프고 한 맺힌 일은 그렇게 오랫동안 신고해도 보약한번 지어주지 못한 것이었다. 교동댁은 그 생각만 하면 자신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그런 와중에 가족 중에 사업을 한답시고 돈을 빌려 달라기에 농협에서 돈을 빌려 주었더니 갚지 않아 재산이라고 남은 것은 기거하는 집인데 집마저 압류가 되었다. 그 고비를 어떻게 넘겼는지. 교동댁은 사는 것 보다 죽는 것이 훨씬 편하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아무리 고달픈 삶을 살아도 남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내가 사는 것인데 다른 이의 도움을 기대하지도 않고 원망하지도 않았는데 자꾸 서러워졌다. 각자 갈 길을 가고 나니 집에 남은 식구는 연로하신 시어머니와 단 둘이었다. 서로 불쌍히 여기며 살아야지, 피차 살면 얼마나 살겠느냐 공을 쌓는 자세로 살자 하며 살려고 노력해도 시어머니가 팔순 중반부터 자주 편찮으시고 몸이 고달파 짜증을 내시고 정신이 맑지 못해 그런지 교동댁이 일생을 딴에는 이를 악물고 산다고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가세가 기운 것도 전부 며느리인 교동댁 탓했다. “박복한 것이 니가 이집 며느리가 되어 주변 분들이 죽도록 고생만 한다.” 교동댁은 화가 나도 시어머니 말씀은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었는데, 젊은 다른 가족들도 시어머니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노골적으로 무엇하는 사람이냐는 식으로 나왔다. 죽도록 고생하며 산 것은 몰라주더라도 남은 것이 원망뿐이라니..... 교동댁도 그 분들에게 서운했던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원망한 일 없이 잘 견뎌 왔는데 나이 칠십 고개가 되니 망령이 생겨나는지 그동안 살아온 자신의 모습이 슬프고 원망만 생겨났다. 교동댁의 그런 응어리를 누가 알겠는가. 9남매가 장질 조카(교동댁 장남) 고등학교 중도포기 할 때 어느 누가 한 사람이라도 적극적으로 말렸던가? 헛말이라도 좋았다. 우리가 차례대로 등록금을 한 번씩 내 줄 테니 학교를 계속하도록 하라는 그 말 한마디도 못했던가. 나이 70이 되어 시어머니 약값 마련하기 위해 날품 팔고 밤낮 모르고 허우적거리며 살고 있는데 아흔 넘은 어른 봉양 잘못해 건강 해쳤다고 몰아세우는 이가 더 많다. 내가 그토록 불효막심한 며느리인가? 18세 시집온 이후 70되는 이날까지 단 하루도 나를 위해 보낸 날은 없었는데. 생각도 나를 위해 해본 일이 없었는데. 교동댁은 한편으로 서운했지만 마음을 달리 먹었다. 시조부모님 계시고 형제 많은 집에 시집 와서 시조모님 33년, 시아버지 20년, 시어머니 52년 모셨다. 교동댁은 어른들이 자신을 꾸짖고 무리하게 했던 순간은 다 잊고 그 어른들이 잘해 주신 순간만 간직하기로 했다. 잘 모시지 못해 후회되고 잘 모실 걸 하는 후회뿐이었다. 친지들이 보는 시각처럼 효심이 하나 없었다 한들 가정부로 팔려온 자세로 임했다. 일생 끼니때마다 자신이 먹는 밥보다 훨씬 더 좋은 음식으로 정갈하게 차려 올렸다. 그런 교동댁의 모습은 눈을 뜨고 있는 사람이면 다 본 모습이었다. 사람들을 원망할 일이 아니었다. 모든 것은 눈뜨고 보지 못한 그 눈 탓이었다. 교동댁은 자신에 대한 아무 바람도 없었다. 자신의 처지는 어찌 되어도 좋았다. 자식들이 잘 되어 가는 모습만 보고 싶었다. 오늘 저녁에라도 영원히 잠들어 버린다면 얼마나 편할까. 교동댁은 생각을 해 보지만 백수 가까운 시어머니 상주 짓이나 하고 뒤따라 가야할 텐데. 교동댁은 온 만신이 아픈 것이 걱정이었다. 그렇게 한평생 온 정성으로 어른들을 모시고 살아온 교동댁. 그녀는 2002년 월드컵 4강 진출로 온 국토가 흥분의 도가니 속에 술렁였어도 세상만사가 귀찮은 사람이라 아무 관심도 없이 내일 품 팔러 갈 채비 차려놓고 죄스럽게도 시어머니 상주 짓을 못하고 2002년 6월 22일 새벽 영원한 세상으로 떠났다.
|  | | ⓒ 웅상뉴스 | | 시인 박극수 (현)웅상지 편집위원장 전 웅상농협 조합장 웅상주부합창 단장 천성산문학회 회장 |
웅상뉴스 기자 /  입력 : 2015년 08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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